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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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줄은 새끼줄일 뿐…뱀이라 소설 쓰지 말라”
고우 스님, 조계종 중신회 ‘육조단경’ 강좌 입제식서 법문
“<육조단경>의 고갱이는 무아(無我)와 중도(中道)다. ‘내가 있다’는 이기심으로 새끼줄을 뱀이라 착각 말라. 새끼줄을 새끼줄로 보는 것이 깨침이다. 양변을 여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럼, 시공과 종교를 초월한 이 존재원리를 체험할 것이다.”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은 <단경>의 종지(宗旨)를 이렇게 설명했다. 밝은 지혜로 비춰보면, 단박에 존재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정수가 확연히 드러나는 이치를, 스님은 ‘새끼줄과 뱀’의 비유를 들어 간명하게 내보였다.

<육조단경> 강좌에 나선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


5월 16일,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김의정)가 불기 2550년 하안거를 맞아 마련한 ‘재가불자를 위한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입제식에서 고우 스님은 <단경>이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1시간 넘게 강의했다.

스님은 이날 강의에서 “<단경>에 담겨진 내용에는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육조 스님이 몸으로 체험한 것을 밝혀져 있다”며 “그 체험을 담은 <단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현재 지구상의 종교, 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한 갈등을 치유하는 선적인 처방전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5월 16일 서울 한국불교역사기념관 공연예술장에서 열린 고우 스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입제식.


스님은 특히 “육조 스님이 발견한 존재원리를 아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그것을 체험해 안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냥 이해하는 것을 정견이라고 말했다. 즉 <단경>을 통해 깨달음으로 간다면 더 이상 좋은 것이 없고, 설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정견을 갖춰 생활에 1%든 10%든지 적용한다면, 부처님 법대로 안하면 오히려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스님은 이와 함께 “<단경> 공부에는 출ㆍ재가가 없다. 육조 스님은 형상, 즉 껍데기로 출ㆍ재가를 나눈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출ㆍ재가를 나눴다”며 “그 말속에는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는 선어록이자 경전”이라고 강조했다.

강좌에 앞서 백련암 주지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과 <육조단경>’을 주제로 특강에서 “현존 단경본은 대개가 ‘덕이본’인 상황에서 성철 스님은 단경의 관심을 ‘돈황본’으로 전환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며 “스님으로서 직접 최초로 있는 그대로 토를 달고 <단경>을 연구ㆍ직역한 ‘돈황본 육조단경’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원택 스님은 특히 덕이본과 돈황본의 번역상의 차이점을 상세히 설명하며, 그 사례로 성철 스님이 강조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번역을 강조했다. 즉 대부분의 학자들은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고 번역돼 있다는 것. 그런데 성철 스님은 이 번역이 잘못됐다고 제시했다. 성철 스님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해야 혜능 스님의 참뜻과 계합된다고 역설했다.

원택 스님은 “<단경>의 핵심은 ‘그 마음을 낸다’가 아니라 ‘그 마음이 난다’라는 것이다. ‘응무소주’와 ‘이생기심’으로 두 문장에서 나눠야 해석해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난다’고 해야 올바른 해석이다”아라며 “‘자성을 낸다’고 하면, 그 마음이 객관화되고 자신을 주관화된다. 그 마음은 스스로 저절로 나는 것이지, 내가 있어 마음을 내고 마음을 주관화ㆍ객관화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내는 마음’과 ‘낸 마음’이 둘이 된다. ‘그 마음은 둘이 아니다’는 의미다. 이 구절은 ‘마땅히 머무는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황본 육조단경> 입재식에 참석한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제주 원명선원장 대효 스님 원택 스님(사진 왼쪽부터)


한편 이날 강좌에서는 제주 원명선원장 대효, 백련암 주지 원택,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 중앙신도회 김의정 회장, 신도회 부설 인재개발원 박윤흔 상임이사, 기획예산처 변양균 장관, 한국외교협회 이창범 회장, 김상철 前 콜롬비아 대사 등 사부대중 3백여 명이 참석했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김의정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조계종도들이 마땅히 의지할 전등어록인 <육조단경>은 마음의 본성을 바로 깨닫는 데 있는 만큼, 재가불자들이 그 참뜻을 더 분명히 알고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중앙신도회 차원에서 재가불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열린 고우 스님의 <육조단경> 강좌는 매월 셋째주 화요일 오후 7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에서 열리며, 2시간 강의와 30분 질의문답으로 이뤄진다. (02)733-7277


다음은 고우 스님 <육조단경> 강의 전문.


