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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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배', 절하며 '손바닥 뒤집기' 고쳐야"
이원주씨 본지 기고… 상호 교례도 주장
현대불교신문 579호 1면 ''절할 때 왜 손바닥 들죠?'' 기사를 보고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원주씨<사진>가 본지에 글을 보내왔다.

이 글에서 이원주씨는 "스님에게 3번 절하는 관행을 한번으로 회복하여 바로잡아 야 할 것이며, 절하고 난 뒤 손바닥 뒤집는 형태도 국적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원주씨는 또 "재(齋) 지낼 때 영단(靈壇)에 두 번 절하면 되고 다른 곳에 절하지 말라는 노장스님들의 말씀도 실천으로 옮겨야 할 뿐 아니라 스님과 신도들 모두는 상호 교례(交禮)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원주씨의 기고문 전문.



예배(禮拜)에 대한 견해

1. 불가의 절(拜)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는 데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자연 환경 뿐만 아니라 문화적 환경 역시 피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 불자들 역시도 불교문화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문화와 신행 면에서 불교전래 1600년이 지나온 동안 우리민족공동체가 함께 누리고 같이 애써 가꾸어 온 불교문화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지금쯤은 한번 과거를 살피면서 현재를 점검해 봐야 할 것 같다. 요즈음 불교의 예배(禮拜)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 소견을 나타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경건하게 예배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 불자들의 경건한 예배는 거의 신행의 목적인양 다투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불보살님께 공경심을 예배(禮拜)로서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절(拜)이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전 예부터 우리 민족은 연장자와 현인들 및 성소에 예배를 드려 공경과 존경을 표현하는 생활문화를 갖고 있었다. 불교전래를 통해 우리 고유문화의 절하는 예절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와 지난 세월부터 내려오던 불교적 예절 가운데, 절(예배)은 언제부터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부질없이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회복하여 실현시킬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2. 경전에 나타난 예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살라국(拘薩羅國)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으로 가셨다. 그 때 사위국에는 교만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두 사람 다 종성이 깨끗하여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며, 일곱 대를 내려오면서 모두 맑고 깨끗한 자들이었다. 그는 바라문의 스승이 되어 언론에 통달하고, 모든 논과 기록과 책을 만 가지나 분명히 알며, 법의 낫고 못함을 알고, 모든 글귀와 기설(記說)을 분별하였으며, 얼굴도 단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혹은 태생으로 거만을 떨기도 하고, 족성으로 거만을 떨기도 하며, 얼굴로 거만을 떨기도 하고, 총명함으로 거만 을 떨기도하고, 재물로 거만을 떨기도하며, 부모도 어떤 존자도 스승과 어른도 공경하지 않았다. 그는 사문 구담께서 구살라국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지금 사문 구담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 보자. 만일 그가 무슨 말을 한다면 나도 같이 이야기할 것이요, 아무 말도 없으면 나도 잠자코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 교만한 바라문은 흰 마차를 타고 여러 젊은 바라문들에게 앞뒤로 호위를 받으면서 황금 자루 일산을 들고 황금 병을 지니고 세존을 뵈러 갔고, 동산 문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그 때 세존께서는 여러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설법하시면서 교만한 바라문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러자 교만한 바라문은 ‘사문 구담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나는 일단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교만한 바라문의 생각을 아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교만한 이여, 이곳까지 찾아오고도 좋지 못하게 교만만 더 하는구나 조금 전 도리로써 일부러 찾아왔으니 마땅히 그 도리를 더욱 더하라.

이 때 교만한 바라문은 ‘사문 구담은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다. 가서 공경히 예배드리자’고 생각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교만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라. 그만 두라. 예배할 것 없다. 마음만 깨끗하면 이미 족하니라.”<잡아함경 제4권 92.교만경 127p>

그 때 그의 여러 대중들이 제각기 큰 소리로 외쳤다.
“참으로 기이합니다. 세존께서는 큰 덕이 있고 큰 힘이 있으십니다.

