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해제를 열흘 앞두고 이 곳 학림사의 정진 열기는 한여름의 더위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방자들의 공부자리를 점검하며 경책하는 조실 대원 스님이 자리하고 있는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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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스님은 학림사 오등선원과 오등시민선원에서 결제중인 60여 대중에게 해제가 다가오면서 흐트러지기 쉬운 수행의 고삐를 바짝 당긴다. 점검, 오등선원과 오등시민선원의 대중은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다. 결제에 들 때와 결제가 중간쯤 지났을 때, 또 해제를 앞두고 대원 스님은 대중을 모아 한철 농사를 어떻게 지어가고 있는지 점검한다. 스님의 경책은 손톱만큼의 인정도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밤 11시에야 불이 꺼진 대원 스님의 방은 새벽 2시가 되기도 전 불이 켜진다. 세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않은 대원 스님은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었다가 3시가 되어서야 선방에 오른다. 모름지기 어른은 대중보다 부지런해야 하지만 대중의 때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단다.
예불이 끝나면 대원 스님은 곧바로 상단에 올라 주장자를 내려친다. “어제는 무엇을 얻었는가. 오늘은 무엇을 버릴 것인가….” 한시간여의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날 때에 어미닭이 알을 쪼아 돕는 것) 법문은 결제기간중 단 하루도 빠짐이 없다. 오등시민선원으로 자리를 옮겨 법좌에 오른 스님은 역시 법문으로 정진을 채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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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스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출·재가를 막론하고 선객을 만나는데 할애한다. 후학들의 눈을 열어주는 선지식이 많지 않은 요즘 바른 공부로 이끌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제철엔 덜 하지만 해제 때에는 찾아오는 선객들이 많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스님은 수좌는 많은데 바른 농사를 짓는 수좌가 많지 않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선객들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통하는 선객이 있는가 하면 몇시간을 얘기해도 통하지 않는 이도 있다. 그 중에서도 스승 없이 공부를 한 선객을 만날 때 가장 안타깝다. 아무리 얘기해도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 있어 할(喝)이나 방(棒)으로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소식 했다며 찾아오는 선객들도 더러 있는데, 법거량을 해보면 마름질을 못해 마음병통을 안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원 스님은 선객이라고 해서 모두 만나지 않는다. 만나는 이가 있고, 만나지 않는 이가 있다. 만나는 선객들은 문답을 주고받아 바른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고, 만나지 않는 선객들에게는 상대하지 않는 것이 곧 가르침이다. 귀가 뚫려 있지 않은 선객에게는 상대하지 않는 것이 곧 상대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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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스님은 해제에 앞서 수좌들에게 만행에 대한 애정어린 당부를 한다.
“만행도 수행의 한 방편입니다만, 섣불리 만행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걸망 메고 산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참선공부로 이치를 깨달은 다음 행으로써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공부가 만행이기 때문입니다. 경계가 없고 대중 속에서도 융합하여 흔들림이 없이 여여할 때 만행에 나서기 바랍니다.”
학림사 도량에 딸린 600평 규모의 텃밭을 일구거나 울력도 대원 스님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다. 수행자에게 대중과 함께 조화와 화합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원 스님은 산중생활을 할 수 없는 재가불자들에게는 “껍데기 인생을 벗어버리고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살라”고 당부한다. 나의 존재를 바르게 아는 순간 삶의 참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참선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스님의 사자후가 귓가에 오래 남는다.
글=박봉영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대원 스님은
194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대원 스님은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고암 스님을 은사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했다. 20세에 동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한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도봉산 망월사, 문경 김룡사,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극락암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면서 효봉,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73년 당시 해인총림 방장 고암 스님의 “백수상두(柏樹上頭)에서 수방진일보(手放進一步)하야 시지종차(始只從此)로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라.”는 가르침에 홀연히 깨닫고 오도송을 지어바치고 전법게를 받았다.