선불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오직 우리 존재 실상만 문제가 된다. 그것이 깨달아지고 밝혀내려 했던 말씀이기에 여기에는 종교도 인종도 이데올로기도 민족도 모두 초월한다. 그래서 타종교인이라도 해도 <단경>에 담겨진 내용에는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라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육조 스님이 몸으로 체험해서 그것을 밝혀놓은 책이 <단경>이다. 또 그 내용이 체험한 자기 존재에 대한 내용이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준다. 여기에 <단경>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과학에서도 이 우주에 있는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그 연구 목적은 실상을 알기 위해서다.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은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실상을 체험하고 나서 그분들이 알게 되고 느끼게 된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육조스님이나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가 우리에게 평범한 사실을 규명한 것이라면, 1300년 된 단경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면, 육조 스님이 발견한 세계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주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이 지구상에 전쟁은 없다. 다툼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 갈등도 이 내용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하루아침에 다 치유할 수 있다. 이 점이 <단경> 강의에 나선 이유 중에 하나다.

물론 갈등하고 대립하고 이렇게 싸우는 그런 일들은 어느 나라에든 사회에든 가정에든 다 있다. 더 축소해보면, 자기와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심한 것 같다. 조선조 500전간 자신과 뜻과 맞지 않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한 적이 있다. 관에서 시체를 꺼내 목을 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원인이 돼 일제에게 36년간 핍박을 받는다. 그만치 했으면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해방 후 납북이 갈린다. 남쪽에서는 어떠했는가? 또 오손 도손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또 난데없이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앞으로 어떤 말을 만들어내 또 다른 갈등이 생겨날지 모른다. 이런 것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과 대안이 <단경>에 들어 있다. 그래서 <단경>의 공부는 공장을 수많이 짓고 생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해결의 길을 <단경>에서 찾고자 한다.

여기 있는 분들도 작게 크게 갈등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간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인간세계에서 나쁜 일과 좋은 일이 계속 반복한다. 그 어떤 좋은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역기능이 다른 사회보다 심하다.

정말로 시민운동 같은 것을 선을 통해 일으켜, 우리 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갈등대립을 없애는데 앞장서는 과정과 운동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선센터’ 개원을 고민 중이다.

요즘 노사관계에서도 1조원이 손해가 난다고 한다. <단경>의 핵심사상만 배운다면, 갈등과 대립 투쟁하는 노사관계가 변할 것이다. 사실 노동조합이란 운동단체가 필요 없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다.

<단경>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갠지스 모래수와 비교한다. 그 수만큼의 보물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보다도 부처님의 한 말씀을 나눠주는 것만 못하다. 자신의 몸을 모래 수만큼 나퉈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해도, 부처님 한 말씀을 이해하고 불법을 전하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국불교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스님들이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정말로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단경>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단경> 공부에는 출ㆍ재가가 없다. 육조 스님은 형상, 즉 껍데기로 출ㆍ재가를 나눈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출ㆍ재가를 나눴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을 믿고 그 가치를 알고, 그런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고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출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형상은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 장삼을 입고서 부처님 말씀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출가자가 아니다. 그 말속에서는 재가자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담겨있다. <단경> 공부는 전문가가 하는 공부라 생각하지 말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공부라 여겨야 한다.

본격적으로 강의에 들어가겠다. 먼저 <단경>의 머리말 ‘서언(序言)’을 보기로 한다.

원문을 번역해 보기로 한다.

‘혜능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다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비구, 비구니, 도교인, 재가자 등 1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의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30여 명과 유교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시기를 함께 청했다.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게 했다…(생략)…’

‘서언’에서는 <단경>을 설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마하반야바라밀다법을 설했다는 부분이다. 이를 안다면 <단경> 공부를 다 끝낸 것과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강좌에서 하기로 한다. 여기서 ‘비구, 비구니, 도교를 배우는 사람, 재가자, 유교 선비와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대사에서 법을 청했다’는 것을 통해 다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중국에는 개신교는 없었다. 유교 도교 불교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말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그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육조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 왔다는 점이다. 그 말은 유교인 도교인 비불교인 비신자 재가인도 이 <육조단경>을 듣게 되면, 종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자유롭게 행복하게 된다.

