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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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듣는법문- “오늘을 이세상 마지막 날처럼”(2001.3.07)
[가까이서 뵌 큰스님]지옹스님(화엄사 선덕)
◇청정계행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수행에 임하는 기본 자세라고 강조하시는 지옹 스님

화엄사(華嚴寺)를 품고 있는 지리산 자락에는 2월인데도 벌써 이름모를 풀들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봄냄새를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서니, 며칠 전 폭설이 내린 서울과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곳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햇살이 따사로웠다. 화엄사 선덕 지옹 스님이 주석하시는 만월당은 일주문 왼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당에 따뜻한 봄기운을 쐬러 나온 스님은 우리 일행을 보자 반갑게 맞으며 방으로 안내했다. 아침부터 기다렸다며 함박 미소를 머금는 스님의 얼굴에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한 느낌을 받는다.

삼배를 드리고 자리에 앉으니 스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늙은이를 보려고 먼길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절에서 하룻밤 자면서 예불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가세요”라며 원주스님께 전화를 걸어 객방을 하나 내주도록 일러주셨다.

그리고 말문을 여셨다. “승풍진작을 통한 청정한 승가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청정계행을 지키며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합니다. 평범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정말 지키기 어려운 말입니다. 나는 출가한 지 55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 예불 때 이 말을 지키려고 마음 속에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요.”이 말을 하면서 요즘은 승가에서조차 청정 계행을 지키는 스님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은 것 같아 안타깝다며 스님은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스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는 출가할 때 부모형제와의 인연을 철저히 끊고, 양식이 없으면 탁발 해서 먹을 정도로 청빈하게 수행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속가나 승가나 먹을 것, 입을 것 등이 넘쳐나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행자는 언제든지 걸망 하나 지고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스님은 잠시 후 벽장 속에서 낡은 걸망 하나를 꺼내 보였다. 세월의 무게를 단번에 짐작하게 해 주는 걸망 속에는 평생동안 전국의 선방을 떠돌며 철저하게 수행한 공력으로 꽉 채워진 듯했다. 실제로 스님은 19살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출가해 여태까지 주지 소임 한번 맡지 않고 통도사, 해인사, 화엄사, 대둔사, 봉암사 등 전국의 수많은 사찰을 돌며 수행에만 전념해 왔다.

하지만 스님은 아직도 수행이 모자란다며 몸성히 걸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전국의 도량을 돌며 선방 수좌들과 함께 참선 수행에 매진하는 게 남은 소망이라고 말씀하신다. “권속과 문중 의식이 너무 지나쳐 다른 사찰 출신의 스님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요. 그래서 주지 소임을 맡지 않거나 자신의 사찰을 갖고 있지 않은 스님들은 나처럼 노후에 편안히 머물면서 수행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이게 한국불교의 현실이지요. 그래서 수행에만 전념 하고 싶어도 노후를 생각해 할 수 없이 소임을 맡게 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상좌들을 다시 그 자리에 앉히는 대물림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편협된 문중 의식이 타파되지 않는 수행자들이 본연의 임무인 수행에만 전념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앞날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지요.”스님에게도 10여명의 상좌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연락되는 상좌 스님은 한 명도 없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상좌들도 사찰의 소임을 맡기보다는 스님처럼 전국에 흩어져 선방을 찾아 수행 중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스님의 지나온 행장을 듣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2개월 동안 곁에서 지옹 스님을 지켜봤다는 화엄사의 한 행자는 “지옹 스님 방을 지나가다 보면 문을 열어놓고 참선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또 스님은 70세가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 청소와 빨래를 손수 하십니다. 법랍이 이 정도 됐으면 상좌들의 시봉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보며 수행자란 무릇 죽기 전까지 평생동안 정진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1970년부터 1983년까지 13년동안 해남 대둔사 북암 옆에 토굴을 짓고 혹독한 수행을 했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혼자 지내면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타성에 젖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잠의 유혹에 빠지기도 쉽고 예불도 일정한 시간에 모시기 어려운 등 수행하는 데 장애가 많이 따르게 되지요. 그래서 대중 생활과 똑같이 죽비를 치고 입선과 방선을 하는 등 철저하게 수행을 했지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자신이 성불을 위해 용맹정진을 하겠다고 굳게 마음 먹으면 그곳이 선방이든 토굴이든 전혀 문제될 게 없어요.”그때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경험했다며 스님은 그 당시의 일을 다시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한 번은 깊은 잠을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놀라서 잠을 깬 적이 있었습니다. 가위에 눌린 것 같기도 하고 꿈을 잘못 꾼 것 같기도 했지요 아무튼 느낌이 좋질 않았어요. 그런 일이 잦아지더니 급기야는 고열에다 복통까지 앓아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며칠이 지났는데 만행 중이던 한 스님이 우연히 내 토굴을 발견하고 쉬었다 갈 생각으로 들어와서 누워있는 나를 보고는 정성껏 며칠 동안 간호해 줘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차도가 보이니 다시 걸망을 지고 떠나더군요. 그때 도반의 진한 정과 함께 혼자서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혼자 토굴을 지어놓고 수행할 때도 수행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스님은 조석 예불 드리는 것을 공양하는 것처럼 결코 빼놓지 않았다. 철저히 몸에 밴 탓이지 지금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대웅전 법당으로 나와 예불을 모시고 공양 전까지 참선을 한다. 예불 거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요즘 풍토에서 스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이튿날 아침 스님은 6시 아침 공양 후 1시간동안 경내를 산책한 뒤 방 뒷산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에 올라가 40분 가량 기도를 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주장자를 들고 비탈진 계단을 올라가는 스님의 발걸음에는 아직도 힘이 느껴졌다. 참선하다 졸음이 오면 이 효대(孝臺)의 언덕에 올라와 연기조사의 효심이 각인돼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에서 매일 정근 기도를 한다. 예전에 스님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참선을 했는데 요즘은 체력이 떨어져 피곤할 땐 약간 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고 깨어나면 다시 화두 삼매에 든다. 이제는 몸의 근기에 따라 수행 시간이 불규칙해졌다고 하신다. 스님이 평생동안 이렇게 홀로 수행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자 시절을 엄격하게 보낸 탓이라고 일러 주신다.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한 사람의 수행자가 철저하게 수행 가풍을 익혀 참다운 수행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행자 때의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도 행자 때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은사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홀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규율이 엄격해 술을 한잔 먹고 절에 들어오면 바로 옷을 벗겨 일주문 밖으로 내쫓았지요. 또 수좌들은 여자들이 음식을 만들었다면 입에도 안되고 내버릴 정도로 청정한 계행을 지키는 데 철저했습니다.”그래서 스님은 행자들을 보면 힘들더라도 행자 때부터 철저하게 계행을 지키고 은사 스님들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라고 당부한다.

