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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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르다 말고 본래면목 보세요"
[강설대법회중계]②의룡 스님(前 직지사 강주) '육조단경'
부처님 가르침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의룡 스님은 <육조단경>을 통해 우리의 본래 면목을 찾자고 당부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불교의 선맥을 본다면 저 인도의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정법 인장을 이어받은 시조(始祖)고, 그로부터 28대에 해당하는 보리달마(菩提達磨)대사가 중국에 와서 법을 펴니 29대가 혜가(慧可) 스님, 30대 승찬(僧璨) 스님, 31대 도신(道信) 스님, 32대가 홍인(弘忍) 스님, 33대가 바로 중국 선불교의 혜능 스님(慧能, 638~718)입니다. 그 분이 바로 육조(六祖)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육조 스님의 법문을 모은 것을 ‘단경(壇經)’이라고 합니다. 이 <육조단경>이 오늘 법문의 주제입니다.
우선 <육조단경>의 제1행유품(行由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대사가 보림에 이르자 소주에 사는 위 자사가 관료들과 함께 산에 들어와서 스승에게 대범사의 강당에서 대중을 위하여 인연을 열어서 설법하기를 청하므로, 스승이 자리에 오르니 자사와 관료 30여명과 유교 선비 30여명과 비구와 비구니와 도를 닦는 이와 속인 등 천여 명이 다 같이 예를 취하고 법문 듣기를 원하므로 스승이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선지식아! 보리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만 쓰면 바로 마침내 부처를 이루리라.”
이것은 혜능 스님이 법상에 올라서 한 말입니다. 여기서 보리는 무상의 도리입니다. 자성(自性)은 본래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는 것입니다. 옳음도 그름도, 선도 악도 아닌 것을 일컫습니다. 그 마음을 바로 사용할 줄 알면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라는 것은 바로 깨달은 무상의 참된 지혜입니다.

