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번쩍했다. 절하기 시작한지 벌써 12시간이 지났다. 속도도 느려지고 물병을 잡는 횟수가 늘어났다. 정신이 어디로 가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느껴진다. 지금까지 먹은 것이라고는 바나나 한 조각과 물 뿐이다. 절이 절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찰나다. 머릿속이 하얗다. 나는 왜 여기에서 절을 하고 있을까.(이은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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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천안 한암사불교문화원 대법당은 1만배를 하고 있는 신도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때 이른 한여름 날씨로 갈증을 느낄 만한 날씨였다.
여덟 명 보살들 중 세 명은 그동안 하루 1천배씩 1백일을 작정하고 해 온 절수행 회향을 3일 남겨놓고 있다. 세 명은 회향을 더 큰 수행의 입제로 삼자고 뜻을 모았고 1만배를 결의했다. 그동안 1천배 1백일 절수행을 마쳤거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보살들이 그 뜻에 가세했다.
새벽 4시30분부터 시작한 1만배. 시계바늘이 오후 4시로 향하면서 지치기 시작했다. 정진숙 보살(43)이 좌복에서 물러나 다리를 펴고 앉았다. 말을 걸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시간, 김은숙 보살(44) 남편이 옆에 좌복을 깔고 함께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응원하기 위해서다.
신미녀 보살(38)의 딸 장지예(14)양과 아들 장순민(11)군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엄마 뒤에서 절을 하고 있다. 밤새도록 함께 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1만배를 마친 것은 다음날 오전 7시가 넘어서였다.
▶이옥향(45, 수간호사 출신, 신행 7년)
처음에는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절수행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1천배 1백일 기도를 회향하고 나서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더라고요. 내 능력을 알고 싶기도 하고 한계상황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요. 아이들요? 없어요, 결혼도 안했는데…. 자유롭죠. 수행다운 수행 한 번 해보고 난 뒤 생각나면 그 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요?
▶윤명숙(42, 단국대 교직원, 신행 3년)
내가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동안 해 온 1천배 1백일 기도보다 어려울 거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14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견딜 만해요. 기자님은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지금 그래요.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아이들을 꾸짖을 때도 설득하게 됐어요. 내가 달라져야 아이들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절 하면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으셨죠?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안의 나’라고 생각해요. 더 해봐야죠. 확신이 들때까지요.
▶김은숙(44, 음식점 운영, 신행 4년)
저는요, 진짜 저를 버리고 싶었어요. 제가 욕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 욕심이 버려지지가 않았어요. 참 괴로웠지요. 그래서 벗어나자고 작정을 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절하면서 그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고 향기가 나기 시작했어요. 내 마음에서요. 너무도 신기했죠. 108배를 700일째 하고 있는데, 지금은 참 마음이 편안해요. 마음이 부자가 된 느낌이에요. 1만배 끝나면 참선수행을 할 생각이에요. 내 마음을 보고 싶어요.
▶신미녀(38, 가정주부, 신행 6년)
딸이 같이 하고 있으니 죽더라도 끝까지 해야죠. 그냥 살아 온 세월들을 되찾을 거예요. 어느 날 문득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 문제, 집안 문제 여러 가지로 복잡했어요. 사는 게 힘들었죠. 그런데 절하면서 내 환경이 이해가 되더군요. 갈등이 점차 줄고 있어요. 절하면서 오히려 살이 쪘죠, 5Kg이나요. 하지만 이게 다라고는 생각 안 해요. 뭔가가 더 있을 거예요.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
▶박은미(33, 분장전공, 6개월)
젊은 사람들 티격태격하며 살잖아요. 오해도 하고, 미워도 하고요. 한암사에 와서 스님 법문을 듣고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가’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절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무슨 무속처럼 여기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저를 믿어요. 저도 남편을 믿고요. 믿음이 생겼죠, 1천배 1백일 기도를 하면서부터예요. 나를 돌아보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싶어요.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이은지(38, 한의사, 3년)
절을 하면서 하심하고 참회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수행하는 목적이기도 하고요. 행복한 가정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으니 불편할 것이 별로 없을 텐데 왜 수행을 하냐고 물으셨지만 그게 아니에요. 진짜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래요, 물으신 것처럼 지금 불행하지는 않아요. 행복하죠. 그런데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요. 이은지가 살고 있는데, 이게 이은지 모습인지도 모르겠고요. 확신은 없어요, 나를 찾을 수 있을지는요. 하지만 끝까지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