이 교만한 바라문은 자기 태생을 믿고 교만을 부리고, 족성으로 교만을 부리며, 얼굴로 교만을 부리고, 총명함으로 교만을 부리고, 재물로 교만을 부리며, 그의 부모도 어떤 존자도 스승과 어른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문 구담 앞에 와서는 스스로를 낮추어 겸손하게 발에 대고 공경히 예배하려고 하는군요.” 그 때 교만한 바라문은 대중들 앞에서 소리치며 조용하게 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누구에게 교만한 마음 일으키지 말고 누구에게 공경하는 마음 일으켜야 하며 누구를 잘 위로해야 하고 누구를 잘 공양해야 합니까?’

그 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모와 어른과 형님 화상(和尙)과 여러 스승들 존경할 만한 모든 사람들께 교만한 마음 내선 안 되네. 마땅히 잘 받들어 공경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인사드리며 마음을 다해 받들어 섬기고 여러 가지 공양도 올려야 하네. (중략) 모든 교만한 마음 항복받았나니 이러한 어질고 거룩한 이들에게 합장하고 머리 조아려 예배하여라.” (하략)

위의 교만경 상담 사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예배보다 더 중요한 점은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예배의 참뜻을 가르치신 것이다.

또 예배를 조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은 붓다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경전의 예를 살펴보자.

붓다의 자비 행 가운데 박칼리를 찾아가 문병(問病)상담한일이 있다.

붓다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비구 박칼리가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간호하는 스님에게 부처님을 한번 뵙고 예배드렸으면 싶은데 죽림정사 까지 갈수 없군요. 간호하던 스님의 전언에 따라 붓다께서는 병문안 하러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 하셨다. 붓다께서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어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고 나직하게 물으셨다.

박칼리는 말씀드렸다. “붓다님,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하여 소생 할 가망이 없습니다.”

붓다께서 “박칼리, 너는 어떤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박칼리는 “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예배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 했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붓다께서 “박칼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禮拜) 해서는 어쩌자는 것이냐! 법(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고 하셨다.
-<불교성전> 142p,동국역경원

붓다께서는 자기 자신을 결코 ‘신앙의 대상이나 예배(禮拜)의 대상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씀 하셨다.


3. 예배 형태

위의 교훈에서 우리나라에서 변형되어가고 있는 불교의 예배관행(禮拜慣行)을 점검하고 개선할 점이 있으면 더 굳어지기 전에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부처님당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나서 부처님의 발아래 예배하고 한쪽으로 물러앉아 있는 것이 예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도에서는 수행자나 성자에게 예배하는 것이 상례로 된듯하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전신 전면오체투지(全身前面五體投地)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합장(合掌)이나 오체투지(五體投地) 예경의 형태는 인도의 것이라는 점이다. 합장 예배는 우리나라에도 불교교단에 흡수되어 체질화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전래160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민족은 오체투지로 절하기도 하지만 본래 생활화하고 있던 일반적인 예배법을 사용했다. 여인들은 보다 더 장엄한 몸짓으로 예배 했었다.’<불교예술3권 48p-엠애드>

옆 사람이 부딪칠 정도로 양쪽 팔을 크게 벌려 아래에서 위로 휘감아 원형을 그리면서 내려서 합장한 채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의 고유한 전통적인 신불에게 드리는 절(拜)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불교인들이 외국의 여러 나라에 왕래한 이후에 종전과 다른 새로운 모양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절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 것이다. 그것이 예배하고 나서 양손을 뒤집는 모습이다. 앙부(仰俯)의 자세라고하나, 딴 소리 일 뿐, 지금은 신도 법요집과 사찰의 신도교육지도지침서에 까지 수록되어 교재로까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와 티베트 태국 중국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예배형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큰 법당에서 예배할 때 손동작을 보면 1960년대 이전에 불자가 되었거나 모태신앙이었던 신도의 손 모습은 일반적인 전통적 절할 때 모습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불자가 된 분들은 손을 귀를 감싸거나, 귀 위로 바로 세우거나, 아니면 머리위로 두 손바닥을 치켜세우는 분도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종교의식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예절마저 통일 되지 않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무질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손동작을 하고 절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다. 단지 일본사람들만 그와 비슷한 형태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불교를 조금 안다고 하는 분들의 의견에 의하면 복혜양족(福慧兩足)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일축해버리는 실정이니 말이다.

친일(親日)이니 왜색(倭色)이니 하면서도 정작 고칠 것은 모르는 채 하고 있는 것이다.


