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天龍) 스님을 찾은 날도 그랬다. 피서를 떠나는, 피서지에서 돌아오는 인파를 헤집고 속리산 법주사 총지선원을 찾았다. 하안거가 끝난 총지선원은 적도에 있는 이름 모를 조그마한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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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 스님 주석처에 들자 먼저 양쪽 벽에 가득 들어찬 책이 우리를 맞았다.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차 마치 책의 동굴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스님께 삼배를 하고 힐끗 쳐다보니 각종 불서는 물론이고 인문ㆍ사회과학서 등 종류도 다양했다. 책 얘기로 말을 꺼냈다.
“스님, 책이 상당히 많습니다.”
“많기는. 다른 스님들에 비해 많아 보이는 거겠지. 우리 불가에는 큰 병통이 있어.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방편일 뿐이야. 문자에 얽매여도 안 되지만 초석이 없으면 뛰어넘을 수 없어. 안목을 키우려면 책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스님의 독서열은 유명하다. 동국대 선학과 교수 현각 스님은 천룡 스님을 ‘책 보는 기계’라고 칭할 정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침 일찍 기침해 몸을 정제하고 정진과 간경을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법정대를 졸업했다. 방송국 등에서 근무하다 늦깎이 출가를 했다. 늦은 만큼 대분심(大憤心)이 일어나 공부에만 열중해서일까. 출가 당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자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칠뿐이었다.
스님은 선시집(禪詩集) <이것이 마음이다>와 <간화선의 고향>을 펴내기도 했다. 책들은 서문(序文)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바닷가에서 빛이 된 조약돌을 줍듯 심산(深山)에서 약이 된 풀을 뜯듯 산사(山寺) 생활 중에 문득 문득 떠오른 생각을 기록해 모은 것”이다.
이 책에 대해 경상대 정치외교학과 서양중 교수는 “스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밥 꼭꼭 씹어 먹고, 부지런히 일하고, 피곤하면 푹 자라. 그러면 정신과 육체는 저절로 건강해 진다는 것이다. 스님의 제문(祭文)은 간단명료하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기 때문이다”라고 서평을 썼다.
스님의 일과는 여느 스님과 특별히 다를 바 없다. 오전 3시에 일어나서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든다. 그 사이 시간은 자유롭다. 책도 보고 시상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꽉 짜인 틀은 없다.
하지만 스님이 매일 거르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산행이다. 하루 한 시간 정도 ‘혼자’ 걷는다.
“사람들이 혼자 산에 가면 심심하지 않느냐고 질문해. 천만의 이야기지. 나는 나무하고도 이야기하고 돌멩이하고도 이야기해. 현대인들은 고독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지. 고독도 극한에 가면 대 자비 대 사랑이 돼.”
사람이 고도에 혼자 떨어지면 처음에는 외로움에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개미나 뱀, 돌과 나무하고 이야기한다. 고독의 극한에는 공(空)이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자아가 발동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고독도 극한으로 가면 자아가 없어진다.
산행 외 스님의 건강비결은 무엇일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즐겁게 사는 것뿐이야. 여기서 즐거움이란 나와 연결된 모든 환경을 잘 소화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야. 세상에 나 혼자란 없어.”
소식(小食) 또한 스님의 건강비결이다.
스님은 아침과 저녁 공양은 미숫가루 조금과 빵 한 조각으로 해결한다. 점심만 밥을 먹는다. 스님은 젊은 시절 정진 도중 너무 무리를 해 몸에 이상이 생겼다. 치료를 위해 단식을 50여 차례 했다. 단식을 풀면서 미숫가루를 복용했는데 그것이 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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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다시 천룡 스님을 뵈러 총지선원을 올랐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천룡 스님께서 한 말이 떠올랐다.
“더위? 자연 현상일 뿐이야. 그것에 끌려 다닐 필요는 없어요. 즐기면서 넘겨야 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즐겁습니다. 당연한 것을 거부하거나 도피하려고 하니까 짜증이 나는 거야.”
