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바쁜 일상에 시달리던 8월 1일, 전북 장수 극락사를 찾았다. 서울에서 세 시간 가량 달려서 도착한 극락사는 허름한 시골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곧 쓰러질 듯 서 있는 요사채 앞마당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가꿔져 있고, 그곳에서 울력을 하던 정공 스님이 고개를 들어 기자를 맞는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부터 하고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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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줄기 땀이 얼굴을 타고 내리는 기자와 달리 법당 앞 커다란 토란잎은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싱싱한 모습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 밑에는 잠자리 한 마리가 더위를 피해 앉아 있었다.
먼지 묻은 법복을 툭툭 털고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은 정공 스님께 “불사하신지 꽤 오래된 것 같다”고 여쭈었다.
“부처님은 의왕(醫王)이에요. 의사가 병원이 크고 화려하다고 치료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부처님도 그곳이 낡고 누추한 곳이라 할지라도 아프고 힘든 중생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와 병을 고쳐 주십니다.”
마침 정공 스님을 모시는 시자스님 한 분이 음료수를 건넸다. 잠시 목을 축이고 날씨 얘기를 꺼냈다.
“이곳에도 지난 태풍 때 비가 많이 왔나요?”
“여름엔 비가 많이 오고 덥지요. 이 우주 법계 돌아가는 이치에요.”
“덥진 않으세요?”
“더울 겨를이 있나요?”
시자스님에 따르면 정공 스님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한다. 새벽에 눈 뜰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종일 울력을 하신다는 것이다. 스님과의 대화 역시 울력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스님을 따라 요사채 마루에서 텃밭으로, 텃밭에서 뒤란으로, 뒤란에서 법당 앞 화단으로 이어졌다. 요사채 앞마당에 놓인 평상을 살피던 스님은 한쪽이 기울어진 걸 발견하곤 기자를 재촉해 기어이 읍내까지 평상을 고치러 다녀와서야 대화를 이어갔다.
조용히 텃밭을 손질하던 스님은 잘 여문 오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바로 빛을 먹는 것이에요. 빛 속에는 우주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어요. 빛을 먹고 자란 과일과 야채를 먹음으로써 우리가 밝아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곤 스님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맺는 인연(因緣)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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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연을 맺고 사는 모든 것은 실상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입니다. 나와 인연을 맺는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스스로 내면의 진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가 부처라는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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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세수 87세인 정공 스님은 매일같이 울력을 하느라 회색 법복엔 흙이 묻고 법복 바지를 동여맨 끈이 낡아도 “신도들의 시줏돈 귀한 줄 알아야 한다”며 새 법복 사는 것을 만류한다. 낡은 법복의 모습이 극락사의 조촐한 법당과 더 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요즘 사람들은 법과 진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의지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돈이 욕심만큼 안 벌리니까 불안해하지요. 진실한 믿음만 있다면 돈은 중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정공 스님은 극락사를 찾는 신도들에게 ‘옴마니반메훔’ 수행을 권한다. 염불삼매를 경험하고 화두를 참구했던 수행이력에 비춰보면 그 까닭을 짐작하기 쉽지 않다.
“늘 옴마니반메훔 육자 진언을 외면 우리 몸에 중음신(中陰神)이 붙을 구석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염불이건 참선이건 수행을 해 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어집니다. 또한 옴마니반메훔은 우리의 실상과 근원을 일깨워 주는 진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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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사 곳곳에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비석도 세웠다. 요사채와 법당 사이는 스무 발자국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길이지만 그곳을 오가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진언을 외라는 뜻에서다. 잠시 잠깐도 몸을 쉬지 않고 수행의 끈을 놓지 않는 스님의 모습에서 한철 더위는 한낱 내 몸을 쉬게 하려는 핑계일 뿐임을 느끼게 된다.
정공스님은?
