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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법회는 참으로 뜻이 깊습니다. 봉선사가 어떤 절입니까. 조선 세조 사망 후 부인 정희왕후가 광릉(光陵) 즉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사찰을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했습니다. 전국 교종을 총괄하던 곳으로 교종 본찰입니다. 대대로 교종의 맥을 이어왔지요. 운허 큰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해 받은 이 자리에 함께 하고있는 대강백 월운 스님이 주석하시는 곳입니다.
이번 법회는 참선으로만 견성성불 오도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 속에도 그러한 법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 펼쳐지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교종은 이 법회에 긍지를 가져야 하고,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경전에 의지해서 깨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고, 깨칠 수 있는 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자 수행하는 것은 상구보리요, 중생을 교화는 하화중생인데, 하화중생에 목적을 두면 경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습니다.
중국 양나라 혜교 스님이 <고승전>을 편찬할 때 10가지 분류기준을 정했습니다. 그 첫째에 속하는 것이 역경승입니다. 두 번째가 경전 주석하는 스님, 세 번째가 참선하는 스님, 네 번째가 명률이라 해서 율을 잘 지키는 스님 순서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역경을 가장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서기 67년 후한 명제 때 가섭 스님 등이 모시고온 게 이 42장경이었습니다. 스님은 경전과,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니 삼보가 함께 전래된 거죠. 그러나 경이 아무리 와봤자 경은 스스로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뜻을 포함하고 있어도 그것을 소개ㆍ설명하는 이가 없으면 그 위대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유컨대 보배가 있으나 어두운 밤에는 등불이 없으면 보배를 볼 수가 없기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과 같은 겁니다. 경전이 중요하고 번역과 가르침 역시 중요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주석이 필요하죠. 이것이 교종 종지의 근본입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입니다. 수천종의 경전이 있습니다만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에 있어서는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 근본이고 팔만장경 가운데 핵심이 됩니다. 물론 <화엄경> <법화경> 등도 있지만 현재 부처님 경전 가운데 범본이 오롯하게 남아 있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소의(所依)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화엄종은 <화엄경>이, 법화종은 <법화경>이, 정토종은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등 3부가 소의경전입니다.
조계종은 선종이기 때문에 ‘말을 떠난’ 자리에서 진리를 추구합니다. 말을 초월한 경지에서 말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반야심경>에 의하면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보면 볼수록 차별이 생겨서 오롯한 실체를 볼 수가 없어요.
실체를 보려면 모든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금강경>은 파상(破相, 모든 상을 깨뜨린다)이라 했어요. 알맹이를 보자면 껍데기를 다 버리고 부숴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성종과 상종을 말합니다. 상종은 유상적인 현상계, 모든 삼라만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은 그 상 속에는 반드시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고 둥근 모양은 돌의 상이고 굳은 것은 돌의 성입니다. 불을 보고 덥다 뜨겁다 하는데 빨간 것은 상이고 뜨거움은 성이에요. 빨간 모양은 볼 수 있어도 불의 뜨거움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은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지수화풍’ ‘사대’의 모양은 보지만 성은 볼 수가 없습니다. 성을 못 보기 때문에 우리는 참선을 해야 하는 겁니다. 선종의 종지는 바로 자기의 성을 보기위해 참선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심성이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고 몸을 움직이고 모든 작용하는 주체는 몸뚱이가 아니에요. 몸뚱이는 지수화풍 물질, 고기덩이지 우리의 실상이라고 할 수 없어요.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말하는 종파입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실체를 파내야겠다, 실체를 체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참선을 합니다. 불립문자를 외치는데 문자는 전부 경전이요, 논이요, 글이란 말입니다.
글 속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불’ ‘불’ 하고 아무리 불러봤자, 입 속이 뜨거워지지 않아요. 불덩이를 입 속에 넣어야 뜨거워서 온통 혼이 나지. 말로 불이라고 천만번 불러봤자 입이 뜨겁지는 않습니다. 상은 전부 가상이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선은 왜 합니까. 실체를 찾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선종입니다. 사실 선종인 조계종은 그 안에 참선수행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종 율종 진언종 등이 모두 하나로 통합된 종파라고 볼 수 있어요.