천룡 스님은
1935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한 천룡 스님은 63년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초심 납자 때 오대산에서 종두 소임을 맡은 적이 있다. 종을 치는데 장삼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져 털어보니 뱀이 나왔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지리산 벽송사에서 정진할 때였다. 방안에서 혼자 장군죽비를 들고 있는데 1미터 정도 되는 뱀이 들어왔다. 놀라서 장군죽비를 내던졌다. 또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이번엔 태백산 각화사였는데 또 뱀이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삼매에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뱀이 칼날같이 납작하게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뱀은 다시 둥글게 모습을 변화시키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스님은 이것을 자신의 근기를 점검해 본 것이라고 여겼다. 동화사 금당, 비슬산 도성암에서 ‘선 체험’을 한 스님은 향곡 경봉 서옹 월산 선사를 도와 대중을 지도하기도 했다. 다음은 스님이 선 체험을 했을 때 읊었던 게송이다.
“고요고요 / 마음 길 다한 곳에는 / 너도, 나도, 산하(山河)도, 세계(世界)도 없다 / 다만 노을 빛 가득 메운 공허(空虛) / 어디선가 아련히 소리가 들린다 / 문득 눈 들어 바라보니 / 이랴 이랴 / 농부가 축대 밑에서 밭을 갈고 있다”
글=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천룡 스님의 가르침
인생 자체가 절실한 수행이어야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양측에서 종교에서 벗어나든지 모두 죽든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민족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알라라는 민족신을 믿고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민족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에 대한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어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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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너와 나의 관계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인드라망의 그물 속에서 연기적인 관계성을 맺고 살고 있습니다. 연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에서 이분법적인 사고로 산다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더구나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의 노예가 돼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인연따라 생겨났다 사라질 뿐인데 잘못된 종교관이 고정된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은 대화와 협상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대화나 협상 이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순수한 마음을 잃고 삼독(三毒)으로 자아를 구축했기 때문에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대화나 협상을 하다 잘못 삐끗하면 바로 무효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문제를 표피적으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려 하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더 한 차원 높은 상황에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손해 본다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입장만 고집한다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메아리는 소리로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메아리가 오는데 소리로 그치려 하면 메아리는 자꾸 커질 뿐입니다. 성색(聲色)의 본질은 공(空)입니다. 연기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양보하면 지금은 조금 손해 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은 인간의 마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공(空)하고 자연도 공(空)해, 이 공(空)을 찾는 것이 불교의 마음입니다. 중생사회에서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마음인데 그것은 망심(妄心)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잃고 삽니다. 그래서 매우 바쁩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지만 달릴수록 더 바빠질 뿐입니다. 우리는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허상을 보고 달리는 것뿐입니다. 허상을 보기 때문에 세계가 요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중심의 논리로 환경을 훼손하고 자연을 파괴합니다. 그러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문화와 과학을 구실로 핑계만 댑니다. 자연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 중심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인재(人災)가 축적되면 천재(天災)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가 극한까지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라는 엄청난 재난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불교는 연기의 철학입니다. 우주 또한 인드라망입니다. 너는 너로 인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있는 것이고, 나 또한 나로 인해 있는 것이 아니라 너로 인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개개의 사물, 즉 나무나 돌 등을 무정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우주에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모두가 하늘이요 부처요 보살입니다. 자연을 파괴한다든가 오염시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해치는 일입니다.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기 때문에 고통이 지속되면 언젠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불교인들이 더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릅니다. 미혹(迷惑)도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참고 견디기 때문에 수행이고 고행이라고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자체가 수행입니다.
모든 것에는 길이 있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모든 것을 긍정해야 하고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절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절실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에 대한 절실성을 말합니다.
집은 초석(礎石)위에 지어야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격은 진실 위에 세워야 합니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점점 진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는 진실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때그때 방편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방편은 지혜와 맞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편이 지나치면 근본을 잃어버립니다. 마치 나뭇가지는 많지만 뿌리가 적으면 넘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대립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행을 많이 따릅니다. 유행을 따르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유행 이전에 껍데기로 나 자신을 보일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보일 힘이 있어야 합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이 필연이지만 무명(無明)에는 기약이 없습니다.
정리=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