1920년 11월 19일 경북 성주군 용암면 구룡리에서 태어난 정공 스님 7세 때부터 ‘나무아미타불’을 염해 18세에 염불삼매를 경험했다. 성인이 된 후 선지식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스님은 29세에 해인사에서 근세의 선지식인 전강 선사(田岡永信, 1898~1974)를 만나 본격적인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곡성 태안사에서 비구계를 받았으며 전강 선사에게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받고 정진했으며, 전강 선사에게 ‘정공은 오후사(悟後事)를 마쳤다’는 인가를 받기도 했다. 전강 선사 열반 후인 1975년 무주 원통사를 복원하고 장수 극락사를 창건했으며, 30여 년간 극락사에 주석하고 있다.
정공 스님의 가르침
지금부터 할 얘기는 용화세계의 주인공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아미타부처 명호를 외면서 자랐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고 지상을 극락으로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설령 아미타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참 눈을 뜨지 못하고 아미타부처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하는 일을 몸이 알지 못하고, 몸이 하는 일을 영혼이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은 빛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내 안의 불성이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나의 불성과 부처님의 불성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치 잣나무의 씨앗이 잣나무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라는 제한된 공간 때문에 그 불성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지구에 머물고 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짓고 그곳에 몸을 의지하듯, 영혼이 육체를 선택해서 깃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법당에만 계신 줄 압니다. 말로는 ‘시방세계 어디에나 부처님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밟고 다니는 이 땅, 저기 있는 바위 모두가 부처인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한 발 떼면 미타국토요, 한 발 떼면 아미타국토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보살님 부처님을 찾으니 면사포를 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나투는 것이지, 실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부처님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처님 따로, 하나님 따로, 지구 따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을 보존하지 못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앎과 삶이 분리되었을까요? 바로 분별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 자체도 의식의 집합체요, 부처님의 또 다른 모습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지구 역시 깨달음을 향해 진화해 나가는 존재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지구는 동반자고 한 몸입니다. 내가 밟는 이 땅 역시 부처의 얼굴이고 내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를 생각하기를 내 몸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자연재앙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불성만 소중한 줄 알고 자연의 불성은 무시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도(道)라는 것은 현실의 삶 속에서 진화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삶 밖에 따로 있는 줄 압니다. 도인이 따로 있고 수행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나 개신교나 천주교나 종교의 가르침은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불교는 틀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인데, 깨달음에 어떻게 틀이 있겠습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의식의 확장을 말합니다. 유정 무정에 모두 불성이 있습니다. 흙도 불도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에 연결되어 있는 불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의 몸에는 부정적인 사념(思念)이 가득합니다. 법과 진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욕심만큼 안 벌리니까 불안해하는 것이지요. 진실한 믿음만 있으면 돈은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다 불성이라는 등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켜지 않으니 암흑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켜기 위해 옴마니반메훔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일부에서는 간화선이 아니면 사도(邪道)니 외도(外道)니 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의 수행법만 최고이고 수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우주의 모자이크 한 조각일 뿐입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부처가 된다는 것은 곧 내가 부처임을 기억해내고 인식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휴대폰 통화 하려고 해도 주파수가 잘 맞게 하려고 자리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면서 애쓰잖아요? 그런데 왜 공부는 그렇게 애써 하지 않습니까? 책도 안 읽고 공부도 하지 않는데 거저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두 도통(道通)입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지와 어둠으로 싸여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임을 모르는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물질만을 좇기에 날이 갈수록 각박해집니다. 이 몸뚱이가 ‘완전한 나’ 인줄 압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닌 몸을 위해 물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몸에 좋은 것을 좇습니다. 이 몸은 지구라는 무대에 연극을 하기 위해서 쓴 탈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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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내 마음이 창조자라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이뤄집니다. 내가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안 된다는 관념, 어쩔 수 없다는 관념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답이 있습니다. 내 영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모든 답을 다 가지고 있지요. 다만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다면 왜 삶에 희망이 없겠습니까? 나 자신이 부처임을 인식하고 믿는다면 희망은 절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도를 구하는 자는 진정 자신의 불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용화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