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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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
[큰스님편안하십니까]동성 스님(내장사 선원 조실)
세수 아흔 여덟. 세월도 기억력도 숱한 시간 속에 산화했다. 무심함이 움푹 패인 주름살에 웅크렸다. 하지만 100세를 2년 앞둔 수좌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 눈빛이 단번에 시간의 티끌들을 말끔히 걷어냈다. 두루뭉수리 없이 고갱이만 내어보였다.

평생 이 길을 걸었다. 부처님이 계신 법당. 동성 스님은 구도의 길에서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세월의 흐름만큼은 거스릴 수 없다면서..


정읍 내장사 조실 동성 스님. 스승과의 인연에서 수행자의 ‘살림살이’를 풀어놓았다.

“출가하기 한 해 전, 그러니까 스무 살 때였어. 스님에게 ‘부모 태에서 나기 전에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지. 그러니 스님이 ‘가까이 오라’며 ‘귀를 내게 대라!’고 하시더군. 볼에 댔지. 그런데 갑자기 스님이 큰 소리를 질러, 깜짝 놀랐어. 그러곤 대뜸 ‘알겠느냐?’고 해. ‘모르겠습니다’고 했지. 그러면서 ‘하. 둔한 사람이로군. 나가거라!’고 하시더군. ‘거참. 이 노인네 봐라’ 기가 찼어.”

요양하러 금강산에 들렀던 동성 스님. 스승의 그 말뜻을 알 턱이 없었다. 분한 마음에 오대산 상원사에 눌러앉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목 살이를 시작했다. 낮에는 땔 나무를 구하고, 저녁에는 귀동냥을 하며 스승의 방 앞을 서성거렸다.

내장선원 앞에서 앞산을 바라보고 있는 동성 스님.


“한암 스님이 스승이야. 참으로 엄격한 분이었어. 웬만해선 쓰다 달다 군소리 한 마디가 없던 양반이었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가 27년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로 유명하잖아?.”

스승은 얄밉고도 서운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이 동성 스님에게는 약이 됐다. 3개월간 부목을 하고, 곧바로 공양주, 채공, 원주 살이를 하면서 수좌의 기질이 다져져 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0년간 스승의 밑에서 살면서 수행자의 길을 차근차근 밟았다.

“스님은 늘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고 강조했어. 깨진 수레는 가질 못하고, 늙으면 수행하지 못한다는 의미지. 스님의 이런 가르침을 지니고, 나는 지금까지 평생 수행해왔지.”

마음의 업경대를 지니고 살라고 법문하시는 동성 스님


스승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다. 그럼, 스승을 밑천 삼아 수행을 어떻게 했을까? 동성 스님이 일궈온 살림살이가 궁금해졌다.

“어느 해인지 모르겠어. 원주에게 쌀 3되를 타가지고 오대산 서대에 들어갔지. 머리와 수염도 깎지 않고 마치 원시인과 귀신 같이 오직 화두만 잡았어. 시계가 없으니 시간도 몰랐지. 밤에는 불도 켜지 않았어. 밤이나 낮이나 한번도 육신을 바닥에 대고 누워본 일이 없었지. 낮에는 머루 잎과 솔잎으로 배를 채우며 공부에 전력하고, 밤에는 앉아 화두정진으로 밤을 새웠어.”

느릿느릿한 동성 스님의 말이 빨라졌다. 자기와 벌였던 처절한 한판 승부에 핏대를 제대로 세웠던 수행담이 흥미진지하게 이어지면서, 기자의 귀를 쉴 새 없이 잡아 당겼다.

“하루는 갑자기 시루떡 냄새가 나길래, 예전에 어머님이 떡을 해줬던 생각이 나 눈물이 나더군. 다시 생각하니 화두는 어디가고 망상으로 자성으로 흐리게 되더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밖에 나와 산책을 한 후, 방에 가서 단정히 몸을 정좌하고 공부에 매달렸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닭이 홰를 치며 꼬끼오 하고 울더군. 또 밖에서 탕하고 큰소리가 났어. 마치 무서운 꿈을 깬 듯, 칠흑 같은 밤에 백천일월이 쏘는 듯하대." 그 순간,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걸까? 동성 스님은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오도송을 읊어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아! 어려움이여, 쉽고 쉬움이여!
무엇이 어려우며 무엇이 쉬운고.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도다.
천지(天地)는 동근(同根)이요. 세계(世界)는 일가(一家)로다’

알듯 말 듯한 깨달음의 게송. 그 뜻을 묻기 무섭게, 스님은 곧장 스승과 벌였던 법거량 이야기를 했다.