“잣나무머리에서 손놓고 한걸음 나가라는 말을 듣고 확연히 의심뭉치 녹아 무너졌네. 밝은 달은 홀로 드러나고 맑은 바람 새로운데 늠름히 비로자나 이마 위에서 활보함이로다.”
대원 스님의 가르침
(주장자를 세 번 내려치시고 가만히 있은 후)
산승이 말없이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입으로 말하고 글자로 보여주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무엇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을 때 전해진 뜻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부처님께서 설법을 청하는 대중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공양을 드시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중은 부처님께서 그런 연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사리불존자만은 뜻을 알아차리고 “부처님께 진실로 귀의합니다”라며 절을 하였습니다. 오직 사리불존자만이 말 없는 법문의 뜻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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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도 소리 없는 법문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법문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문이 어느 곳에는 있고, 또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귀먹어리, 눈먼 소경입니다. 우리는 참 진리가 철철 넘치고 있음을 보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의 부모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인사를 안해도 쓰레기를 버려도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정이 무너져 이 사회가 무너졌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놀지 마라’ ‘좋은 일 해라’라고 말해도 자식은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는 귀먹어리입니다. 공자 같은 말을 해도 자식에게는 그저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푸른 허공과 같고 맑은 물처럼 의식이 깨끗하면 누가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그 속에서 ‘공부 해야겠구나’ ‘좋은 일 해야겠구나’하며 알아차립니다. 부모가 참선수행을 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49년 동안 전법의 길을 걸었습니다. 진리를 널리 펴기 위해 수많은 설법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첫걸음을 내딛을 때 이미 할 말을 다 했습니다. 뜻으로, 마음으로 다 했는데, 다만 중생이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설법을 한 것입니다.
(주장자를 들며)
제가 주장자를 들어 보입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 자리에 앉아 알아차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가정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지혜 속에 자신은 물론 가정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차리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손톱만큼이라도 숨기는 것이 있으면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오로지 깨끗하게 비어있는 마음이라야 합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온 국토가 청정해지고, 국토가 청정해지면 중생이 청정해집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가을바람이 부는 것과 같고, 추운 겨울에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요즘 정수기 없는 가정이 별로 없습니다. 왜 우리가 그냥 물을 먹지 못하고 정수기 물을 먹게 되었습니까? 먹을 것은 물론 땅이며, 공기까지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깨끗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정하지 못해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사는 땅을 더럽히고 물을 더럽힙니다.
그런데 환경오염만이 공해는 아닙니다. 의식의 공해는 더한 공해입니다. 결국 환경오염도 마음의 공해에서 생겨났습니다. 한 생각 마음을 맑히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이런 세상을 맑게 하기 위해서 마음이 청정해져야 합니다. 또 수행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집안에서 참선수행을 하면 가정이 바로 섭니다. 참선수행은 아버지를 엄숙하게 만들어주고 어머니를 자애롭게 만들어줍니다. 가정이 바로 서면 세상도 달라질 것입니다.
학림사에는 서양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불교를 배우러 오기도 합니다. 참선법을 가르쳐주어도 가부좌를 하지 못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다보니 가부좌가 될 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밤새 참선을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그들의 열정과 도전은 대단합니다. 불교공부해서 이 세상을 바로 잡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 절대로 하지 않고 거저먹으려고만 합니다.
내면의 세계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잘 사는 사람입니다. 불자들이 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합니까? 마음을 맑히기 위해서입니다. 참선을 하는 이유는 근본자리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면 산승의 말과 같이 매일매일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쥐어 보이며)
눈에 보이는 면만 보지 말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면까지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혜안을 열어주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나의 모양이 진짜 모양인가’ 이런 의문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답을 찾는 공부가 참선수행입니다.
참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본래 부처입니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니, 부처가 아닌 줄 알겠지요?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중생이 아니고 분명 부처입니다. 일체중생을 자비심으로 보살펴야할 부처입니다. 앞으로는 꼭 부처로 살아가십시오.
정리=박봉영 기자·사진=박재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