4. 예배 횟수

또, 예배문제중에 세 번 하는 절(三拜)에 대한 것, 많이 절하는 다배(多拜) 관행 및 재(齋)를 올릴 때 절하는 횟수 등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옛날에는 절에 가면 법당에서나 세 번 절하는 것으로 여기고, 재(齋) 지낼 때도 영단(靈壇)에 두 번 배례(拜禮) 하는 것으로 별일 없이 살아 왔는데, 역시 1960년대부터 스님께 세 번 절하고 법당에도 세 번 절하는 특별한 형식이 전개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노장스님들께 여쭈어보면 근래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증언 하시고 있는 실정이다.

“1994년 10월 6일 조계종 개혁회의가 통도사에서 개최한 종단개혁불사 보고법회 법어(法語)를 통해 종정(宗正)스님은 ‘승려나 신도가 큰스님에게 3배(拜)를 올려 인사하는 관행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3번 절하는 것은 불경(佛經)이나 불교의례(佛敎儀禮)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것이며, 불전(佛前)이 아니면 절(拜)은 한번으로 그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절에 서 재(齋)를 올릴 때 영가(靈駕)에 2번 절하면 되고, 집전하는 스님에게 절하는 것은 잘못”<문화일보 기사/월하스님 대담/1994. 10. 8(토)>이라고 밝히면서 이것부터 개혁하라고 권장하셨다.

다른 노장스님의 기록물을 살펴보자

“영단(靈壇)에 잔을 올리고 뒤돌아서서 절하지 말라. 집중하여 재를 지내는 스님을 산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살아계신 분에게는 1배를, 영단에는 2배를, 자기스승 제삿날에는 3배를 해야 한다.”<법공양/우룡스님편 22p~23-불기2547-1월호/불교신행연구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권유하고 주장하신 장로 선사님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봉행해야 할 텐데도 어느 불교 종단에도 개선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가 찾아 전통예절을 살리면서 새롭게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다배(多拜)관행은 어떠한가? 불상을 향해 백팔 배, 천팔십 배, 3천 배 등의 관행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인가? 절에 가서 신도 되기가 힘 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고행자(苦行者)의 경우 실천의지에 따라 행할 수는 있지만, 붓다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을 구태여 왜 대중 불교시대에 절(拜)을 많이 하도록 강조하며 마치 붓다의 정법수행인양 자처하며 장려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싶다.


5. 예배는 보리심의 증진

불교에 있어서 예배(禮拜)는 매우 경건(敬虔)한 보리심(菩提心)을 증진(增進)하는 신행(信行)의 기본이다. 불자의 생활 속에는 삼귀의례(三歸依禮)가 있고 아침저녁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是我本師)라고 경배(敬拜)하고 있지 않은가? 길을 가리키는 인도자이고, 생명의 자비로운 아버지이고, 우리의 스승 이라고 하지 않은 가. 스승에게는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따라서 스승님께 인사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예절이 아닌가? 예불을 올릴 때 칠정례(七頂禮)를 보더라도 부처님은 문론 제불제보살과 마하살 및 역대조사님들과 부처님 제자와 아라한들께 지심으로 귀명례(歸命禮)를 하는 것은 영겁(永劫)을 이어 전등(傳燈) 하신 분들께 예배하는 것이다.

제불통청을 할 때 여러 단에 권공(勸供) 할 때 또는 각종 재를 지낼 때도 의식의 절차에 따라서 예배하면 된다는 개념 확립과 습관적으로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턱대고 절만 하는 식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관행이라고 생각 하는 바이다.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예경(禮敬) 가운데 배례(拜禮)하는 자태가 그렇게 성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전통적으로 몸속에 녹아 있는 예배(禮拜)의 모습이 알게 모르게 변형되고 국적도 없는 예배를 가르치기 까지 하며 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다시피 우리조상들의 문화는 기교(技巧)를 피우는 얇은미(薄美)를 추구하지 않았음에서도 알 수가 있지 않겠는가.