“조실스님 방에 곧장 들어갔지. 한암 스님이 ‘누구냐’고 해. 그래서 얼른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지. 조실스님도 손가락을 하나 세우시더군. 재빨리 내가 ‘천지동근(天地同根)이요, 세계일가(世界一家)로다’라고 외쳤어, 조실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어. 그러더니 조실스님이 벼루를 내놓으며 먹을 갈라하기에 조용히 갈았어. 좀 있다가 종이와 붓을 내어 글을 한 줄 써줬어. ‘벽력일성(霹靂一聲)에 효천명(曉天命)이요, 장부일할(丈夫一喝)에 성우주(惺宇宙)’ 라며 술인(戌寅) 음 8월 14일 날짜까지 기록하고, 또 봉정(峯正)이란 법명까지 지어줬어.”



스승은 그렇게 제자를 인가했다. 그런데 동성 스님은 그 글귀를 한암 스님 앞에서 크게 읽고는 성냥을 갖고 밖에 나갔다. 그리고 곧장 그 종이에 쓴 글을 불살라버렸다. 왜 그랬을까? 동성 스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써준 것을 기억하면 그 뿐이지, 글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글씨가 뭐가 필요해.”

그래서 일까? 동성 스님은 그 흔한 휘호 하나 없다. 붓과 벼루를 곁에 두지도 않는다. 철저히 불립문자의 이치만 수행에 녹여놓았다.

오후 내내 동성 스님의 치열했던 살림살이를 듣고 있을 즈음, 궁금증은 요즘 스님의 하루 일과 이야기로 이어졌다.

“늙으니 잠이 없어졌어. 졸릴 때 자고 일어날 때 일어나. 그래도 새벽 3시에는 눈을 뜨지. 일어나면 곧장 <금강경>을 읽고, 방에서 좌선을 해. 화두라고 들 것 없이 그냥 참선을 하지. 요즘에는 운동도 해. 경내를 돌며 포행을 하지. 걷는 게 운동이 아니겠어. 건강비결이라면 그것이 건강비결이지.”

내장선원 조실 방을 물러나와 마루에 잠시 앉았다. 연두 빛 단풍나무가 한 눈에 안겼다. 경쾌했다. 단풍 빛이 깃든 내장사의 가을보다 한결 생동적이다. 백수의 바라보는 노선사의 얼굴빛이 막 피워 오른 새싹의 단풍 잎 같았다.


▥동성 스님은?

고향은 충남 논산. 1908년 生. 속가 부친 꿈에 향적산 국사봉 밑 우물에서 빨간 아이를 업고 오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호가 국봉(國峯)이다. 1934년 한암 스님을 은사로 입산ㆍ출가했고, 박한영 스님의 법제자다. 1945년 오대산 서대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후 6년간 생식하고, 7년간 장좌불와를 했다. 불교정화시 강원종무원 재무부장을 역임했으며, 삼척 청련암, 건봉사, 대흥사 주지 등을 지냈다. 현재는 정읍 내장사 조실, 대천 배달정사 회주로 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1978년 지은 <보기출발록(譜己出發錄)>, 한시집 <현해장서(玄海藏書)> 등이 있다.



▥동성 스님의 가르침

마음공부에는 출ㆍ재가가가 없습니다. 선수행의 목적은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의 이치를 깨닫고 견성ㆍ성불하는데 있어요. 나고 죽음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단련하고 몸에 배도록 연마하며, 몸의 연마가 잘 돼 자유자재하게 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인 것입니다. 어떻게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 있겠어요.



장군이 칼을 쓰려면 많은 수련을 쌓아야 그 어떤 적도 대치할 수 있지요? 이렇듯 ‘생사 없음’을 몸으로 체득하고, 많은 수행을 닦은 후에만 생사를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국의 방거사는 부인과 딸, 아들 둘과 함께 많은 재산을 헌 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생사 없음’을 자유자재로 쓰고 갔습니다. 아들 둘은 친구 집 ‘머슴’으로, 부인은 아들이 머슴살이하는 친구 집에 공양주로, 딸은 방거사와 함께 살면서 자유인의 삶을 살았지요. 이후 딸은 홀연히 방거사 곁을 떠났고, 방거사는 지방 고을 수장인 자사의 무릎을 베고서 떠났지요. 부인은 방거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떠났고, 아들 둘은 밭일을 하다가 떠났지요. 그야말로 방거사 가족 모두가 본래부터 ‘생사 없음’을 제대로 알고 체득하며 쓰고 갔던 것이지요.

