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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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그리기에 내 예술 생명 걸었죠
[산문밖의선]조형주의선구자 김흥수 화백
미수 맞아 10월 13~11월 17일 도시갤러리 초대전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그린 <염>과 <오>가 마주 걸려있다.

“나 불자 아니에요.”
불교와의 인연을 묻는 기자에게 대뜸 김흥수 화백(88)은 부인부터 한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반대의사들이 튀어나온다.

김 화백의 아름다운 동반자 장수현 관장은 “온 집안이 불자예요. 사실 불자세요. 미흡하다 생각하셔서 그러시는거지, 불자 맞아요”라고 거든다. 부인의 말에 김 화백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저 살짝 미소지을 뿐.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그린 ‘염(念)’과 ‘오(悟)’가 마주보고 걸려있다. 생각에 잠긴 ‘염’, 살며시 미소짓는 ‘오’를 보며 “상호 위에 알알이 새긴 점 표현조차도 하나하나 신경써서 작업했다”고 설명하는 김 화백은 “‘염’은 인생문제를 생각하는 부처님을 구상으로, 빛을 환하게 하는 만다라를 추상으로 한 화면에 표현한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끊임없이 미륵부처님을 그려왔다. 김 화백은 “미륵불을 그릴 때 이것은 국보다 라는 생각을 그림에 투입하며 이 작품이 국보에 견줄만한 표현이 되는지 몇 번이나 자문자답하면서 그린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런 기를 넣으며 그려서일까. 일본에서 매해 열리는 코리안 평화미술전(남북 작가전)의 1998년 오사카(大阪)전 때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김 화백의 ‘미륵불’ 앞에서 “빛이 비쳐오며 미륵불이 보인다”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왜 부처님을 그리는지 궁금했다.
“학생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를 그린 그림에 대해 성스럽다고 평한 책을 봤어요. 종교적인 최고 분위기는 예술의 최고 분위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부처님과 가까웠으니까 당연히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종교적인 엄숙함이 나오는지 보고 싶었어요. ‘부처님’에 내 예술 생명을 걸었던 거죠.”

‘부처님’이 그려지면 인간사 인생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을 그리면서 ‘나를 버리라’는 말을 체득했다.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만이 그림에서 종교 이상의 것도 나올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977년 작 ‘염’을 선보이자 평론가들은 김 화백의 조형주의(하모니즘) 회화양식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조형주의는 추상과 구상을 같은 화면에 병존시키는 회화양식으로 김 화백에 의해 시작됐다.

“부산 피난 시절, 파리에서 추상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보고 우리도 추상을 해야 한다는 화가들 사이에서 홀로 반대했다”는 김 화백은 “모방만 하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무엇이 새로울까 자문자답했다”고 말한다.

이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주관(추상)과 객관(구상)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것이었다. 김 화백이 1970년대 꽃피운 조형주의의 발로이자, 하모니즘의 단초였다.
김 화백은 추상과 구상을 같은 화면에 병존시키는 <조형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함흥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부터 붓을 잡았다. 겨울에 그린 작품으로 4학년 때 국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서너번째 그린 유화였다. 그 입선으로 자신감을 가졌다.

“상을 탔는데도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할아버지는 장교였고, 아버지는 군수였으니 얼마나 보수적이었겠어요. 그림 그리면 굶어죽는다고 엄청나게 반대하면서도 아버지는 내 장래를 염려하셨는지 학교 미술선생님과 상담을 하시더군요.”

그림을 반대하는 집안의 뜻에 반해 가출도 감행했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그림공부의 길을 고집했다. 결국 집안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 길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5년제 국립도쿄미술학교 진학을 위해 도일행을 감행한 것. 당시 일본 최고의 미술 대가들이 만든 도쿄미술학교였다. 도쿄미술학교의 방침이 머릿수를 채워 한국인 학생을 입학시키던 관행이 없어지고 철저히 실력제로 바뀐 시점이어서 어려움을 더했다. 체계적인 뎃생 공부조차 해보지 않았던 김 화백에게 시험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재수 삼수, 이대로 안되겠다 결심했다.

“왜 떨어졌는지 자문자답했어요. 석고뎃생을 흉내내다보니, 나 자신의 자유분방한 표현력이 굳어진 것이 폐인이라고 생각했죠. 1등만 하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사라질거라는 해답을 얻었고 그때부터 3시간 자고 그림과 공부에 몰두했죠.”

그리고 60년이 넘도록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 혼자 그림에만 몰두했다. 전 세계 화단에서 1등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림만 그렸다.

공부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빠듯한 재정으로 굶어가며 공부했다. 체력은 급격히 떨어져갔다. 학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대로 질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돈을 더 아끼기 위해 자취를 시작했다. 사먹을 때보다 오히려 먹는 것이 나아졌다. 그렇게 체력관리를 했다. 귀국후 병원에서 ‘폐병을 앓았다가 완치됐다’고 진단받았다. 이국땅에서 홀로 폐병을 이겨냈던 것이다.

“오로지 정신력과 신념으로 버텼다”는 김 화백은 “고생해서 미술학교에 들어간 일이 인생 개발에 영향을 줬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김 화백이 프랑스에서 5~6년을 머물며 인정을 받고 미국에서 교단에 서기까지 끊임없이 창작을 거듭해왔다.

미수가 되도록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 김흥수 화백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10월 13일 전시를 시작한다. 도시갤러리 개관 3주년 초대전으로 부산과 조우하는 김 화백. 전시를 마치는 11월 17일에는 미수를 맞는 생일의 기쁨을 친우들과 나눌 생각이다.
미수를 맞게 되는 김 화백은 오는 10월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전시 준비를 위해 지난 7월 부산을 찾았다. 전시장도 둘러볼겸 통도사 나들이길을 나선 것. 생애 처음 KTX를 탔던 흥분은 통도사에서는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별천지였어요, 내게는.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물론 내가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리기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조금 됐지만요.”

올 여름 내내 부처님만 그렸다. 통도사의 강렬한 인상은 천진난만한 부처님 상호를 만들어냈다. 한창 마무리작업 중인 3분의 소품 부처님들은 도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조금씩 손해보고 사는,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이 건강 비결인 노화백. 2번에 걸친 김흥수 화백과의 만남은 신세계를 접하는 ‘신선함’이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김 화백은 하얀 정장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두까지 하얗게 맞춰 신은, 하얀 턱수염의 노 신사는 매력적인 향기를 뿜어냈다. 두 번째 만남은 검은 셔츠에 크고 파란 팬던트가 인상적인 차림새로 멋쟁이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빠지지 않는 패션아이템 모자는 김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멋쟁이로 사는 건강비결을 듣고 싶었다.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건강비결”이라고 강조하는 김 화백은 “남을 속이면 속에 음침한 응어리가 져서 끊임없이 나를 위협하기 때문에 끝이 안좋다”며 “모든 것을 용서하고 내가 조금 손해보고 살자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오늘도 김흥수 화백은 밤 늦게까지 부산 전시회 준비로 바쁘다. 드로잉과 부처님 그림 등도 마무리 작업 중이다. 전시를 앞두고 준비할 것도 많고, 흥분돼서 잠도 푹 자지 못한다.

젊은 시절 전시회를 준비하던 때나, 여든이 넘어 미수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시회를 앞둔 화가의 심장은 두근두근댈 뿐이다.
글=강지연 기자ㆍ사진=고영배 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6-10-07 오전 9:10:00
 
한마디
멋있는 인생인네 한 소식 했군요.
(2006-10-09 오후 2: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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