절(拜)하는 곳이 절(寺)이 아닌가, 절로 한다는 절을 함에 있어 무슨 기교가 필요하겠는가? ‘뒤집는 손바닥은 붓다의 복혜양족(福慧兩足)을 나타내지 않느냐’고 거짓 꾸며대기 식 보다는 하루속히 본래 우리민족의 예배방식을 회복하여 경건하게 터 잡아 나아갈 일이다. 말하자면 절(拜)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붓다경전에서 찾을 수는 없는 상태인 것이다.


6. 전통회복

앞장에서 문제점으로 거론된 스님에게 3번 절하는 관행을 한번으로 회복하여 바로잡아 야 할 것이며, 절하고 난 뒤 손바닥 뒤집는 형태도 국적을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齋) 지낼 때 영단(靈壇)에 두 번 절하면 되고 다른 곳에 절하지 말라는 노장스님들의 말씀도 실천으로 옮겨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스님과 신도들 모두는 상호 교례(交禮)를 해야 할 것이다.

불상에 절하는 일이 자성불(自性佛)의 보리심(菩提心)을 증장(增長)시키는 일이라면 살아있는 인간끼리는 마땅히 상호 친절(親切)을 보여야 할 것이 라고 생각 한다.

불자 모두는 삼귀의(三歸依禮)가 있음을 생각하고 누구에게 절하든 공경스럽게 경배하고 존경해야 하며, 그렇게 상호 교례를 하면 자신들도 각기 4부대중의 일원이라면, 자신이 타인에게 예배함은 내 스스로에게 절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대를 함께하는 보살수행자들과 공업(共業) 중생들에게 자비의 이타 행으로 백억화신 역할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이제부터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승속을 막론하고 우리미족이 전승해온 우리불자들의 절(拜)을 다시 개발하여, 절(拜) 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리라고 생각 한다.

그리하여 경건하게 지극정성으로 불공드리고, 질서에 따라 절을 올리고 많은 공덕 짓기를 발원 하는 바이다.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6-06-03 오전 10:24:00
 