우리가 부모에게 나기 전에 무엇이었을까요? 코 구멍에 들락날락하는 이 놈만 없으면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가져다 내버리지요.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태어남은 본래 태어남이 없는 것이요, 죽는 것도 본래 죽은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생사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해요. 이것이 ‘지무생사’입니다. 이 몸뚱아리를 끌고 다는 것은 불생불멸이에요. 그런 줄을 알면, ‘체무생사’가 돼야 해요. 생사 없음을 체득해야 한다는 소리지요. 이를 얻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이치를 알고 체득해 견성(見性)을 했어도 보임(補任)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았어도 그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것처럼, 견성을 했어도 보임을 잘해야 하지요. ‘용무생사’의 이치를 잘 굴리는 것이 보임이지요.

심우도(尋牛圖)에서 말하는 가르침과 같아요. 소를 찾아(尋牛)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見跡), 그 소를 보고서(見牛) 얻지요(得牛). 그리고 그 소의 코를 뚫어 길을 들이지요(牧牛). 이 때 길들지 않은 소가 도망가지 않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죠. 우리 마음자리도 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 도망가는 것처럼, 길들지 않은 소보다 더 하잖아요. 그 놈을 붙잡고 늘어져야 합니다. 소를 길들이면, 붙잡고 있지 않아도 가만히 있겠지요. 그럼 가다가도 ‘워~워~’하면 서게 돼요. ‘지무생사’는 소의 발자국을 따라 소를 찾아가는 것과 같고, ‘체무생사’는 길들지 않은 그 소를 길들이는 것이고, ‘용무생사’는 길든 소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공부해서 견성하는데 무슨 머리 깎고 안 깎는 것이 중요하나요? 방거사의 다섯 가족이 생사의 이치를 알고 홀연히 떠나갔듯이, 재가불자도 생사 없음을 알고 체득하면 자유자재하게 이 이치를 쓸 수 있어요. 껍데기만 중 복색만 한다고, 다 중이 아닌 거예요. 마음이 중이 돼야 하지요. 이 공부는 병신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절에 가서 출가한다고 공부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집에 있다고 공부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요. 마음공부를 하는데 출ㆍ재가가의 구분이 없지요.

그럼, 재가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거사 식구들은 처음부터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밭일 하고 뗄 나무 구하고 일하면서 수행을 했지요. 마음공부를 하는데 출가자니 재가자니 하는 구분은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만약 방거사 가족이 출ㆍ재가를 구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생사 없음’의 이치를 알지도 체득하지도 쓸 줄도 몰랐을 겁니다. 수월 스님은 일생을 어디에 가든지 ‘소승이 부목하겠습니다’며 일하면서 수행했어요. 평민으로서 황제에 오른 중국의 순치 황제도 자리에서 물러나 한 사찰에서 부목을 자청했지요. 수행은 이처럼 수월 스님이나 순치 황제가 절에서 나무 베고 장작 패며 무념행을 실천하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지요. 일상사가 그대로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재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생사 없음’을 알고 체득하며 쓸 수 있을까? ‘유정무정개유불성(有情無情皆有佛性)’이라. 동물이든 식물이든 여기 앞에 있는 찻잔이든 무엇이든지 생명은 있어요. 그래서 과학자들도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인식론에 그치고 말았어요. ‘아는 놈이 무엇인가’에 머무른 것이지요. 또 4차원 세계를 보면 생사가 없다고 과학자들이 말하지요. 하지만 아는 것까지는 안 돼요. 체득해야 돼요. 그러려면, 먼저 알아야 해요. 소를 붙잡아야 해요. 소를 붙잡듯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이 이치를 알아 견성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죠. 보임을 해야 해요. 소를 길들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즉 ‘용무생사’가 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질문 하나를 할까요? 삼천대천세계를 내다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체과학자가 저 멀리에 있는 별의 거리를 계산해 10억만년이라 했다고 칩시다. 빛이 그 별까지 간 거리를 셈한 것이지요. 그럼, 가장 크고 제일 빠르고, 둥근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빛이 별까지 달려간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왜 그런 줄 압니까? 그 과학자의 마음이 그 별에 도달한 겁니다. 과학자의 마음이 즉각 거기에 도착한 것이지요. 삼천대천세계를 즉각 내다보는 것도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무생사, 체무생사, 용무생사’의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천하의 땅을 정복한 중국 진시황제는 불사약을 구하려 했지만 못 구하고, 결국 2대째에서 망했습니다. 하지만 평민으로 출발한 순치 황제는 어떻습니까?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절에 들어와 부목 살이를 하다 견성을 했잖아요. 누구의 삶이 훌륭합니까? 나라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 생사를 초월한 순치 황제가 올바른 삶을 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가불자들도 순치황제와 같은 마음씀씀이를 배워야 합니다.