선지식아! 나 혜능이 법을 얻은 내력을 들어보라. 나의 선친은 본관이 범양(范陽)인데 좌천되어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신주(新州)의 백성이 되셨다. 이 몸이 불행해 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외롭게 사는데 뒤에 남해로 와서 가난한 살림에 쪼들려 고생을 하며 시장에서 나무를 팔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서 객점으로 갖다 달라 하므로 혜능이 손님에게 갖다드리고 돈을 받아 나오다가 어떤 손님이 경 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경을 잠깐 들으니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하므로 마음이 열리고 깨쳐서 ‘손님께서는 어떤 경을 외우고 계십니까’ 물으니 손님이 ‘<금강경>입니다’하므로 다시 묻되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가지고 계십니까”하니 손님이 말하길 “나는 황매현 동선사(東禪寺)에서 왔습니다. 그 절에는 오대조인 홍인 대사가 계셔 교화를 하시는데 문인이 천여 명이나 됩니다. 저도 그 곳에서 예배하고 이 경을 받았습니다. 대사께서는 항상 스님들과 속인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금강경>만 받아 지니면 스스로 견성하여 바로 성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옛적부터 인연이 있어서 그 손님이 은 열 냥을 주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을 충당해 놓고 황매산에 가서 오조에게 예배하라” 하시므로 혜능이 어머님을 편안히 모셔놓고 30여 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황매에 이르렀습니다.
오조에게 예배하니 홍인 대사가 물어 가로되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물건을 구하고자 하는가”하시니 답하기를 “저는 영남의 신주에 있는 백성인데 멀리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부처가 되길 바랄 뿐 물건을 구하지는 않습니다”했습니다.
조사가 말씀하시길 “영남 사람이라면 곧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하시므로 말씀드리길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은 화상과 더불어 같지 않겠지만 불성(佛性)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오조가 다시 말씀하시려다 대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대중을 따라가 일이나 하라”고 하시므로 “혜능이 화상께 여쭙겠습니다. 저는 자기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성을 떠나지 아니 함이 이것이 곧 복전(福田)이라고 아는데 스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라 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오랑캐의 근성이 너무 날카롭구나. 너는 가서 방앗간일이나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혜능이 물러나 후원에 이르니 한 행자가 나무를 쪼개고 방아를 찧게 해서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조 스님이 혜능을 보고 말씀하시길 “너의 소견이 가히 쓸 만하구나. 그러나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워 너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했다. 너는 그것을 알았는가?” 하시므로 “저 역시 스승의 뜻을 알았으나 감히 당 앞에 나아가지 못했으며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오조 스님은 하루는 모든 제자를 불러 모아 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설하노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큰데 너희들은 날마다 복전만 구하고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구하지 않는구나. 자성(自性)이 만일 미혹하다면 복을 어찌 구원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가서 각자 스스로 지혜를 살펴보고 자기의 본심인 반야(般若)의 성품을 취하여 각자 게송을 하나씩 지어 나에게 바쳐라. 만일 큰 뜻을 깨달았으면 가사와 법을 전하여 제 육대조로 삼으리니 속히 돌아가서 지체하지 말거라. 사량(思量)으로 헤아린다면 맞지 않을 것이니라. 성품을 보는 사람들은 말 아래에 모름지기 볼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이와 같은 자는 칼을 부리는 전쟁터에 나가서도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대중들은 분부를 받고 물러나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밝혀서 뜻을 써서 게송을 지어 바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신수상좌가 교수사(敎授師)이니 반드시 그분이 그것을 얻을 것인데 우리가 게송을 짓는 것은 마음만 헛되이 할 뿐이다” 했습니다.
신수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저들의 교수사이기 때문이니 내가 모름지기 게송을 지어 화상에게 보이리라.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화상이 어찌 내 마음 속의 견해가 깊은지 옅은지 알겠는가. 내가 게송을 바치는 뜻은 법을 구하는 것이니 좋은 것이려니와, 조사의 자리를 찾는 데 있는 것은 악이니라. 도리어 범부의 마음과 같아서 성인의 자리를 빼앗음과 어찌 다르겠는가.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니 크게 어렵고 어려운 일이로구나.”
오조의 당 앞에는 복도가 세 칸이 있었는데 공봉(供奉)인 노진(盧珍)을 청해 <능가경>의 변상도와 오조의 혈맥도(血脈圖)를 그려 전하여 내려가며 공양하게 하도록 하는 중이었습니다. 신수가 게송을 바치려 여러 번 당 앞에 갔는데 마음이 황홀하고 온몸에 땀이 흘러 바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4일 동안 열세 번이나 게송을 바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신수가 생각하기를 ‘복도 아래에 글을 붙여서 스님이 보시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만일 좋다고 말씀하시면 바로 나아가 예배하며 내가 지었다 말씀드리고, 마땅치 못하다 이르시면 헛되이 산중에 들어와 여러 해 동안 다른 사람의 예배만 받은 것이니 다시 무슨 도를 닦겠는가’ 했습니다. 이날 밤 삼경(三更)에 다른 사람들이 아리 못하도록 직접 등을 들고 남쪽 복도의 벽 사이에 게송을 썼습니다. 게송에 이르길
“몸은 곧 보리의 병풍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을 거는 걸이와 같구나(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가 일어나지 말도록 할지어다(勿使惹塵埃)”

