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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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지키면 행복해져요”
[큰스님]월운 스님(서울 보문사 주지)
농부가 농사를 게을리하면 수확할 것 없듯이 출가자가 수행을 게을리하면 풍요로운 마음밭을 가꿀 수 없다는 월운 스님이 보문사 법당 뒤에 있는 텃밭에서 울력을 하고 있다.
태풍이 몰려옴을 예고라도 하듯 짙은 먹구름이 가득한 7월 6일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 기슭에 위치한 보문사를 찾았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지만 인근 계곡의 물은 물대로 멀리 보이는 산은 산대로 맑고 선명했다. 주지실에서 기자를 맞은 보문사 주지이자 태고종 사정원장 월운 스님은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인터넷 서핑에 여념이 없었다.

예상을 깬 뜻밖의 광경에 놀랐다. “스님, 인터넷 잘 하세요?” 문안 인사를 올리기 전 저절로 튀어나온 질문에 월운 스님은 “인터넷이란 놈이 참 희한해. 정보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려주는지 말이야. 각종 정보나 법문 자료를 이 놈을 통해 많이 얻어. 나한텐 둘도 없는 친구지”하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월운 스님은 이렇듯 다양한 법문 자료를 찾기위해 인터넷으로 세상을 만난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스님 나름대로의 신세대식 공부법이다.

그러나 수행 생활만큼은 철저하게 옛 스님들에게서 배운대로 원칙을 고수한다. 월운 스님은 50여년을 한결 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매일 오전 5시부터 시작되는 스님의 일과는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하루도 빠지지 않는 예불로 채워진다.

인근 주민들로 구성된 신도들과 함께 매일 오전 5시에 예불 올리기로 약속한 것을 거른적이 거의 없다. 예불 봉행 후 간단한 체조 그리고 아침 공양을 끝내면 인터넷으로 종무행정과 사찰 업무를 시작한다.

보문사에 혼자 있기 때문에 행정적인 업무나 신도관리, 울력 등 모든 것을 스님이 도맡아 하고 있다. 상좌들은 모두 지방에서 공부하거나 각자 사찰 주지를 맡고 있어 스님이 혼자 절을 지키고 있다. 손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과를 보내는 스님은 그래도 반드시 저녁 예불 후에는 2~3시간씩 정진한다.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며, 때로는 법문집도 집필한다. 지난 6월에는 고희 기념 법문집 <월인천강>을 출간하기도 했다.

“잠들기 전 하는 수행이 곧 내 하루 농사의 결실인 셈이지. 농부의 농사가 곡식 잘 키우는 것이듯 출가 수행자의 농사는 바로 수행이지요. 농부가 농사를 게을리 하면 수확할 게 없듯이 출가자가 수행을 게을리 하면 풍요로운 마음밭을 가꿀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진에 게으르면 수행자가 아무리 다른 일을 잘해도 소용이 없어요.”

불자들에게 불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범종단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월운 스님. 스님은 불교가 사람들에게 어렵게 인식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교육에 있다고 지적한다. “스님들이 책이 모자라 공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은사인 화봉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요즘은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풍요롭다 보니 오히려 정신이 나태해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쉽게 신도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선 제자들부터 경전 공부를 충실히 해야만 된다고 독려합니다. 본인들이 경전을 공부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남을 쉽게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공부를 용맹스럽고 폭넓게 해야 신심도 솟구치는 법입니다. ”

인터넷을 통해 법문 자료를 챙기는 월운 스님.
스님의 이런 철저한 교육 철학은 제자를 받을때마다 한번도 변함이 없었다. 초발심때부터 철저하고 엄격한 교육을 시키는 것만이 진정한 수행자를 길러내는 초석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 수행자로서 엄격한 원칙을 지키며 살다보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나는 출가생활에 늘 감사함과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출가자의 기쁨은 가진 게 많은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빠듯한 절살림에 늘 부족하게 살지만 행복하고 즐거워요. 부처님 말씀을 따라 살면 내면이 풍부해 지고 저절로 생활이 충만해지며 행복감이 넘쳐요. 행복은 절대로 부자순이 아닙니다. ”

스님은 불교를 통해서 얻어진 이런 행복들을 많은 이들에게 항상 나눠주고 싶어한다. 특히 불교를 접하기 어려운 이들을 찾아다니는 일에 열심이다. 형편이 어려운 불우가정과 무의탁 노인, 군부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간다. 불교가 사람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스님은 특히 97년부터 육군 60사단 사령부내 호국 용주사에 한달에 두 번씩 나가 노구를 이끌고 손자뻘 되는 장병들에게 법문을 한다. 스님이 인터넷에 유독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군포교 때문이다. “초창기에 군장병들에게 법문할 때 영험설화, 경전 법문, 비유법문 등 내 불교지식을 총동원해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너무 지루한지 법문 시작해 얼마안돼서 모두 졸고 있더라구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신세대 장병들이 좋아하는 인터넷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월운 스님은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어떤 포교든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스님은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한 장병에게라도 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군포교에 매진할 생각이다.