죄는 삼독심(三毒心)에서 짓습니다. 그 삼독심은 번뇌 망상에서 나옵니다. 진심(嗔心)이 가장 마음에서 해롭습니다. 공부하는 수좌들이 진심 한번 잘 못 내면, 몇 해 동안 해온 공부를 한꺼번에 까먹는다고 합니다. ‘일사진심(一事嗔心)이면 수사보(受蛇報)’라 했지요. 한번 성냄은 그것으로도 독사의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지요. 순간순간에 과보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안 지으면 경찰서나 재판정에 갈 일이 없겠지요. 진심을 안 내고 마음을 잘 쓰면, 명부전 염라대왕에게 끌려갈 일이 없잖습니까.

그러니 불자들은 ‘마음의 업경대(業鏡臺)’를 지내고 살아야 합니다. 업경대는 그간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죠. 업경대는 지나온 세월을 되돌이켜 볼 수 있게 합니다. 염라대왕이 죽으면 ‘업경대를 가져오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을 비춰 볼 수 있는 업경대를 잘 지니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글=김철우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 |
2006-05-27 오전 10:56:00
 
한마디
그게 앵무새란 거지. 오도송도 있고 어떤 경우엔 더 그럴 듯 하지. 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선방수좌들도 몰라)에선 알지. 법이 없다는 걸. 요즘엔 다들 열반송도 짓는다. 깨달음도 평준화되어 가는지. 아랫님은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어느 대목인지 짚어 주십시오. 이렇게 선지식이 난립하는 것은 불교신자들 탓도 크다.
(2006-05-31 오후 8:32:55)
79
잘 읽어 보세요. 깨침의 경계도 있구, 보임도 있구, 살림도 있습니다. 진짜 선지식이지요...요즘 사람들 정말 모든걸 알려구만 하더군요...
(2006-05-31 오후 4:50:01)
79
이런 식이면 대체 깨달은 분이 얼마나 된단 말입니까? 이 작은 나라에--;; 한암스님이 써 준 글귀가 전법게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한 평생 절밥 먹고 수행자로 살았으면 됐지. 한국불교의 그 숱한 큰스님들, 넘쳐나는 큰스님 인플레. 기자분도 이런 기사 쓸 때는 신중하길 바랍니다. 앉아 죽으면 무조건 좌탈이요, 인가받은 거고 정말 큰스님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법이 이렇게 어지러우니 2005년 종교인구센서스처럼 외래종교에 밀리는 데엔 다 이런 저런 까닭이 있고 누구도 자유롭진 못한 것이다.
(2006-05-31 오후 1:37:44)
76
죄송, 밑에'한장의 포교사'가 아니라 '한 명의 포교사'를 오타한 것입니다. 정정 프로그램이 없어 조금 답답함다.
(2006-05-29 오후 3:33:23)
75
큰스님 법문 잘 봉독 하였습니다. 스님을 뵌지도 없고 지면을 통해 처음이지만 마음은 편안하게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 한 장의 신문은 한 장의 포교사라는 말이 통하는 것이지요.
(2006-05-29 오후 3:30:04)
79
동성스님의 좋은 법문 잘 읽었습니다. 마음의 업경대를 가지고 일상사에서 정진하라는 말씀 깊이 새기고 정진해 나가야겠습니다.
(2006-05-28 오전 11: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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