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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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요청 들어오면 ‘원근 불문’
[큰스님편안하십니까]연천 오봉사 조실 효란 스님
효란 스님
“딱 딱 딱 딱…”

오른손으로 바닥에 놓인 목탁을 치기 시작한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덕망이 높은 큰 비구 대중 천 이백 오십인이 함께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한글 불설 아미타경’이 끝나자 ‘예불문’으로 이어진다. ‘한글 불설무량수경 동방게’가 시작되자 오른손으로는 목탁을, 왼손으로는 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연이어 왼다. 그리고 ‘발원문’을 낭독한다.

“…예토의 중생들은 아미타부처님의 사십팔원의 맹세를 신봉하고 지금 본원염불도량에서 일념으로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평화에 의한 국태민안과 한국의 남북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시옵기를 염원하오며….”

‘반야심경’을 마지막으로 연천 오봉사 조실 효란(曉鸞·88) 스님의 저녁 예불이 끝난다. 스님은 매일 오전 5시, 10시, 오후 5시 세 차례 대웅전인 ‘무량수전’에서 예불을 드린다.

올해 미수(米壽)를 맞은 효란 스님. 오봉사 무애원(無碍院)에서 뵌 스님은 예상보다 정정했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으며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열정이 느껴졌다.

스님의 주요 일과는 강의와 집필활동과 토론. 스님은 부처님의 감로법문을 목말라하는 곳은 어디든 간다. 〈무량수경〉을 비롯해 정토신앙과 관련한 강의를 주로 하신다.

스님을 뵙던 날 스님의 손가락에 빨간 물이 들어 있었다. 원고를 교정하느라 빨간 사인펜을 장시간 들고 있다보니 물이 든 것이다.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제는 노환으로 인해 보청기가 없으면 잘 들리지도 않지만, 점점 더 침침해지는 눈을 치켜뜨며 새벽부터 집무실인 영현각에서 원고를 다듬는다.

스님은 토론하기를 즐긴다. 정법을 찾는데 나이나 지위 고하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절에 찾아온 젊은 스님과 며칠동안 계속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스님을 열정적인 구도의 길로 나서게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스님은 집안의 도움을 받아 제2고보(현재 경복고)에 다닐 때 첫 번째 운명적인 사건에 부딪친다. 평소 ‘조센징’이라며 한국학생들을 차별하는 일본인 선생에게 폭행을 가한 것이다. 당연히 퇴학처분이 내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스님은 한국 유학생들의 모임인 ‘자숙회(自肅會)’ 회장을 맡으며 독립운동을 했다.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된 스님은 3년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때 스님은 두 번째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형무소에 있을 때였다. 다른 책은 반입이 금지됐지만 불교서적만은 예외였다. 당시 형무소 교무과장이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스님은 300여권의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 불법의 바탕을 다지게 된다.

해방 후 지적인 탐구를 계속했지만 당시 한국불교 현실과 비교할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불교라는 것은 결국 깨닫는 것이지만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구제받기 위해 불교를 믿는 것이다. 구제가 곧 성불이고 이것이 대승불교다. 또 한국은 참선을 위주로 하지만 염불을 해야 육도윤회를 해탈할 수 있다.”

효란 스님이 서재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스님은 이러한 생각으로 구도의 길로 나섰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타이완. 그러나 그곳에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청담 스님 재일 때 만난 일본스님으로부터 <정토삼부경>을 얻고 ‘왜 염불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염불은 아미타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주신 선물이다.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부처님의 공덕이 중생들에게 가는 것이다. 결국 염불은 부처님이 공덕을 주시는 것이고 그 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스님은 1979년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1년 중 절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생활을 하며 구도의 길을 계속 걸었다. 스님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구도열에 일본스님들도 감복해 400여 곳에서 스님의 법문을 청했다.

일본사찰에서 법문했던 초기, 스님은 법문하는 절에 태극기를 게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스님이 일본 사찰에서 법상에 올라 법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981년 오봉사를 건립한 후 스님이 주력했던 것은 법보시. 스님의 저서 <정토삼부경 강설> <관무량수경 의역과 해설> <불교의 전통신앙> 등을 출간해 현재까지 50만부를 법보시했다. 이러한 스님의 열정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걸까.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절 오봉사 무량수전 주련이 스님의 뜻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極重惡人唯 佛(극중악인유칭불)
我亦在彼攝取中(아역재피섭취중)
煩惱障眼雖不見(번뇌장안수불견)
大悲無倦常照我(대비무권상조아)

‘죄가 무거운 악인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함으로써 죄업을 소멸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나 역시 그대와 같이 염불로써 구제받고 있으니, 번뇌의 장애로 인해 보이지는 않으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쉴 새 없이 항상 나를 보살펴 주고 계신다.’

