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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나 해외나 패션쇼 무대에서 인사를 할 때면 꼭 합장인사를 합니다. 제 나름의 감사와 기원을 합장에 담는거죠. 이제는 합장인사가 제 트레이드 마크가 됐어요.
패션 퍼포먼스
1980년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을 졸업한 이상봉씨가 1985년 첫 매장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매장에서 쇼복을 판매하지 않았던 불문율을 과감하게 깼다. 컬렉션 의장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매장에 선보였던 그는 많은 마니아층을 갖게됐다.
국내에서 패션 퍼포먼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도 이상봉씨다. 1996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국제미술의상전에 참가한 이래 1996년 죽산 국제예술제, 1997년 예술의전당 10주년 기념 패션 퍼포먼스 등을 통해 그의 패션은 조형예술과 만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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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가 의상을 가지고 일반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 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도였다. 지난 6월 서울 평창동 갤러리 세줄에서 ‘한글,달빛 위를 걷다-이상봉과 친구들’이라는 주제로 한글 프린트 의상 20여 점을 전시했다. 관람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판매용 한글 프린트 티셔츠는 금새 동이 났다.
“제가 올해로 이상봉 브랜드를 런칭한지 26년이 됐는데 30주년이 되는 해에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어요. 그러다가 지난 2월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 컬렉션 무대에서 소개했던 의상들이 패션쇼에서 한 번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까워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회를 했죠.”
한글
이상봉씨는 올초 2월 파리컬렉션에서 한글 프린트 의상을 제작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소리꾼 장사익씨와 화가 임옥상씨의 글씨체는 붓필로 티셔츠에 넥타이에 재킷에 원피스에 찍혀 파리 패션계를 매료시켰다.
왜 한글에 주목했을까.
“장사익씨나 임옥상씨는 항상 친필로 엽서나 편지를 보내옵니다. 인쇄물들이 판을 치는 요즘 친필글을 받으니까 너무 소중하더군요. 거기에 프랑스 친구가 한글이 너무 독창적이고 아름답다고 한불 120주년 행사에 활용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는 것을 듣고 힌트를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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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씨는 한국문화를 알릴 방법이 없을까 항상 고민한다. 그가 고민끝에 빚어낸 한글 작품을 본 외국인들은 한국에도 문자가 있냐며 놀라워 했다. 한자가 아시아의 문자라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한글 프린트 의상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사용하니까 한글에 대한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해요. 저도 작업을 하면서 한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달라졌습니다. 제 로고도 영문으로 ''Lie sang bong''만 사용했는데 반성을 많이 했죠. 올해 수출품에서부터 한글 겸용 로고를 사용합니다. 라벨에 영문 로고보다 두 배 더 큰 한글 로고가 들어가는거죠.”
인연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수시로 다니던 대림동의 사찰,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갔던 삼각산 도선사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절밥을 유난히 좋아하던 이상봉씨는 스님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 스님께 염불도 배우고 여러 스님들도 많이 만났다. 대대로 불자집안에서 컸던 그는 당연히 스님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절은 그에게 꿈을 키우던 곳이었고, 놀이터였으며, 배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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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디자이너의 길을 가면서 항상 빡빡 민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한 때 승복을 패션삼아 입기도 했다. 그만큼 끌렸다. 바랑을 메고 승복을 입고 거리를 다녔다. 스님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술 담배를 하던 때였다. 사람들의 오해가 부처님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스님들께도 누가 될 것 같았다. 승복을 벗었다. 조계사 인근에서 20여년 전에 샀던 그 승복은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이제 담배도 끊었으니까 앞으로 언젠가는 다시 승복을 입고 싶어요. 아마 외국 나갈 때 다시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꼭 다시 입고 싶습니다.”
절에 가면 이상봉씨는 항상 부처님과 마주 앉는다. 부처님께 기도하고 마음의 번뇌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의 이런 모습들을 보며 결혼 전 불자가 아니었던 부인이 결혼 후 차츰 변해갔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부처님 태몽을 꿀 정도로 불교에 빠져들어갔다. 지금은 강남 봉은사를 꾸준히 다니며 신행생활에 열심이다. 부처님오신날에는 부부가 같이 삼사순례를 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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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씨는 중국이나 몽골 등에 비해 티베트 불교가 그 순수성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티베트는 그에게 정신적인 고향이다.
“내가 불경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느끼고 이해하고 깨우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圓)
이상봉씨의 의상은 ‘원(圓)’이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내 의상에서는 ‘원’이 빠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 원은 윤회에요. 시작과 끝이 계속 빙글빙글 도는 윤회.”
모든 생명은 ‘윤회’의 옷을 입는다. 그 옷을 훌훌 벗는 ‘해탈’이 모든 존재의 꿈이듯 이상봉씨의 작업도 해탈을 꿈꾼다.
이상봉씨는 ‘정체’되는 것이 싫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고 찾아내고 관심을 가지고 변화한다.
자신의 디자인을 “진화하고 자신을 깨뜨려 가는 작업”이라고 정의내리는 이상봉씨는 “스스로 정체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두렵다”는 말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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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세 번이나 불이 났던 그의 집, 그리고 1985년 처음으로 만들었던 명함 디자인. “나를 잊지 말자는 저 나름의 고집입니다. 처음 내 브랜드를 만들었던 시절의 흥분, 작은 것에 대한 행복, 꿈 등 초발심을 잊고 싶지 않아서 간직하는거죠.”
어떤 그릇에 날 담을 것인가. 난 물이기에 담아내는 그릇에 따라 여러 모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다.
이상봉씨는 오래된 것, 오래된 문화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들과 만나기 위해 그가 자주 찾는 곳은 벼룩시장.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 나라의 문화를 공부하는 것은 그에게 행복이고 영감의 원천이다.
“제가 불자니까 디자인을 하면서 각 기획을 하면서 그 정신적인 측면은 불교가 영향을 미친다”는 이상봉씨. 그의 첫 번째 개인 패션쇼의 주제 역시 ‘윤회’ 였다. 탄생과 죽음을 그는 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회를 보여주며 패션쇼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이끌었다.
올해도 그의 일정은 빡빡하다. 8월 말과 9월 초에 파리, 9월 중순에 미국에서 패션쇼가 열린다. 프랑스 디자이너 40명과 함께 한글 쇼도 준비중이다. 10월 2일에는 파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한국의 패션을 해외에 보급하고 우리 문화를 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우리 디자인을 물려주고 싶어서 오늘도 뛴다”는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