월운 스님은
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월운 스님은 58년 합천 해인사에서 화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78년 서울 안암동에 월운정사를 창건했으며, 80년에는 서울 상봉동에 태고종 산하 불교반야병원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태고종 교무부장, 한국불교신문사 사장, 태고종 제도개혁 상임위원, 태고종 중앙 호법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이래 현재 태고종 사정원장과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보문사 주지를 맡고 있다.



월운 스님의 가르침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불 올릴때 독송하는 ‘예불문’의 뜻만 제대로 알아도 바른 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안에는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매일 하는 거지만 예불문의 뜻을 물어보면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이 예불 올릴 때 그저 아무 생각없이 입가에서만 중얼거리고 말지요. 그래서 나는 신도들에게 예불문의 핵심내용을 자주 설명해 줍니다.

우선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가르쳐주는 구절입니다. 삼계도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3계를 이끌어주시는 선지식이란 말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는 중생들이 윤회하면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사생자부는 중생이 태어나는 네가지 방식인 난생 습생 태생 화생으로 생겨난 중생의 자애로운 아버지를 뜻합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을 살펴보면 시간과 공간, 땅과 물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은 존재한다는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닌게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이같은 원리를 알면 계율이나 수행을 말하기 이전에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신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염되지 않으면 모두 부처님입니다. 우주 자연은 그대로가 부처이지요. 그러나 때가 묻으면 중생이 되는겁니다.

우리 자신이 중생인 이유는 불성에 무명이라는 때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불성이 육체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형성된 우리 육신은 감각을 느끼는 오관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기 좋은 것만 보려고 하고, 좋은 냄새를 맡으려고 하고, 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찾아 다닙니다.

신도들에게 예불문을 가르칠때 가장 질문을 많이 받는 것이 바로 ‘제망찰해’입니다. 이것은 그물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 등 삼세를 포함해 육지 구석구석 어느 곳이나, 물속 어디든 전체를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그물이 어떻게 무한한 우주공간과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모두 지배하고 다스린단 말인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결국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인터넷 아닙니까? 인터넷은 정보망이요 곧 신경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보망은 전부 그물로 돼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 넷(Net)이 그물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요.

우리들의 몸에도 역시 신경망이 있습니다. 육체의 세포를 봅시다. 세포의 조직이나 모든 분자나 세포는 육각입니다.
물의 분자 또한 육각으로 몇 년 전만 해도 오염되지 않은 물은 육각수라 했습니다. 또한 약국에서 연고 하나를 사서 설명서를 보세요. 거기에는 반드시 육각으로 된 화학기호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부처님은 이미 3천년 전에 그물의 원리를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현명하고 위대하십니까?

시대가 참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정신계발의 정도를 표현하는 단위는 1900년대 초반부터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IQ(지능지수)를 사용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EQ(감성지수)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또 SQ(영성지수)와 NQ(인간관계지수)가 새로운 척도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40년만에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범죄형태는 갈수록 악독해지고 기본적인 연간 윤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풍족해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공황이라는 예기치 않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마치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돛단배 같습니다. 빠른 경제성장에 정신적인 성장이 발맞추지 못하고 뒤쳐져 있는 탓입니다.

이런때일수록 불교의 계율을 바르게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율, 계율 하는데, 도대체 계율이 뭡니까? 경직된 사고로 계율을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계율은 분명 불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무작정 계율이 지켜야 하는 것이기에 지킨다는 것 보다 그것의 본뜻을 알고 이해하고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계율을 말씀하신 것은 화합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합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특히 요즘처럼 물질문명이 발달된 시대에는 부와 명예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고 정진하는 것이 바로 계율을 잘 지키는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산같은 믿음과 그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정진에 더 비중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하나더 있습니다. ‘법력난사의(法力難思議) 대비무장애(大悲無障碍)’란 말이 있습니다. 글자대로 해석하자면 부처님 진리는 헤아리기 어려우며, 부처님의 대자비에는 장애가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넓고 광대무변해서 대자비심으로 실천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으로는 안되는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여튼 부처님처럼 3천년전부터 미래의 세상을 미리 예견한 위대한 분이 없다는 것만 알고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그리고 믿고 따르십시오. 그러다보면 성불은 저절로 됩니다.


글=김주일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2006-07-19 오후 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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