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지의 사실대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제28번째 선지식인 관자재보살과 선재가 대면하는 장면에 그 교리적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만, 이 짧은 대목만 가지고는 ‘수월관음(水月觀音)’이라는 그 명칭서부터 뭔가 풀리지 않는 도상학적 과제가 많이 남습니다.
선재동자의 기나긴 구법(求法)의 여정에 일관되어 관통하는 화두(話頭)는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菩薩行)을 배우며 보살도(菩薩道)를 닦느냐”라는 것. 즉, ‘어떻게 부처님의 친견을 버리지 않으면서, 또 여러 보살들과 선근(善根)을 같이 할 수 있는가(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이 어떻게 유위(有爲)를 버리지 않고, 또한 거기에 머물지도 않으면서(無爲) 보살행을 하는가’.
이 상반되는 유위와 무위, 정반합(正反合) 병행의 미학(美學)이 바로 ‘물(水)에 비친 달(月) 그림자’입니다.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고 숨었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한 몸 또는 여러 몸으로 나투기도 하는 걸림 없는 대비행(大悲行)의 해탈문, 구경무애(究竟無碍)의 보살행(菩薩行)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달로 천 개의 강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달에서 무수한 달을 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묘법(妙法)’이기도 합니다.
| ||||
이는 바로 ‘지혜의 광명(一切智智)’을 얻음으로서 가능한데, 이 무명의 어둠을 사르는 청정한 달빛과 같은 지혜의 빛은 곧 대비력(大悲力)의 작용이기도 합니다. 한없이 미치지만 결코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보살의 대자비심은 밝은 달뿐만 아니라, 대지(大地)ㆍ큰 바다ㆍ밝은 해ㆍ큰 구름ㆍ큰 비 등의 작용에 비유되기도 하여, 대자연의 법(大自然之法)이 다름 아닌 대지혜의 법(大智慧之法)임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선재동자는 ‘보살행이 무엇인가’ 그 가르침을 구하라는 문수보살의 첫 계시를 받고, 비구ㆍ장자ㆍ우바이ㆍ뱃사공ㆍ여인 등의 많은 선지식을 거칩니다. 위에 언급한 관자재보살과의 대면은, 이러한 멀고도 고단한 구도의 편력 이후, 선재동자가 처음 ‘보살’이라는 존재와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합니다. 남쪽 바다 위에 산이 있어 이름 하여 광명(光明)이라 하고, 그 산에는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그는 이미 ‘대자비 광명의 행’을 증득한 보살이라 하니, 수월관음도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도상의 형식은 이 <28번째 선지식인 관음보살과의 대면 장면>에서 비롯된 것이 확인 안 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수월관음도>에는 단지 이 장면에만 근거한다는 협시적인 의미를 넘어선, 화엄경 전체를 관통하는 ‘보살(菩薩)’을 대표하는 포괄적이고도 상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 ||||
지난 회(연재9)에 언급한 수월관음도의 여러 특징 중에서도 가장 큰 도상학적 특징은, 수월관음에서 발산되는 달빛과 같은 ‘청정(淸淨)한 자비의 광명(光明)’입니다. ‘둥근 보름달은 원만한 대비장(大悲藏)이고 이 대비장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 조복케 하여 마침내 피안에 이르게 한다’라고 합니다.
세상 어디나 구석구석 비추어주는 해(無量光, 普光明)ㆍ어디에나 내려 일체 만물을 적시어 윤택함을 더하는 은혜로운 비(法雨)ㆍ세상의 모든 강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달(水月), 그러고 보니 해로 달로 구름으로 비로 바람으로, 법계에 충만한 이러한 법신(法身)의 방편들로 일체 중생은 항상 그 무량한 은혜 속에 둘러싸여 있었군요.
무량한 빛과 같은 법신의 존재는 낮에는 해로 밤에는 달로, 찬란한 대광명인 태양빛이 여래(體)의 용(用)이라면, 은은한 자비의 달빛은 보살(體)의 용(用)이 됩니다. 그러므로 강렬하고도 파워풀한 태양빛은 여래 중의 여래인 ‘비로자나’에 비유되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온화한 자비의 달빛은 보살 중의 보살인 ‘관음’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 ||||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에 투영되는 달그림자’라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또 한 존재하는 바 없는 이러한 자연 현상은, 금강경 및 반야심경에 역설되어 있는 ‘형상을 여읜 형상(一相無相, 離色離相, 法身非相)의 머무름이 없는 묘행(妙行無住)’을 절묘히 설명해주는 메타포가 됩니다. 일체 보살 만행(萬行)의 수행 지침서인 능엄경에도 이러한 체(體)와 용(用)의 논리가 물에 비친 달, 즉 물(水)과 달(月)의 관계로, 그 진성(眞性)의 공(空)함이 구구절절 논해져 있습니다.
중생의 번뇌가 뜨거운 불이라면 이를 식혀주는 것은 청정한 자비의 달빛입니다. 노자에는 이러한 청정(淸淨)함에 대한 간단명료하면서도 기막힌 정의가 실려 있습니다. ‘열기는 냉기를 이기고/청량은 열기를 이깁니다/청정(淸淨)이 곧 천하 안정의 묘약입니다’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남쪽 해변가를 순례하던 중, 큰 바다에 큰 비가 내려도 가득 차지 않음을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선지식의 가르침은 봄 날씨와 같아 모든 선근(善根)의 싹을 자라게 하고, 선지식은 마치 보름달과 같아 청량한 교법의 광명으로 모든 곳을 서늘히 비추어 번뇌를 없애네’
지난 어느 화창한 봄날, 그 따사로운 빛을 받으며 양주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 기둥의 주련(柱聯)에는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선시(禪詩)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달이 은하수에 갈리고 닦여 둥근 모습이루니/ 맑은 얼굴에서 빛을 놓아 대천세계 비추네/원숭이가 팔을 내어 부질없이 못 속의 달을 건지려 하지만/고독한 달은 본래 청천에서 떨어진 바 없고/묵묵히 보리(菩提) 대도심(大道心)과 계합하고 있네.’
그림1 원만한 수월관음의 얼굴과 달과 같이 둥근 두광
그림2 선지식(善知識)은 어디에(구도하는 선재동자)
그림3 투명 사라의 끝자락,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물
그림4 미풍에 휘날리는 옷자락과 수월관음의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