선불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수녀님 신부님들이 참선을 많이 한다. 물론 어느 부분에서 조금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선이 좋은 것을 알다. 여기서 도교인 불교인 재가인 유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단경>을 들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또 <단경>의 내용이 모든 종교를 초월해 이해될 수도, 깨달을 수도 있다는 의미와 사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소주 좌사 위거란 사람이 육조 제자 중 법해 스님에게 그 내용을 기록하게 해, 당대뿐만 아니라 먼 후대 사람들에게도 이를 듣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해 내용을 모아서 지금까지 유행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종지를 계승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존재의 원리와 마하반야바라밀다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익한 것임을 말하고, 끊이지 않고 전해지도록 기록하게 했다. 육조 스님이 <단경>을 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종지는 무엇이고, 마하반야바라밀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 존재원리의 내용이다. ‘존재원리 내용은 무엇인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듣고 있는 그 존재원리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년이든 천년이 가든 이 존재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1400년 전의 육조 스님이 발견한 그 존재원리와 지금 현재 우리가 말하고 듣고 있는 존재원리는 같다. 절대 다르지 않다.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존재원리는 마음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만든다. 희로애락도 과학도 만든다. 마음이 안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존재원리는 알게 되면, 모든 일에 역기능이 그냥 없어지고 순기능만이 지속된다. 이것을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중국의 운문 스님은 ‘매일매일 좋은 날이다’고 표현했다. 하나만 알면 만 가지를 알게 된다. 역기능은 없어지고, 남게 되는 순기능만 지속되는 것이다.

처음 출가할 때. 과연 이런 생각이 가능할까? 의심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대로 안 하면 더 괴로움을 경험했다. 이는 모든 사회의 갈등 대립 투쟁 전쟁을 모두 종식시킬 수 있다.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 되고,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대립 갈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달라이 라마가 ‘지혜로운 이기심’이란 말을 쓴 적을 신문지상에서 봤다. 사실 이기심 때문에 고통이 생기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기심을 없애라고 한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이기심에 ‘지혜로운’이란 말을 썼다. 사실 사람들에게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고,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가끔 ‘지혜로운 이기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존재원리를 알게 되면 이 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존재원리는 시간과 상관없이 변함이 없다.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을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과거에는 교통도 통신도 나쁠 때, 국소적으로 포교했지만 지금 시대는 무척 발달됐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운동을 좀 확대해서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매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이든 그 저변이 확대가 되면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종지를 배워 생활화하는 것이 상구보리다. 이를 사회화하는 것은 하화중생이다. 그래서 ‘상구보리하화중생’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이웃 사람에게 불교를 말하면 그것이 사회화다. 그것을 자신의 생활과 적용하면, 생활화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 발견한 이 존재원리를 아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을 체험해야 아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냥 이해하는 것을 정견이라 한다. <단경>을 통해 정말로 깨달음으로 간다면 더 이상 좋은 것이 없고, 설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정견을 갖춰 생활에 1%든 10%든지 적용한다면, 부처님 법대로 안하면 오히려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런 질문이 들어온다. ‘사회가 안 그런데, 나 혼자 그러면 손해 보지 않는가’란 질문이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다. 노력하면 ‘아 이렇게 하는 것을 참 좋은 것’을 느끼게 되면, 삶의 보람과 행복감을 갖게 된다. 그것을 이웃에게 말하고 싶어도 안달이 날 것이다. 해주는 것 자체가 자기 수행이 된다.

그래서 포교가 수행이고 수행이 포교라고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단경>을 배워 일당백으로, 자기 수행도 열심히 하고, 이를 사회화하는데 노력해 달라.

서언은 <단경>을 설한 동기를 설명했다,

다음은 육조 스님이 스승을 찾아간다. 육조 스님이 <단경>을 설한 목적은 종지를 설하고, 이 가르침을 후대에까지 계승ㆍ발전하기 위해서다. 그럼, 그 가치를 어떻게 해서 얻게 되는는가. ‘심사(尋師)’ 부분이 나온다. 스승을 찾아간 동기가 나오는 부분이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해서 마하반야바라밀다법을 생각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뜻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는 모든 이가 백지 같이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마하반야바라밀다법’과 똑같은 것이다. 앞서 말한 이기심. 이를 일으키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다.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등 양변의 여읜 것을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하란 엄청난 큰 진리에는 이분법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 불교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 평생을 공부한다. 대답이 다양하다. 존재원리 하나를 놓고 대승이든 소승이든 말은 달라도 참뜻은 같다. 내용은 같다. 다양한 표현도 좋지만 통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중도(中道)’로 통일했다.