한마디
덕 없는 스님께도 3배를 올릴 수 있다면 그가 진정 수행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논리를 읽어가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상의 한 자리끝을 다시 보고 갑니다. 내가 없다면 덕없는 중도 없을 터....역시 내가 있어 보이는이 다 번뇌투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상을 깨라 님...당신이 만약 스님이라면...삼보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공부하시길 부탁드립니다.....삼보에서 승은 분명 승가..승가는 스님 한 대상을 하는게 하니라 사부대중이 다 포함된 공동체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계가 기업화 되어가면서 잃어버린 스님들의 체통과 그 체통을 잃은 스님들이 어서 빨리 수행의 공간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삼보에 귀의 합니다.
(2007-05-15 오후 11:22:24)
61
절의 횟수를 떠나서 마음이 문제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108배나 100배를 과연 해 보시고 이런 기사를 썼는지 의심이 갑니다. 불교를 실천의 종교라고 믿는다면 3천배라도 해 보시길... 아마도 이글이 부끄럽지 않게 될까 싶네요 또 영가당에 절하실때 왜 2배인지요? 이것은 유교적인 것은 아닌지? 불교의식에 왜 유교적이여야하는지.. 3번 하는 이유는 일로왕 보살님께 드리는 것도 포함된다고...그리고 제를 지낼때 스님께 절하는 것이 스님의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는 말씀은 좀... 절하는데 산란해 하실 스님은 과연 염불은 제대로 행하실지 의문이 ..아마도 무심으로 보실거예요. 그리고 지성으로 제를 올려 주시는 스님께 감응되어 절하고 싶은 맘이 절절로 생기면 정말 제대로 지내는 제 일 것 같네요 . 고마운 맘을 절로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일 테니까요 형식으로 보면 형식이고 맘으로 보면 맘 아니겠어요
(2006-07-04 오후 2:36:13)
64
1970년대초부터 시중 불교예절 안내 책자에서도 절 한후 손바닥을 뒤집는 모습이 소개되더니 점차 보편화 되어 일타스님 꼐서 생전에 접족례라는 내용으로 용인 되는 말씀이 있기도 했는되 80년대 초까지 노장스님들의 절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아도 손뒤집 지 않았슴니다, 근래에는 젊은 스님도 ,거의 대부분 불자가 행하니 딱하기도 함니다. 이선생님 말씀 백번 지당하고 근거도 모호하고 보기도 행하기도 불편한 것 빨리 개선 되기를 바람니다, 재에서 절하는것 도 각양각색인되 우룡스님의 가르침이 타당 한되 더러는 스님히 일러도 말을듣지 않고 자기를 버릇대로 하곤함니다. 교계 지도층이 나서서 바로잡기를 희망함니다, 이선생님 말씀,정말 가슴이 시원 함니다. 건강하십시요 부산 김종학 드림
(2006-06-13 오전 9:45:09)
70
스님들에 대한 권위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글도, 승려에 대한 존엄성을 훼하는 글도 아닙니다. 찬찬히 잘 읽어보신다면 부처가 원래 얽메이지 말며 편안하게 살라고 설법하신 의미에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겉치레에 집착하는 것을 잘 지적하신 글입니다.단순히 절하는것에 대한 다배 관행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권하고 고압적으로 행하는 관행을 지적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불심과 신심으로 다배를 드리는것을 누가 나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좋은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2006-06-10 오후 12:40:57)
73
저는 제 스승님께 이렇게 배웠읍니다. 스님께 법을 청할때는 3배를, 그렇지 않고 그냥 예를 갖출때는 1배하라고요. 스님께서도 3배를 받으면 반드시 법문을 해 주셔야 한다고요. 이점은 종단차원에서 통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손을 뒤집어 받드는 자세가 왜색이라면 이것도 종단차원에서 통일하여 교육하면 좋겠읍니다. 조계종은 형식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미명아래 각 사찰, 문중, 스님 개인마다 염불도 가락이 각각인 것도 문제라고 생각되었읍니다. 절마다 가면 제마다 염불곡조가 다르고 심지어는 한 법당에서 염불하시는 스님들마다 각각 다른 고저장단의 염불을 하시는걸 종종 듣는데, 신도들이 집줃하기도 힘들고 따라하기도 힘듭니다. 이점은 천주교처럼 획일된 곡조(?)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 늘 해왔읍니다. 물론 오랜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이점은. 그건 그렇다치고, 절을 해 보신 분은 아마 그 효과(공덕?)에 대해서 잘 아실거라고 생각됩니다. 자기를 낯추고, 깊이 몰입하고 자기를 조복받기에 절하기가 얼마나 좋은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각각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다른 수행법을 주셨다는것은 우리 모두 아는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절을 하는것은 무관하다고 여겨집니다.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오랫동안 나태했었다거나, 분노 등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때,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을때 등 절 수행이 크게 도움이 되곤 했읍니다. 주변에서 절을 잘 안하는 분들을 보면 대체로 자기도 알게 모르게 교만심이 많은 분들인거 같읍니다.
(2006-06-09 오후 11:39:00)
70
아주 적절한 의견입니다. 우선 승단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1배씩 하도록 지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스님과 신도를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입니다.