조계종에서 의지하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불립문자인데 경이 왜 필요할까요? 불립문자라 하면 경이 필요 없어요. 참선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부처님 경전을 보면 화엄부, 법화부, 열반부, 반야부 등이 있어요. 반야부가 <금강경>이 속해 있는 부입니다. 반야부 경전만 600권이나 되는데, 그 속에 인왕반야, 호국반야, 마하반야, 금강반야부 등 8부가 있습니다. <금강경>은 반야부의 600권 중 제577권에 해당하는 한 권이에요. 글자는 5천7백자쯤 되는 가장 작은 경전입니다.
<금강경>은 중국에 전해지면서 여섯 번 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역은 402년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 두 번째는 535년 보리유지삼장, 세 번째는 566년 진제삼장, 네 번째는 590년 급다삼장, 다섯 번째는 648년 현장 법사, 마지막은 695년 의정 스님이 번역했습니다. 삼장은 경율논을 두루 잘 아는 법사에요. 이 가운데 한국 통용본은 첫째 구마라집 번역본 입니다.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온 것이 527년인데 <금강경>이 초역되고 150년 후에 건너왔어요. 달마가 선종을 세우기 전 500여년 동안 중국에 전파된 불교 사상은 전부 교종에 속해있습니다.
달마 스님이 와서 제창한 것이 ‘불립문자 견성성불’입니다. 선종은 수행의 한 종판데 가장 탁월한 종파입니다. 마음이 해이해지면 경책하고 때려잡고, 아주 오롯하게 몰고 가는데는 선종이 최고예요. 달마 스님은 “마음의 정체는 선리(禪理)”라고 말했습니다.
달마 스님이 중국에 왔을 때 500년 간 뿌리 내린 교종 교리 때문에 달마가 말하는 사상이 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림굴에 가서 9년간 면벽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혜가 스님을 만나 이심전심 뜻으로 통해서 초조 달마, 이조 혜가가 된 겁니다. 법은 전할게 없이 오고 가는 눈빛으로도 서로 알아요. 고개 끄덕이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그건 말이 필요 없어요.
법을 전하는데 무식한 사람은 전했는지 안전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표시가 없거든. 그래서 <능가경>을 증표로 줬어요. <능가경>에 네 가지 번역이 있는데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4권을 준 겁니다. 여기에 의지해 중생을 제도하라 한거죠. 그래서 <능가경>이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이 됐어요.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왔습니다. 홍인 대사 때 <금강경>으로 소의경전을 바꿨습니다.
<능가경>은 상(相)·명(名)·분별(分別)·정지(正智)·진여(眞如) 등의 오법을 주축으로 설해졌어요. 상은 명상이기 때문에 반야계하고는 반대고, 명은 이름인데, 이름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 사람 이름하고 그 사람의 본래 면목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분별은 뭡니까. 전6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까지 식을 설명했기 때문에 이건 전부 분별이에요. 제9백정식에 올라가야 무구진여입니다. 제8식도 진망(眞妄)이 화합한 잡동사니예요.
우리의 마음인 중생심에는 깨끗한 마음도 있고, 더러운 마음도 있어요. 수행은 까만 마음을 없애고 흰 마음만 완전히 찾아내고 완성시키도록 하는 겁니다. 탐진치 삼독은 까만 마음이고 계정혜 삼학 육바라밀 등은 투명하여 하얀 마음이에요.
홍인 대사는 <금강경>이 격의(格義)불교가 유행하던 당시 일반 인식과 통하는게 있고 내용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한 것을 알아본 겁니다.