효란 스님은
1919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1931년 수덕사 만공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은 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46~65년 경성대 법문학부 및 보성전문학교에서 문화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68년 동헌 스님을 은사로 건당한 스님은 78~83년 조계종 반야회 회장, 83~4년 군법사단 후원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대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창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서울 서원사ㆍ연천 오봉사 조실이다.

글=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효란 스님의 가르침

효란 스님이 염불을 하고 있다.
중국불교의 〈선정쌍수집요(禪淨雙修集要)〉에 보면 임제종의 육조이신 혜능 대사 제자들이 혜능 스님에게 “염불하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혜능 스님이 “일구의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칭명염불하는 것에 대한 이익을 설합니다.

첫 번째 집착의 괴로움을 떨어버리는 묘도(妙道)요, 두 번째 성불을 이루고 조사되는 정인(正因)이요, 세 번째 삼계인천(三界人天)의 안목이요, 네 번째 마음을 밝히고 불성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다섯 번째 지옥을 깨트리는 맹장이요, 여섯 번째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일곱 번째 오천대장(五千大藏)의 골수요, 여덟 번째 팔만총지(八萬總持)의 중요한 길이요, 아홉 번째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明燈)이요, 열 번째 생사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요, 열한 번째 고해(苦海)를 건너 늘 타고 갈 배요, 열두 번째 삼계(三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요, 열세 번째 최존최상(最尊最上)의 묘문(妙門)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그러나 이 일구를 기억해 염불하는데, 일이 없어도 일이 있어도 안락할 때도 병고가 있을 때도 살아서나 죽어서라도 일관해 염불하는 것에 대한 일념이 분명하면 또 다시 무엇을 누구에게 물어서 길을 찾으랴. 이른바 일구미타무별념(一句彌陀無別念)하면 불노탄지도서방(不勞彈指到西方)이라.

이것을 번역하면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염불하면 손가락을 튕기는 힘을 내지 않아도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을 해서 성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선은 상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번뇌덩어리임을 앎으로써 화두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근기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따라서 참선보다 염불을 통해 성불도에 입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정토문을 가는데 저어하는 것은 두터운 업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미타경〉 ‘제불찬탄권유(諸佛贊嘆勸誘)’에 보면 업장이 두터워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수행하고 공덕을 쌓아서 업장을 소멸하고자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염불수행은 너무나 쉬운 행이라 이 세상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출·재가 모두 제도하는데 목적이 있고 그 방편이 바로 염불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연기(緣起)와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이 같이 생활하는 것이 육바라밀인데, 염불이 바로 연기와 삼법인, 팔정도, 육바라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대승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무애입니다. 진리는 물과 같아서 물이 흐르다가 둥근 것을 만나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것을 만나면 네모가 됩니다.

원효 스님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할 때 염불신앙을 권장했습니다.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무애고(無碍鼓)라는 바가지를 두드리며 돌아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를 전했고, 자장 율사를 위시해 의상 대사 등 여러 후학들이 정토교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의 무애 염불은 스님이 입적하신 후 한반도에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런데 저는 원효 스님의 염불법과 염불관을 스님 입적 후 500년이 지난 일본에서 성립된 ‘신란(親鸞,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불교’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신란 스님의 염불신앙은 원효 스님이 주장하는 ‘왕생(往生)의 정인(正因)은 발보리심이요 조인(助因)은 염불’이라는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란 내가 원하는 곳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원하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배워서 깨달음으로 구제되는 가르침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은 수없이 많으나 제일 쉬운 길은 ‘본원’을 믿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원’이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즉 모든 중생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맹세이자 행동하는 마음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자 명호인데, ‘나무’는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미타불’은 부처님의 몸체입니다. 즉 염불은 부처님께서 마음과 몸을 내던져 결사적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하는 동안 나의 과거 80억겁의 업장이 소멸돼, 내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큰 소리로 하라고 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중생들도 공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고승 선도 대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정진을 열심히 하다 보면 계행을 지켜야지 하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차차 악습이 소멸돼 자연스럽게 선행을 하게 되고 무계(無戒)가 유계(有戒)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의 본원을 믿고 오직 당신의 힘에 의해 이 몸이 부처가 되는, 환희와 늘 보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과 인간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정리=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연천/글=남동우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6-06-20 오전 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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