비유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두운 곳을 가다가 기다란 새끼가 있다. 이기심으로 인해, 기다란 새끼를 경험에 의해 뱀으로 본다. 그 이기심이 착각을 일으킨다. 기다란 것을 새끼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뱀으로 봐서 문제가 생긴다. 그때부터는 내 마음에서 소설을 쓰게 된다. 망상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앞서 ‘깨끗한 마음으로 들으라는 것’도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반야심경>에서 몸과 정신이 공함을 알면 모든 고에서 벗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고의 원인은 내가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새끼와 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뱀으로 봤기에 고행이 시작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끼를 보고 고뇌하다가 밝은 불로 그 새끼를 보면, 정말로 황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새끼를 뱀으로 착각하는 것이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왜 무아라고 하는가? 존재원리를 무아라고 하는가? 연기이기 때문에 무아다. 그럼 연기는 무엇인가?

오늘은 무아까지 말한다. 아무튼 새끼를 뱀으로 보는 착각으로 공포심과 증오심이 일어난다. 불을 비춰보니 뱀이 아니라 새끼더라. 이것이 깨침이다. 그렇게 되면 <반야심경>의 ‘도일체고액’이 된다.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갈등과 대립, 전쟁 등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무아는 새끼를 새끼로 보게 위해서 <단경>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무아다. 왜 무아냐? 연기이기 때문에 무아다. 그럼 연기는 무엇인가? 다음 시간에 무아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다.

@질의응답
질문 : 불교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아를 깨달아야 한다. 살면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들어야 하고,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상황에 의해 시시각각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을 선적인 관점에서 많이 듣고 있다. 두 가지가 어떻게 생각하면, 상반된 것 같다.

대답 : 위빠사나 할 때에 깨어있으라 한다. 선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깨어있는 것도 공부하기 위한 수단이다. 위빠사나에서는 사과를 거쳐 아라한과를 가는 길이 있고, 또 사마타에서는 한 가지 대상에 주시하면서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선종은 위빠사나든 사마타든 간화선이든 그것은 수단이다. 그럼 그 수행을 통한 목표를 가는데, 그 수행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목표는 같다. 말과 쓰임은 다양해도 내용은 같다. 왜냐하면, 간화선에서 삼매에 들어가면 적적성성(寂寂惺惺)이란 심리상태로 들어간다. 성성히 깨어있는 상태다. 성성이 지속이 안 되면 적적이 지속이 안 된다. 반대로 마찬가지다.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적은 양변을 여읜 자리다. 그 자리가 적적성성이 완성돼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면, 그것은 도인이다. 간화선에서는 적적성성이 돼가지만, 그것은 미완성 삼매라 한다. 위빠사나도 깨어있는 것을 성성해있는 것, 그것을 지속되도록 이어지도록 노력한다. 그 성성이 지속이 되면 적적도 함께 지속이 된다. 영가 스님이 <영가집>에서 위빠사나를 성성적적으로, 삼마타를 적적성성으로 번역해 놨다. 그래서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수행이 단계적이다. 선은 단계적이지 않다. 선이란 브랜드가 남방불교와 다르다.

<단경>은 조사선의 근원이다. 여기서부터 조사선이 흘러나온다. 서방정토극락을 설명하는데돈황봉 <단경>에서는 “여기서 보여줄 테니 볼 것이 있느냐?”고 묻자, ‘악!’ 하고 만다. 선을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다. 현실생활을 철저히 담아낸다. 선불교만큼 현실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없다. 봤으면 그만이다. 강의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없다.