아집 법집을 깨뜨리고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나타내는 것이 <금강경>의 목적이에요. 아집 법집을 없애고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집 법집을 여의고 삼공을, 내 자신 주관도 공해지고, 객관도 공해지고 나중에는 공했다는 관념까지 공해진다는 삼공을 여의어야 하는 겁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닌 것, 유도 무도 아니면서 곧 유와 무라고 하는 이 사상이 중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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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사구게가 중심사상 입니다. 중간에는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인데, 석가모니라는 나의 이름을 불러 나를 찾으려한다면 그 사람은 사특한 도리를 행하기 때문에 사도를 향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부처를 볼 수 없다는 거죠. 석가모니도 이름뿐이지 석가모니는 따로 있어요. 그래서 상을 파해주는 겁니다.
경의 말미에 이르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 모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법은 이와 같으니라. 꿈 같고 환상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같고 번갯불 같나니 마땅히 이 같이 관찰하여야 하느니라.
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꿈에서 길을 가다 천만원짜리 수표를 주웠어요. 깨어보니 아무것도 없어, 얼마나 허전해요. 꿈은 실체가 없는 것이에요. 환은 환각이라, 부스럭하는 소리에 아무 것도 아닌데 놀래서 뛰다가 돌을 차서 넘어지면 코가 깨진다는 말이에요. 아무 것도 아닌데 왜 놀랍니까. 그림자라는 것은 물체가 없으면 안 생겨요. 물거품도 실체가 없는 겁니다.
‘이와 같이 아무것도 없나니 마땅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라.’ 이것을 여실하게 관하면 우리는 좌절할 필요도 없고, 무리한 욕심을 낼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면서 어려운 일이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부처님께서 용기를 주려고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했습니다.
‘사바세계는 고통 뿐 이기 때문에 참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거죠. 이 세상에 쉽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죽을 고생을 해야 성과가 있겠지요. 학자가 되려는데 잘살고 잠을 다 자고 놀거 다 놀고 하면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해예요. 살아가는데 용기를 가지라고 부처님이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사고(四苦) 팔고(八苦) 등 전부가 고통 아닌 것이 없어요. 이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다가 인연 다하면 육신을 벗어놓고 가는 거예요.
<금강경>의 공(空)사상은 부처님만의 독특한 교리입니다. 당신 이전에 있던 것들 중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배척한 것이 아닙니다. 공사상은 오로지 부처님만 주창하신 창설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사상이 <금강경>에 들어있기 때문에 오조 홍인 대사가 <능가경>보다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 적합하다 한거죠. 그래서 선종 소의경전이 <금강경>으로 바뀌었어요.
수행에는 많은 문이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넷으로 나누고 싶어요.
첫 번째 경절견성(經截見性)문이니 길이 있든 없든 바로 질러 가는 거예요. 그러므로 견성문은 참선을 해서 견성하는 문이지요.
두 번째로 염불문이니 이는 염불을 아주 열심히 하고 선행을 많이 닦아, 죽은 후에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수행입니다.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수명이 한정이 없어요.
세 번째는 즉신성불문입니다. 이 몸 이대로 성불한다는 뜻이에요. 대일여래를 법신으로 하는 진언종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진언의 위신력으로 업장이 녹아져 마음이 밝아져서 성불한다 합니다. 이 몸 이대로 성불하는 것이 진언종의 수행방법입니다.
마지막 수행은 의교수행문입니다. 경전에 의지해서 마음을 깨친다는 수행입니다. 경전을 보다가 깨친 이가 참 많습니다. <고승전> 가운데 ‘감통부’를 보면 <금강경> <법화경> 등을 일념으로 읽고 외워서 업장이 녹아 깨달은 스님들 얘기가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몇 사람 예를 든다면 육조 혜능 선사는 저잣거리서 처음 들은 <금강경> 가운데 ‘응무소주 이생기심’부분이 귀에 걸려 그 길로 오조 홍인 대사 밑으로 들어가 공부해서 깨쳤지요. 중봉(中峰)선사는 <금강경>을 읽다가, 말세에 <금강경>을 의지해 수행하고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짊어지고 대표할 존재라는 구절을 보다가 견성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진지하고 깊은 수행을 하기보다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신심이 부족한 탓이라고 봅니다. 신심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수행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경전수행으로 깨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경전과 부처님 말씀이 없으면 불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과 부처님만 있다 해도 포교가 스스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포교해서 알아듣도록 만들어야 해요.