자, 여기까지 단경을 중심으로 살펴 봤어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대의(大義)만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법회에 오기 위해서 50년 만에 <육조단경> 전체를 다시 봤습니다. 봉선사 스님들과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저를 공부시킨 것입니다. <육조단경> 한 구절 한 구절 다시 읽으니 참 큰 뜻이구나 새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비(是非)는 이 대목부터 일어납니다. 저는 신수대사의 게송을 “몸은 곧 보리의 병풍이요”라고 새겼습니다. 보통 “보리의 나무요”라고 해석하지, 병풍이라고 새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예전이 배울 때는 ‘나무’라고 배웠어요. 그러나 제 해석이 절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한 번 새겨봤다는 것입니다.
몸은 보리를 장엄하는 병풍의 역할입니다. 보리가 주인공이지, 몸은 보리의 병풍 곧 장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마음은 밝은 거울의 걸이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하여금 먼지가 일지 않도록 하여라. 이것이 신수대사의 법문입니다. 신수대사는 당시 몇 백 명을 가르쳤던 강사 스님으로, 자신의 수행 견처(見處)를 이 글귀에 담아 오조 스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 게송을 들은 혜능 스님이 말로써 게송을 지었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是菩本無樹)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니요(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일것인가(何處惹塵埃)”
바로 이때부터 불교에 시비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처전심을 할 때는 이런 시비가 없었어요. 바로 신수와 혜능 행자와의 게송에서부터 시비가 일게 된 것입니다. 몇백 년 후에는 시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지요.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이 참 슬퍼요. 신수와 혜능 두 사람을 모두 인가하면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가섭존자에게만 법을 전한 것이 아니라 아난존자에게도 법을 전하셨어요. 두 분 모두에게 법을 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 불교의 장자종단이요, 전통종단인 조계종에서 툭 하면 시비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시비를 보면서 나는 “오조 때에도 이런 시비가 있었는데 어찌 시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다만, 그때처럼 법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시비가 아니기에 부끄럽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부처님은 40여 년간 법을 전하셨지만, 시비가 일어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선종에서 <육조단경>을 <금강경>과 더불어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지만, <육조단경>을 그리 탐탁지 않게 본 것이 바로 이 시비가 일어나는 것이 퍽이나 안 돼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수행이 덜 되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는 조계종에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육조 스님과 신수대사 간의 일화를 다시 찾아 읽곤 했습니다.
9월 23일 열린 봉선사 강설대법회 두 번째 시간에는 1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동참해 경전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구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육조까지는 여래선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여래선이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후 앙산 스님이 조사선을 개발했어요. 조사선은 하기 쉽습니다. ‘이 뭣고’ 문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참선하는데 숙제를 던진 것이 ‘뭣고?’입니다. 누군가 ‘부처가 뭐냐’고 묻자 ‘마른 똥 막대기’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니 ‘왜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는가?’하고 의심이 생기지요. 이런 숙제를 푸는 것이 참선입니다.
학교 다녀봐서 잘 아시겠지만, 숙제를 다 풀었다고 해서 바로 선생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사선 하는 사람들이 자나 깨나 ‘이 뭣고’하는데, 이것도 어쩌면 하나의 망상입니다.
불성자리는 말이나 문자나 행동으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만 안다고 해서 불성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뭣고’라는 숙제를 푸는 것이지 불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고, 나중에 생각이 달라 질수도 있지요. 잘 못 생각한 것이라면 용서를 바라면서, 그저 제가 이렇게 생각했으니 여러분도 이런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과제를 드립니다.
신수 대사의 게송을 다시 봅시다. 보리와 명경은 바로 도(道)입니다. 이것은 본분을 밝힌 것입니다. 밑의 두 줄은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명경의 먼지를 부지런히 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일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그대로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먼지가 끼면 그 작용을 받게 되는 것이 중생이요, 먼지가 끼지 않으면 부처다 이 말입니다. 청정보리심에는 언어도 문자도 붙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보리의 병풍이요, 마음은 명경의 걸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청정보리심에는 언어와 문자가 붙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보리심이라는 그 언어 자체도 잘 못된 것이지요. 신수대사의 게송은 이 점을 말한 것입니다. 제가 병풍이라고 해석한 것은, 몸이 보리를 장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시비가 붙을 것이 없어요. 그런데 혜능 스님은 여기에 게송을 다시 지었다 이 말입니다. 혜능 스님이 반박문을 짓지 않아도 되는데 게송을 조금 잘못 이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렇게 혜능 스님이 게송을 지어 바치자 오조 스님은 가사와 발우를 전한 후 배를 태워 보냈습니다. 이때 수백 명이 의발을 빼앗으려고 쫓아갔습니다. 혜능 스님이 “이 가사는 믿음의 표시인데 어찌 힘으로 다툴 수 있겠는가”하자 혜명이 “나는 법을 위해 온 것이지 가사를 뺏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고 말하며 법을 청했습니다. 이때 혜능 스님은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보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면목이니,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않아야 그것이 부처 자리입니다. 나의 본래면목입니다.
이 뜻을 알면 <육조단경>의 큰 뜻을 다 아는 것입니다. 이후의 법문은 다 군더더기입니다. 우리는 이 본래면목을 알기 위해 수도도 하는 것이고, 의발을 빼앗으려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뜻만 안다면 오늘 법문은 여기서 끝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본래면목 자리를 찾아봅시다.
정리=여수령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삼매에 들면 삼학은 절로 지켜지는 것
정원 스님(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질의법사로 나선 정원 스님(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사진=박재완 기자