글ㆍ사진=김철우 기자 |
2006-05-17 오전 9:21:00
 
한마디
고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주장하시면 그건 바로 성철스님의 법맥과 일통하며 돈오점수 사상을 주장하시는 분이 아니시네요..어떤 사상이 되었건 제가불자가 따질 일을 나니지만 돈오돈수를 주장하시면 오매일여가 여여하시다는 말씀인데 참 존경스러운 분이네요..
(2007-04-30 오전 12:29:41)
65
원택스님에게 여쭙니다. 앞구절을 보면 색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해야 할까요? 색에 주하여 마음이 나지 말고가 맞을까요? 주체가 주체가 아닐새 이 이름이 주체라 하는 말은 왜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설법을 하여도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것과 설법할 자가 없어 설법이 나는 것과 그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2007-04-04 오후 1:36:14)
60
저의 두번째 댓글에서 應無所住而生其心의 핵심은 無所住 라 적었었습니다. 머무지 않는다는 것은 갈애에 의한 취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마음을 낸다" 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마음이 난다" 는 자신의 마음 작용을 알게 되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겁니다. 한문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한가지로 일치하겠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사실. 이 두가지 해석은 견처를 드러냅니다. 드러나는 것은 마음작용입니다. 즉 用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드러내는지, 아니면 드러나게 하는 건지를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라는 부처님의 교설이 있습니다. 스스로 드러낸다하는 것은 연기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연기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6-05-22 오후 2:52:04)
78
지나가다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절로 마음이 나는' 과 '마음을 내는'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오히려 더 뭔가 '주체'(옳지 않은 용어라고 하셨습니다만, 제 뜻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은지요? _()_
(2006-05-22 오전 10:22:02)
83
결국은 그 무엇을 찾는것이 공부하는 목적이 되겠지요. 말과 글은 글쓴이의 산냐(想)의 작용인데, 저도 지나가다님의 "그마음을 내는 주체"라는 구절에서 제 댓글이 오해될까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불교언어로는 '주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체라는 단어는 내가 있다는 상견의 산냐를 형성할 위험이 있습니다. 원택스님의 글에서는 부처님 교설이신 '무아'를 오해하여 단견의 산냐가 형성되었음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2006-05-22 오전 8:34:28)
76
'지나가다'님, 제 공부가 얕아서 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저절로 내는 마음이란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마음을 내는 주체는 누구인지요? _()_
(2006-05-21 오전 12:03:08)
75
저도지나가다님. 이런 걸 소설해석한다고 합니다. 전혀 마음 작용을 알지 못하는 소리입니다. 마음이 저절로 나는 그런 차원도 있습니까? 원택스님의 말 역시 전혀 마음의 작용을 알지 못하는 소리요. 사실 성철스님의 해석은 성철스님이 정말로 자신의 진심을 증득했는가를 의심케 하는 소리입니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올바른 해석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낸다하는 것은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자성이란 진여자성을 말하며 이것이 그마음입니다. 낸마음이 일어난 마음이며 생하면 멸하므로 낸마음이 기신론의 생멸심입니다. 저절로 나는 마음은 없읍니다. 일어난 마음은 그마음에 연기합니다. 즉 생멸심은 진심, 진여자성에 연하여 일어납니다...
(2006-05-19 오후 10:55:58)
75
감사합니다.
(2006-05-19 오후 5:22:19)
77
궁금합니다님, 위 기사중 원택스님께서 하신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즉, “‘자성을 낸다’고 하면, 그 마음이 객관화되고 자신을 주관화된다. 그 마음은 스스로 저절로 나는 것이지, 내가 있어 마음을 내고 마음을 주관화ㆍ객관화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내는 마음’과 ‘낸 마음’이 둘이 된다. ‘그 마음은 둘이 아니다’는 의미다.' 를 읽어보시지요. 중언부언이 되겠으나, '낸'이라고 하면 일부러 내어야 함을 말하지만, '난'이라고 하면 내고 말것도 없이 스스로, 자연스레 나는 마음이므로 그 차이가 하늘과 땅 만큼도 크지요. 즉, 마음을 '내는' 차원이 아니라 '저절로 나는' 차원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심이 아닐지요.
(2006-05-19 오후 5:16:26)
79
'저도 지나가다' 님,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시지요.
(2006-05-18 오후 4:57:26)
81
'낸'과 '난'의 차이를 주시하셔야 성철스님의 진의를 바로 이해하는 게 아닌지요? 지나가다님. '그 마음이 그 마음'이라고 두리뭉실하게 이해할 것은 아닌듯한데요.
(2006-05-18 오후 4:02:59)
81
지나가다님의 말씀에 동의 하며... 저는 "일어난 마음에 응당 머물지 않아야..."로 해석하고 싶군요.
(2006-05-18 오전 9:36:04)
78
착(머무름)이 있으매 일어난 마음은 생멸심이니 진심과 생멸심은 不一不異요, 착(머무름)이 없으니 일어난 마음이나 낸 마음이나 진심이니, 이 를 不二 不異라 함이라...
(2006-05-18 오전 9:30:30)
80
우리는 누가 해 놓은지도 모르는 해석을 습관적으로 써 왔는데, 성철스님의 해석이 不二 不異의 道理에 오히려 합당 하군요.()
(2006-05-18 오전 9:06:32)
81
아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성철 스님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해야 혜능 스님의 참뜻과 계합된다고 역설했다 하니, 성철스님은 헛된 이름만 날리셨구나!!! 머무름 없이 낸 마음이나, 일어난 마음이나 그마음이 그마음이지, 핵심은 머물지 않음에 있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지.......
(2006-05-18 오전 8: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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