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 스님은 7월 23일 서울 화계사에서 법문을 했다. 감칠맛이 절로 나는 감로법문이 한 시간 반여를 이어지는 동안 신도들의 배꼽을 서너 번 뺐다. 법문이 끝날 무렵에는 박수를 많이 쳐야 엔도르핀이 생긴다며 신도들을 당신의 ‘박수부대’로 만들었다. 그것도 성에 안차는지 끝내 ‘우리의 소원은 성불’을 한곡 거창하게 뽑고서야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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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24일, 양산 통도사 축서암으로 스님을 찾아뵈었다. 첫 만남부터 까다로웠다. 기자가 삼배를 올리는데 절을 하는 손에 정성이 없다고 불호령이셨다. 그 순간만큼은 그냥 경상도 할배였다. 손끝에 힘을 주고 정성을 다하라며 시범까지 보이셨다. 그러나 이후 스님은 소탈하면서 천진한 모습을 내내 유지했다. 흔히 갖게 되는 편견, 예를 들면 예술가는 괴팍스럽다는 이미지를 전혀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스님은 수좌생활을 오래 하셨다.
수안 스님의 그림과 전각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경지는 절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스님의 상징이 된 ‘안(眼)’자 서명은 만년의 세월을 이은 상형문자와 전서의 결합이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감각이 숨어있다. 거침없는 먹선 하나, 글씨 한 획, 채색 한 번도 예사로 하지 않는 꼼꼼함을 발견할 때면 질려버릴 정도다. 국내외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킨 스님의 선서화는 오채먹(五彩墨)을 사용한다. 강렬한 원색은 아무나 쉽게 사용하기 힘든 까다로운 색. 그러나 스님은 선서화에 채색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선서화는 맑고 깨끗한 선의 맛(禪味)이 느껴져야 한다”는 수안 스님은 “오랜 세월 꽃과 나무 바위처럼 자연 속에서 보아온 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뿐”이라고 말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자연은 가장 훌륭한 내 그림 선생”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스님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젊은 시절 앓았던 병 때문이었다. 수안 스님은 열일곱에 출가했다. 코흘리개 시절 절과 인연을 맺었지만 출가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어느날 보니 자연스럽게 삭발염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만약 누가 스님에게 “출가하라”고 권했다면 바로 절에서 뛰쳐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전국의 선방을 돌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던 젊은 시절, 수행의 이력이 붙기 시작하자 내심 100일 정도만 바짝 용맹정진하면 성불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한겨울 아무도 살지 않는 산중토굴을 빌려 쌀 한말, 소금 한 되를 짊어지고 정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마(睡魔)는 참기 어려운 난관이었다. 수마를 쫓기 위해 매일 산위 계곡의 얼음위에서 맨발로 서서 고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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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 스님은 당시를 “멍청해서 길을 가도 죽는 길로만 갔다”고 회고했다. 예정된 100일이 가까워 오니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오장육부에 전해져 성불은커녕 하반신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만큼 몸을 해치고 말았다.
한번 망가진 몸은 선원 대중생활을 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하는 수 없이 산사를 찾아가 요양을 시작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음식을 조절하고 몸을 써서 수행하는, 신라 유가종의 수행법도 익혔다. 건강을 거의 회복한 지금도 매일 요가로 몸을 단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무렵 인생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됐다.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선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신세졌던 신도가 결혼 후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졌다.
첫 작품은 초가집과 소나무였다. 그림 한켠에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이랴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이라고 선종 고련의 선시도 그럴 듯하게 써넣었다. 그해 연말에는 강진 백련암에서 아는 지인들에게 활짝 웃고 있는 신라의 인면와(人面瓦)를 그려 연하장으로 보냈다. 뜻하지 않게 그린 연하장은 당시 많은 이들의 화제가 됐다.
1979년 이리역 폭파사건 피해자를 위한 성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품을 내면서 본격적인 선서화가로 세상에 이름을 냈다.
수안 스님은 요즘도 잡지, 신문, 전시회 등을 가리지 않고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을 그려준다. 이 세상이 내 전시관이고 내 그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없이 탁탁탁 털어버린다는 생각에서다. 수안 스님의 그림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문수동자상은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문수보살의 상호를 직접보고 형상화 한 것이란다.
실천과 지혜를 상징한다는 그림속 문수동자를 보면 볼수록 웃고 있는 수안 스님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수안 스님은
194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57년 석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64년 월하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고 통도사 송광사 백련사 묘관음사 등에서 수선안거. 1979년 이리 이재민 돕기 선묵전, 1985년 프랑스 파리 초대전, 1986년 중앙승가대 건립기금마련전 등 독일 러시아 모로코 대만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특히 불우어린이, 장애인 등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중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놓는데 주저함이 없다.
수안 스님의 가르침
오늘 하루 무얼 구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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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법은 법사가 법상에 올라오기전에도 있었고,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이 순간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법이라는 것을 가닥을 지어, 이렇게 하면 법이고 저렇게 하면 비법이라고 구분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부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에 중생이라 합니다.