[질문1] 어떤 경전이든 경전의 내용을 내포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름을 삼는다고 합니다. <육조단경>이라고 할 때 ‘단(壇)’은 불단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단경’은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의룡 스님] 혜능 스님은 동산에 야외 법단(法壇)을 차리고 설법을 했지요? 그 설법한 자리를 일컬어 ‘단’자를 붙여 <단경>이라 했을 것입니다.

[질문2] <화엄경>은 그 속에 원융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총망라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계만 보더라도 비구 스님의 경우 250계를 지켜야 합니다. 이 계는 다 외우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육조단경>을 보면서 일견 속이 후련하기도 했습니다. ‘돈오(頓悟)’의 논리로 보면 계가 곧 정이요, 정이 곧 혜라는 뜻으로 새겨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계정혜 삼학을 하나로 회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의룡 스님] 삼매(三昧)에 들면 계정혜 삼학은 절로 다 지켜지는 것입니다.

[질문2]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법문한 내용에 보면 ‘만일 일체종지를 이루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통달해야 한다(若欲成就種知 須達一相三昧 一行三昧)’고 하셨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의룡 스님] 일상삼매도 그저 삼매입니다. 다르지 않아요.

경전 많이 보아도 망상 가득하면 지혜 멀어져
서재영(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질의법사로 나선 서재영 교수(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사진=박재완 기자

[질문1] <육조단경> ‘덕이본’ 등에서는 육조 스님의 탄생에서 광명이 비추고, 선인이 와서 예언을 하거나, 발우를 강제로 가져가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돈황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불자들이 <육조단경>을 공부할 때는 어떤 판본을 봐야 할지 궁금합니다.

[의룡 스님] 제 생각으로는 스님의 생애와 신이함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판본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님을 찬탄하는 내용이 담긴 ‘덕이본’ 등을 읽고 공부한다면 신심(信心)이 더 나지 않을까요.

[질문2] 스님께서는 ‘논쟁이 될 만한 이야기다’고 전제하신 후 신수 대사의 게송 중 ‘나무(樹)’를 ‘병풍’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동안 보리를 나무에 비유한 것은 나무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면 나무가 자라나 마침내 열매를 딸 수 있다는 뜻에서 쓰인 것이고, 신수 스님은 보리를 나무처럼 기르는 점수(漸修)를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에 반해서 혜능 스님은 보리란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뜻으로 게송을 지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신수 스님의 ‘樹’자를 나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병풍이라고 하면 점수라는 뜻을 대변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의룡 스님] 제가 나무를 병풍으로 새긴 것은 신수스님의 편에서만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배울 때는 큰스님들이 해석하는 대로 ‘나무’라고 그 뜻을 새겼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다시 <육조단경>을 보다 보니 해석이 달리 됐습니다. 몸은 보리를 장엄하는 병풍에 불과하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병풍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질문3] 스님께서는 신수 스님과 혜능 스님의 시비를 보고 무척 슬퍼하셨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꾸고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 즉 파사현정(破邪顯正)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선과 악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옳고 그름도 생각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의룡 스님] <금강경>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만 제대로 생각하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려는 일심(一心)이 견고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질문4] 이번 법회의 주제가 ‘경전,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경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까?

[의룡 스님] 망상(妄想)을 버리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망상이 가득하면 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한 줄의 경전을 보아도 청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리=여수령 기자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6-10-02 오전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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