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르는 듯 하면서도 직접적이고, 직접적인 듯 하면서도 에두르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생긴다.
“마음을 비워야지요. 열심히 공부도 해야 합니다. 자비심을 베푸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스님이 아닌 속인들에게 이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스스로가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말이라도 말은 그저 말일 뿐이지요.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른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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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이 천안 각원사에 있는 날은 많아야 한두 달에 이삼일 정도다. 일본 도쿄의 명월사에서 매월 또는 격월로 초하루법회 때에 각원사에 왔다가 다시 명월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일본에 뿌리내린 지 벌써 37년 째.
“밥 먹고 청소하고 잠자고 공부하고 신도들 만나고 그게 전부지. 특별할 게 있겠어요.”
초하루 법회 하루 전 일본에서 각원사로 내려오자마자 신도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다시 각원사로 돌아온 탓인지 스님의 얼굴엔 다소 피곤한 기색이 돌았다. 3시간 남짓 수면을 취하고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신도들을 만나던 차에 기자와 마주한 법인 스님. 하지만 꼿꼿한 자세와 잔잔한 미소는 여전했다.
스님의 일상은 명월사에서나 각원사에서나 늘 한결같다. 웬만한 것은 무엇이든 직접하고,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다. 경전이든 전문서적이든 가리지 않는다.
“출가하고서 죽도록 공부해보자고 원을 세웠어요. 공부든 수행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절한 원이 없으면 이루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회향하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는 지식은 의미가 없어요. 공부가 어찌 나 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실천없는 깨달음은 공허합니다. 자기 공부와 수행은 곧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자기 힘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인과법이지요. 제가 포교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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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은 문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학승이자 선(禪)선과 율(律)을 겸비한 스님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법인 스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포교다. 실제로 명월사에서의 해외포교는 물론이고 국내 포교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커다란 좌불상으로 상징되던 각원사가 짧은 시간에 웅장한 대웅전과 여러 수행공간 등을 갖춘 대가람으로 태어난 것도 바로 포교 원력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일본 유학시절 한 재일동포의 시주로 각원사 불사를 시작한 법인 스님은 부지 확보 문제 등으로 몇 차례 난관에 부딪쳤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이해 당자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시켰다. 타종교인이자 구두쇠로 소문난 지역 유지를 감동시켜 5천 평의 땅을 보시받은 일화는 지금도 지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각원사는 그렇게 법인 스님의 땀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도 스님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지금 지역불자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신행할 수 있는 불교회관을 건립 중이다. 불교회관이 완공되면 유치원도 만들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싹’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시대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가 옛날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지금 세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현상을 바르게 판단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은 실천에 있습니다. 불자들 한사람 한사람이 개척자가 돼야 합니다. 실천하는 개척자 말입니다. 그래야 가치있는 정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어요. 지금 시대는 그런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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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은 항상 말을 조심한다. 스님들조차도 많이 쓰는 ‘부처’ ‘중’ ‘대처’라는 표현은 절대 쓰지 않는다. 말이 곧지 않으면 스스로 곧지 않은 것이요, 곧 남을 곧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출가자의 본분이라고 하신다.
“내놓을 것이 없어 보여드린 것이 없어요. 다음에 다시 만나도 나이 숫자가 달라지는 것 빼고는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데…”
법인 스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기자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 잠깐이라도 스님을 뵙기 위해 취재가 끝나길 기다리는 많은 신도들에게도 스님은 똑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신도들은 많은 것을 얻어갈 것이다. 수행자가 올곧게 길을 가고 있으면 신도들은 그 모습에서 헤아릴 수 없는 법문을 듣는 법이니까.
글=한명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법인 스님은
16살에 출가해 60년 가까이 교학과 포교에 매진해왔다. 특히 호진 스님(前 동국대 교수)과 청화 스님(조계종 교육원장) 등 뛰어난 상좌들을 두었을 정도로 후진양성에 남다른 의지를 보였다.
1931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46년 해인사로 출가한 뒤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마산 해인대학 종교학과, 동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철학과 석사학위, 87년 일본 대동문화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5년 일본 도쿄에서 명월사를, 77년 천안 태조산 각원사를 창건했으며, 85년 평화통일문화협회 평화통일문화상을 수상했다.
<불교입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연구> <개미집과 하루살이> 등의 저서가 있다.
법인 스님의 가르침
“잘못 바로 잡아가는 것이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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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 삼독을 끊어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자비를 베풀어라” 이런 법문 한 두 번 들어보지 않은 불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생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꾸리고 생활을 설계해 나가려면 적당한 욕심 없이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게 무작정 욕심을 버리라고 하면 가슴에 와 닿을까요? 욕심을 내세요. 그래야 발전이 있지요. 그런데 무조건 욕심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겠다는 깨끗한 욕심이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은 과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100원어치 땀을 흘리고 200원을 받겠다면 그것이 바로 과욕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무엇을 베풀며, 생활인이 마음을 어찌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그 가르침의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푸는 것이 어찌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며, 삼독을 끊는 것이 어찌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것을 베풀면 되고, 삼독을 끊으려고 생활 속에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그 가르침을 어떻게 응용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지혜를 배우는 자세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게 됩니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길 것이 아니라 적어도 화내는 경우를 줄이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발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나가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만이 법문이 아닙니다. 생활의 모든 것이 법문입니다. 부처님 법문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디서 무슨 법문을 구하겠습니까.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가려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禪)을 하는 사람들은 교(敎)를 등한시하고, 교학을 하는 사람들은 선을 등한시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선과 교가 둘이 아닌데, 어느 한쪽만 치중하는 것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학이 필요하고, 교학이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선을 알아야 합니다.
교라는 것은 주춧돌과 같은 것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교가 바탕이 돼야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처님 법을 알 수는 없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율(律)입니다. 율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자 화합입니다. 율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속박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자발적 의지입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폭넓게 생각하면 자비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죽이지 않겠다’고 좁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 ‘불쌍한 짐승이 있으면 보살펴 주겠다’고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살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모두 생명과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 법칙에 순응해 생명을 잘 가꾸는 것이 불살생이고 세상과 화합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화합입니다.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하고 세상 모든 만물을 위하는 것이 화합이지요.
교와 율에 충실하다보면 견성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혼자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이로운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이치를 아는 것이기도 하지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하며, 친절해야 합니다. 또 부지런해야 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법력난사의(法力難思議) 대비무장애(大悲無障碍)’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진리는 헤아리기 어려우며, 부처님 대자비에는 장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비심으로 화합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 부처님 법을 믿으세요.
정리=한명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