문수보살이 갖고 있는 지팡이가 ‘여의봉(如意棒)’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봉이라는 겁니다. 무슨 대단한 물건인 듯싶지만, 사실은 여러분들도 집에 하나씩 다 갖고 있어요. 노인들이 쓰는 ‘효자손’ 말입니다. 이거 하나면 가려운 것을 긁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여의봉이나 효자손이나 그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니까 자꾸 부처님 가르침을 잊어버립니다. 우리생활 자체가 불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갑속에 들어있는 지폐를 보세요. ‘한국은행권’이라고 인쇄를 해놓은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돈의 주인이 한국은행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돈이 자기 주머니에 있다고해서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줄 압니다. 어떤 때는 부끄럽게도 한평생 수행을 해온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며칠 전에 한분이 휠체어 타고 제가 있는 축서암을 찾아와 “스님 학 천마리를 모으려 했는데 다 채우지도 못하고 그냥 가져왔습니다”라며 단지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얼핏 봐도 그분의 행색이 흔히 길에서 껌이나 뭐 그런 걸 파는 분 같아요. 그 단지안에 뭐가 들었나 하고 보니 오백원짜리가 들었어요. 그 오백원짜리에 새겨진 학 천마리를 제게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인연으로 하필 제게 이런 걸주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거지가 오면 꼭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하고 묻는 겁니다. 그분은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 저를 꼭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고맙게도 그날 오백원 동전에 새겨진 학들은 제가 원장으로 있는 통도사 자비원에 전해졌습니다.
제가 동냥을 오는 이들에게 돈을 봉투에 담아주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시죠? 저는 1985년에 처음 해외에서 선서화(禪書畵) 전시를 시작했는데, 어느 해는 미국 하와이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같이 여행을 하던 백인 한분이 여행이 끝나자 신문인쇄가 안 된 면을 일부러 골라 1달러를 정성스럽게 싸서 버스 운전사에게 주는 것을 봤어요. 그 순간 운전사가 정중히 일어서 인사를 하는데, 그 모습이 진심이 담긴 진정한 사람과 사람의 인사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감동적인지 저도 다음에 그럴 기회가 되면 반드시 따라 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한국으로 되돌아와 절에 있는데 하루는 한 젊은이가 동냥을 왔어요. 하와이에서의 일은 생각나지도 않고, 순간 젊은 사람이 동냥 오니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흔쾌하지 않아요. 하도 떼를 써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되는 돈을 주고 언짢은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는 겁니다.
한때는 스스로 일등 수좌라고 자부심을 가지던 내가, 내 것도 아닌 신도들 시줏돈으로 살면서 중생의 어려움을 모르고 그 사람의 업을 무시하는 마음을 일으킨 겁니다. ‘아! 나는 진정한 스님이 아니구나. 이런 내가 무슨 수행자냐, 그냥 절 지키는 사람이지’ 하는 마음에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어요. 그런 뒤부터는 비록 자장면 값 밖에 안 되는 적은 돈이지만 동냥을 오면 꼭 봉투에 담아 돈을 드리고, 시간이 되면 차도 대접합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아저씨, 다음에 또 오이소”하고 인사도 빼먹지 않습니다.
또 한 번은 몇 해 전 열반한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께서 전화를 해서 “수안 스님, 내가 사람을 하나 보내니 자비를 베풀어 주소”라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고 암자에 있는데 덩치가 산만한 사람 몇이 절에 털썩 하더니 저더러 그림을 해내라 부탁을 하는 겁니다. 그냥 해주기는 뭣하고 그럼 왜 그림을 원하느냐 했더니, 자신들은 젊어서 죄를 짓고 형무소를 살다 불교공부를 했는데 사회에 적응 하지도 못 하고 여러 큰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왔다고 합니다.
뻔뻔스럽기도 하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어 정말 싫었지만 큰스님의 부탁이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려주고 돌려보냈습니다.
2003년 겨울에 월하 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다비식을 하던 날 거화를 하려고 섰는데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면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겁니다.
앞으로 절집에서 살면서 누가 내게 “수안이 자비를 베푸소”하는 말을 하겠나하는 싶은 생각이 일면서 큰 참회를 하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게 절을 하면서 눈물이 철철 흐르는데 얼마나 환희심이 나던지 내 몸이 같이 불속으로 들어가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견 정업 정사유 정어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 팔정도는 성스러운 성인이 되는 8가지 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 실천하면 그냥 성불하게 되고 성인이 됩니다. 제가 동냥치들에게 “아저씨 다시 오이소”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정명(正命)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집밖으로 나오면 다 여행입니다. 불자의 여행은 성불을 구하는 구도행입니다. 오늘 하루는 뭘 구하셨습니까?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더 못한 사람, 어린 사람, 늙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서나 얻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지식을 너무 맹신하지는 마세요. 오직 내 자성불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