스님의 철저한 구도 정신은 외국에까지 입소문을 통해 전해졌다. 97년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오르스트가 스님을 미국으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 오르스트는 오로지 선불교만이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는 생각에서 미국에 사찰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스님을 절로 초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수행만으로 일관해온 스님이기에 소임을 맡는 일에는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평생 사찰 운영하는 일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조건이 좋다고 그 일을 수락한다면 탐심이 생겨 안되지요.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한테 그 일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냥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는 공간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어요.” 지옹 스님은 불자들에게 항상 용서하며 살기를 강조한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잘못을 합니다. 행동으로 잘못한 이도 있고, 말로 구업을 지어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부지불식간에 잘못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면 쉽게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그것을 되갚는다면 그만큼 이승에서의 업(業)이 쌓여 내세에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그러기보다는 이승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아 업을 제거해 나가는 선행을 쌓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겠지요. 하지만 우리 중생들은 어떻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서로 상처를 주고 자신이 한 행동만 생각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항상 다툴 일이 생기면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럴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쉽게 타인의 행동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늘 변화하는 마음을 살피며 날마다 새롭게 되돌아볼 줄 아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 자세라는 스님은, 일생을 통해 수행을 다 못 마치면 내생에도 수행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생으로 업을 갖고 태어나 어차피 주어진 죄업을 소멸해야 하는데, 수도하는 것 자체가 직업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수행자로 태어난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불자들도 자신이 불제자가 된 것을 긍지로 알고 수행에 매진하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되돌이켜 보면 실로 순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을 죄업 짓는 일에 낭비하지 말고 오늘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정진하길 바랍니다.” 승속을 초월하고 청정 계행을 지키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라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불제자가 될 때 드린 약속이니 만큼 철저히 지키는 참불자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스님은 간곡히 당부한다. 글=김주일 기자
(jikim@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지옹스님은

평생을 선방수좌로
청정한 선사의 풍모

스님에게서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청정한 선사의 풍모가 확연히 느껴진다. 주지 소임 한 번 맡지 않고 평생 동안을 선방 수좌로 보낸 수행 이력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겉모습만으로도 단번에 비범한 수행자임을 그냥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스님은 출가 이후 평생동안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두해 온 선승이다.

화엄사 만월당에 주석하고 계시는 스님은 고희를 넘긴 노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상좌의 도움없이 손수 자신의 옷가지를 빨면서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스님은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참선하지 않는다. 한 평 남짓한 선방에서 잠을 자다가 깨면 화두를 들고 참선하며 또 졸리면 뒷산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에 올라가 기도를 한다. 스님에게는 삶과 수행이 하나다.

평소 스님은 불제자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초발심을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청정 계행을 지켜 용맹스럽게 수행에 매진하는 것만이 작금의 현실에서 혼탁해진 한국불교를 맑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지옹 스님은 1925년 경북 울진에서 나서 44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철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 47년 상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사, 통도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으며, 70년∼83년 대둔사 북암 토굴서 용맹 정진을 했다. 98년 운암사 조실을 역임했다.



김주일 기자 |
2006-08-29 오후 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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