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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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구속이 아니라 해탈 수행법"
[원각사재가논강]⑥지현 스님(송광사 율원장)
광주 원각사(주지 도제)가 마련한 호남 최초의 재가논강이 9월 15일 ‘지계 바라밀’을 끝으로 회향됐다. 이번 논강은 육바라밀을 통해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점검하는 자리였으며, 재가자들이 직접 논주와 토론자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 논강에는 송광사 율원장 지현 스님이 ‘지계’에 대해 주제발표를 하고 질의응답으로 진행됐다. 논강 참석자들은 지현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받고 재가논강을 회향했다. [편집자 주]
원각사 재가논강 여섯번째 시간이 지계바라밀을 주제로 15일 열렸다.

여러분은 행복하기를 좋아하시죠. 계(戒)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무엇이든 구속되거나, 갇히거나, 묶여 있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으로 이끄는 계를 ‘해탈 수행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계는 구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먼저 계는 ‘구속’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계는 근본적으로 선한 행위, 선하게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 때, 악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됩니다.
계율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곳 원각사에는 스님, 청신사, 청신녀 등 많은 대중이 살고 있습니다. 대중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규정을 ‘계’라 하고, 규정을 잘 지킨 사람에게 포상하거나 벌주는 것을 ‘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는 청정하게 살라는 구속력보다 권유의 뜻이 있고, 율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계를 잘 지키는 방법으로 매일 칠불통계(七佛通戒) 봉독을 권합니다.
“갖가지 나쁜짓을 꿈엔들 하오리까. 착한 일 얼마든지 받들어 행하리니. 그리하여 이 내마음 청정하여지면, 이것이 부처님 가르치신 법이라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계율을 잘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나는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깨달은 이는 계율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으로서 아직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모기, 파리를 잡은 뒤 ‘지옥 가는 것은 아닌가’하고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이지 않으면 더 좋지만, 너무 죄의식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한 마리를 죽였으면 열 마리를 살리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비심으로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죽여야 되는 일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수계 의식문에 ‘앉아서 계를 받고 서서 파한다하더라도 계를 받는 공덕이 무량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알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고, 알게 되면 공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계속 반복하게 되지만, 알게 되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기 때문에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는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대 조사 중에 한 분도 계율을 소홀히 생각한 분은 없었습니다. 부처님도 열반하실 때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계율을 부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부처님 말씀처럼 받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율은 부처님의 생명입니다. 계율이 죽으면 불법도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현 스님
경전에서 부처님은 “계는 고통의 수렁에서 올라올 수 있는 밧줄과 같고, 고통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계를 지키는 것은 옷이 몸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삿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율을 지니고 그것의 힘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 행복을 얻고 죽은 후에도 천상,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재가자로서 불법을 공부하는 이는 삼귀의와 오계를 받고 지키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계를 복잡하게 생각 말고,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계율은 곧 ‘전력수행’입니다. 자기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잘 관찰하면 불행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수행입니다.


질의 응답

* 계율을 지키고 싶지만 직업상 술집을 운영하거나 도살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보살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술을 팔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만큼 술을 권하거나 파는 것이 계율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계율은 선 한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에 반하는 업은 서서히 바꾸어야 한다.
이준엽 기자 | maha@buddhapia.com
2006-09-25 오전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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