부처님은 신·해·행·증을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서 실천에 옮기고 그 경지를 같이 체험해야 합니다. 모두 다 부처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경전이 중요하고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경전을 혼자 음미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지식도 별것이 아니라고 타파한 것이 선종의 사상입니다. 그 골자가 <금강경>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질의
진월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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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 스님] 한국 일본 중국 몽골 등을 북방불교라 하고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등을 남방불교라 합니다. 남방불교계에서는 팔리어 경전과 산스크리트어 경전만이 불교의 정통이라고 말하지만, 실로 팔리어장경도 극히 적은 소수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남방불교는 북방불교보다 논리적인 교리가 빈약합니다. 북방불교는 보고 중의 보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북방불교의 장점을 천명해야 합니다.
<금강경오가해>에서 육조 부대사와 야보 스님 등은 <금강경>을 선으로 해석하고, 규봉, 종경 스님들은 교로 해석했어요.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으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야보 스님의 송(頌)과 함허 스님의 <설의>입니다.
야보 스님의 게송을 일부를 소개한다면 “밤에 달이 훤히 비친 뜰 앞에 바람이 부니 대나무가 움직이나, 대 그림자가 아무리 뜰을 쓸어도 뜰에는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않더라(竹影掃庭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라는 게송으로 <금강경>을 설명했어요. 삼라만상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도 하나도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 또는 공사상이며, 부처님의 진리이자 중도에요.
이런 사상은 남방불교에서는 못 찾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경을 보더라도 새벽에 한 시간은 꼭 참선해야 합니다.
요즘 남방 위빠사나가 많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능엄경> <원각경>에 비발사나(毘鉢奢那)·선나(禪那)·삼마발제(三味鉢提) 등 소승선이 있어요.
위빠사나는 북방불교의 한 부분이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뭉뚝한 송곳은 오래 오래 걸려도 한 번 뚫으면 구멍이 크고, 예리한 송곳으로 뚫으면 쉽게 뚫리지만 구멍이 작아요. 위빠사나를 비판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우리는 달마선 정통을 이어받은 조계종이기에 간화선을 더욱 펴고 확장하고 더 쉽게 대중화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이평래(충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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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 스님] 내가 만일 그때 그 질문을 받았다면 덕산 스님의 방이 아니라 강한 어조로 면박을 주어 망신을 시켰을 것입니다.
삼심불가득인데, 과거심 미래심 다 찾을 수 없는데, 그게 마음으로 안되기 때문에 덕산도 몽둥이 쓴 거예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기에 그래서 덕산방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나도 면박만으로, 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질문2] 종교라는 것은 사회학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고 향기롭고 살기좋게 만드는 사회학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도 종교학 종교사회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혁명과 수행의 두 방법이 있습니다. 잘 살려면 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합니다. <금강경> 속에서 혁명·수행 요소를 담을 수 있는 정신을 어떻게 뽑아낼 수 있을까요?
[지관 스님] <금강경> 전체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겁니다. 질문자 말씀에 혁명과 수행이 있는데, 혁명은 실천적이고 어떤 형태의 고통을 동반해요. 고름이 차면 짜야 되는 것처럼. 그러나 정신이 수반되지 않는 외형적인 혁명은 구태를 제거하는 것 뿐이지 ‘환자’가 죽는 것은 생각도 안하는 경우가 있어요. 수행과 교화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부처님은 자비의 바탕에서 병도 고치고 잘 살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비, 의심, 분노를 다 표현하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처럼 관세음보살은 자비와 함께 절복을 갖고 있어요. 이게 불교의 파사현정이에요. 정의를 나타내자면 자비만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 속에 강한 힘이 들어있다 이겁니다.
교화는 어떻게 해서든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포악한 이에게는 부드럽게,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하게, 성질이 급한 사람은 느긋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교화입니다.
불교는 자비를 바탕으로 모든 옳지 않은 것을 바르게 교화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