(2006-06-09 오전 11:37:20)
69
절의 역사나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네요 절은 수행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부처님당시의 상황을 갖고 논리를 편다는 차체가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있는것이다 수행을 떠나서는 불교가 없다 성직자적 관점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것 같다 절은 정성껏 많이 할수록 업장을 소멸시킬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해보면 알것이다 엉뚱하게 신경쓰지 말고 수행하는 모습으로 불법을 보아야
(2006-06-09 오전 11:11:17)
72
모든분들 서로 논쟁을 하실일이 아닌것 같습니다..절하는 자체가 하심이기도 하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경배인데 삼배라는 형식에 매여야 할일도 없고 절하는 행위보다 마음의 존경심이 더욱 중요하지요. 그리고 받으시는 스님들도 재가불자를 존중하는 뜻에서 예를 갖춰 주시면 더욱 모양새도 좋고 실제로 존중 받으시게 될것 입니다. 신심이니 뭐니 그런 논쟁은 서로를 다치게 하는 칼날일 뿐입니다. 모두들 마음 푸시고 경배를 정중히 하고 싶으면 삼배를 그리고 스님의 말씀을 하심 하는 마음으로 순수 하게 받아 들이겟다는 자신과의 다짐으로 절을 하시면 좋겟네요. 스승과 스님등 성직자들이 재가자들에게 존경뱓지 못하는 이시대를 빨리 정화 시키고 고쳐야 겠지요 승가 재가 모두다 ..부처님을 닯으려 애쓰시면 될겁니다.
(2006-06-09 오전 9:34:38)
62
예! 절할때의 두손바닥을 뒤집는 형식은 고쳤으면 싶네요.인도의 늪지대를 지나시는 부처님께 손바닥위에 긴 머리를 덮어 빠지지 않고 건너게 하던 유래라는 말도 있지만 왜색이 다욱 맞는것 같애서 정말 관념없는 절 방식을 고쳤으면 합니다.
(2006-06-09 오전 9:15:34)
62
이원주님 의 박식한 의견은 알겠는데요 지금까지 전례 돼여온 기본의식을 바꾸자는 건가요 이원준님은 스님들에 대한 공경심이 얺는것 같네요
(2006-06-09 오전 8:33:11)
67
아주 시원한 의견이심니다.
(2006-06-09 오전 8:31:00)
70
한가지 더 스님들과 동급 하구싶으믄 전부 머리깍구 수행생활 해유 하라버지부터유 노인정 문닫은 날인가벼~
(2006-06-08 오후 10:27:03)
67
하라버지 절을 해보기는 햇쓔? 인제 스님들과 신도들을 동급화시킬라구요 하라버지는 스님들께 합장두 않쿠 왜려 인사받으려구 허지유, 내가누군디~허믄서 아뉴!
(2006-06-08 오후 10:24:38)
69
나무여래 일본의 잘못된 예절이 우리의 불교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필자의 주장을 모두가 점검해 보고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찾아보고 불교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가 조계종 중심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것도 잘못된 것이며 불교는 종파를 따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기독교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불교는 세계를 구할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 세계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성불하세요! http://blog.yes24.com/boochu 성불
(2006-06-08 오후 8:41:25)
69
우선 이원주님의 휼륭한 의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몇가지 말씀드리고 싶군요. 절은 자연스런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으로 줄여야 된다느니, 상호교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물론 서로가 알아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상호교례를 한다면 더 할 나위없이 좋겠지요. 존경받지 못할 승려에게는 절을 안 하면 되는 것이고, 절을 1배로 줄인다고 부담이 덜 되어서 불교를 더 많이 믿는다는 말도 옳지않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스님들은 절을 받지않을 뿐더러, 훌륭한 신자님들은 훌률한 스님들께 3배를 할려고 합니다. 그리고 스님들도 훌륭한 스님께는 3배를 합니다. 3배가 번거럽다고 생각한다면 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합니까 ? 수행도 번거러운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너무 편리한 것만 따르고 간편한 것만 찾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인위적으로 없애는 것도 옳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마저도 간편한 것을 찾는 다면, 종교를 믿지않고 수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간편할 것입니다. 서로가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을 높이는 자세가 절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물과 현상을 볼 때는 무엇이 중요하고 본질인지를 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절을 몇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고 봅니다. 자꾸 형식에만 집착하면 진정한 정신은 어디에서 찾으시려는 지요?
(2006-06-08 오후 8:21:24)
65
오랜만에 너무 가슴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예절을 간소화 하고 현실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정하였으면 합니다.
(2006-06-08 오후 5:48:30)
70
'불암산'님 말씀도 마음에 와 닿는군요.
(2006-06-08 오전 9:05:17)
63
절이 상대에 대한 공경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수행임은 불자들이 알고 있지요.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지요. 사람들이 불교에 발 들여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승려에 대한 지나찬 예절입니다. 부모에게도 드물게 한배하는데 머리 깎고 가사장삼 둘렀다고 3배하라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많이 배운 정치인이나 기업체 사장들 종교가 거의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자존심 높은 그들이 자신들 보다 배우지 못한 그리고 나이어린 승려에게 3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불교를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폭력적 종권싸움. 계를 어기는 많은 승려들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삼배하려는 마음이 일어날까요? 덕 있는 재가불자나 맹목적 신자외에는 3배 못합니다. 부처님 앞에서 108배, 1080배는 할 수 있어도 수양 덜 된 승려에게는 1배도 아깝습니다. 승려들이 계를 지키고 모범적 삶으로 청정해지면 사람들 마음도 변할 것입니다. 불교의 확산을 위해서는 불교 의식이나 예절이 바뀌어야 합니다.
(2006-06-07 오후 12:20:51)
71
'깨어있기'님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닿는군요.
(2006-06-07 오전 9:43:56)
73
불상에 공경을 표함은 그 불상 자체가 부처님이기 때문이 아니고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듯 스님한테 절하는 것도 절 받는 그 스님이 꼭 절 받은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행자를 상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 자신도 스님들께 한배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합니다. 오히려 받는 입장에서는 한배도 심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사석에서는 그저 봤으면 됐죠 그냥 앉으세요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절대 잘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절은 가장 먼저 내 마음을 다스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꾸밀 필요는 없다고 보네요. 그리고 손동작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부처님 받는 일에도 네 것 내것 따져야 하는 것인가 싶고 민족 전래적인 것이야 한다는 것도 불자로서의 사고로서는 꼭 바람직한것은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 정성드려 절을 많이 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2006-06-06 오후 10:41:59)
67
의식의 잘못됨이 한두가지인가. 영가 천도를 위한 우란분절 이 7월 보름으로 정해져 있는데도 칠칠재를 지내는 영리적 천도나, 수륙재는 수륙 양영을 말하는 것인데 굳이 물가에서 지내는 어리석음이나, 제사와 달리 좋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영혼이 사십 구일만에 다른 몸을 받는데도 구분없이 일괄적으로 사십구제를 천일간 지내는 까닭이나, 곡직없이 안티만 거는 사람들이나, 근거 자료없이 스스로의 말을 정당화하는 사람이나, 같은 것이리라.
(2006-06-05 오후 2:39:51)
64
중님 중님 하니 듣는 중님 기분 나쁘오??? 속인 속인 하니 듣는 속인도 기분 나쁘다오!!!!! 불법 2보에 똥칠하는 함량미달 중님들에겐 반배도 아깝소~.~
(2006-06-05 오전 11:56:55)
66
스님이 佛法僧의 3보를 대신하여 3배를 받는다고요? 해괴하구려. 佛을 대하여 1배로 경배하고, 法을 대하여 1배로 경배하고, 僧을 대하여 1배 함이 옳지 않겠는지요.
(2006-06-05 오전 11:26:14)
65
망상을 깨라 님. 당신이 스님이라면 정말 한국불교계 걱정이오. 어찌 스님만 계체가 있고 재가자는 없다는 듯이 말씀하오. 더구나 경과한다는 이런 협박성 망발을 할 수 있오! 당신이 깡패가 아닌 한에는 사과하시오.
(2006-06-05 오전 11:04:53)
74
스님에게 3배를 올리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스님들도 삼보를 대신하여 불자님들의 절을 받는 것입니다. 덕도 없는 스님(?)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 분이 덕이 있는지 없는지는 현상의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지 않을까요. 한산과 습득도 눈 밝은 이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계를 받은 스님은 그 공덕이 금생이 아니면 전생에라도 분명히 있는 것이며, 불자라면 분별심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기 전에 삼보를 공경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2006-06-05 오전 9:38:20)
62
오타 수정 : 아래 '신심이 잃어' --> '신심이 일어'
(2006-06-05 오전 9:20:48)
72
모처럼 좋은 기사가 나왔도다. 본래 거침이 없고 얽메이지 말며 편안하게 살라고 법을 설하였거늘, 어리석은 중생들이 겉치레에 집착하는 것 잘 지적하신 글이다. 모든 다배 관행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다배를 강권하는 관행을 지적한 것이다. 스스로 신심이 잃어 수행으로 3천배를 하고 1만배를 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2006-06-05 오전 9:20:07)
66
승려가 자신을 높여 스님이라 하는 것은 참 어색하다. 속인과 승려를 구분하여 보는 이원성에 매여있는 한 깨달음은 없다. 승려가 신도들 절 받고 자존심 높이는 벼슬인줄 아는가? 정신차려라. 그리고 부처님에게 절 많이 하는 것은 바람직한 수련이다.
(2006-06-04 오후 12:46:55)
69
스님은 계체가 있다.속인은 삼보를 비방하지 마라.경고한다
(2006-06-04 오전 4:11:20)
67
이원주씨, 몇 가지 지적, 특히 스님들께 1배만 하자는 제의는 아주 좋아요. 그러나 절을 많이 하는 것, 문제점이 많다고 했는데,,,논리가 빈약해요. 더 연구하세요. 종교는 학문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서 신앙심이 배제되면 곤란합니다. 지금도 수 많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108, 1080, 3000배를 하면서 신도님들의 신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절 많이 하는 것 필요없다고 하면, 신심도 없는 분이 괜스레 신심 떨어지게 헛튼소리 한다고 하기 쉽습니다. 자제하시길 ,,,, 내가 알고 지낸 분은 어린 자식을 졸지에 잃고 슬픔을 견딜 수 없는데 매일 조석으로 108배를 하며 슬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절 수행이 최고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찰 주변 곳곳에서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절은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수행의 한 방편입니다. 혹시 3000배를 해본 경험이 없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 3000배를 시도해 보십시오. 시심이 더욱 깊어지고 절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2006-06-04 오전 12:27:00)
69
어지럽군요. 청견 스님의 강좌 듣고 이제 바른 절 하는 법 배웠다 좋아하고 있는데.. 절 하는데 절을 할 뿐이지 무슨 이유가 있을런지요...
(2006-06-03 오후 10:19:11)
73
3배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는데 시기적절한 기사가 나와 기쁘다. 그리고 스님도 신도와 맞절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솔직히 덕도 없는 승려에게 3배 올리려면 덕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아무 생각없는 사람 외에는 하지 못한다. 하심을 강조하면서 승려들은 하심을 하지 않는다. 3배 받지 마라.
(2006-06-03 오후 10:00:46)
73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그런데 스님들은 원리 원칙을 배우지도 않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기본을 깨우칠 수 없다. 스님들이 나서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그만한 능력이 없다. 3배에서 더 늘리면 늘렸지 줄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다. 3배를 받아야 권위를 유지할 줄로 믿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아마 스님들이 이 문제를 고칠 것으로 기대하기 보다는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발원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나의 예측은 혜안을 갖췄기 때문에 틀림 없다!!!!!
(2006-06-03 오후 6:05:51)
74
불교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창피하고 어리석음에 몸둘바를모르겠다,왜놈들이 하는 손바닥 뒤집기 절을 의미도 모르고 지금껏 열심히 했으니.....
(2006-06-03 오후 5:29:16)
76
손을 뒤집는 것은 근자에 와서 생긴걸로 압니다. 스님들께서 신도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못해서 빚어진것이고, 이는 마침 전통인량 모 종단에서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행자교육시에도 가르치고 있는것으로 압니다. 이는 전통예법을 모르는 무식한 스님들의 잘못이니 하루 속히 고쳐주었으면 합니다.
(2006-06-03 오후 4:51:50)
77
어느 한종단에서 이루어 지고있는것을 모든종단이 그런것처럼 몰아가는군요...
(2006-06-03 오후 3:21:07)
72
수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재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그런데 이상한일이 다름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 영전에는 2번 절을하고 살아있는 젊은 스님에게는 3번 절을 하라니,,,나는 절을 하지않고 절을 나왔다 그후9홉번 더 가야 된다고 했지만,나는 불참하였다.우째 그런일이 있을수 있는가,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에게는 2번 절하고 젊은 중에게는 3배를 한단말이냐? 그런 되먹지 않는일은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 늙은 어머니는 중에게 3번 절하고 중은 염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절을 받는 작태는 한심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2006-06-03 오후 2:50:20)
67
이원주님의 말씀에 근거가 미숙하다. 좀더 연구하고난 다음에 발표했으면 한다.
(2006-06-03 오후 1:32:41)
77
스님이 무슨 벼슬도 아닌데 우리나라 스님들은 마치 대통령이라도 된듯양 신도들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과 한심함을 느낀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스님에게 부처님처럼 3배를 하는 관행이 그런 태도를 조장해왔다고 보는 차에 재가불자님의 문제제기는 이땅의 불교를 바로잡고자 하는 당연한 문제제기로 적극 환영한다. 물론 신도위에 군림해오는데 익숙해온 스님들과 그 스님들의 끄나풀 신도들의 조직적이고도 무차별적인 박해가 예상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불퇴전 신심으로 불교바로세우기에 나서시기를..
(2006-06-03 오후 1: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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