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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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면 포교도 못해”
[큰스님 편안하십니까]대흥사 조실 천운 스님
3년전, 광주 주재기자로 부임받아 호남불교 현장을 누비는데 유독 노스님 한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노스님은 항상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고, 불교행사장에서 늘 뵐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행사장에 노스님이 계시지 않으면 허전했다. 노스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증명법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 노스님이 바로 광주 향림사에 주석하고 있는 천운상원(天雲尙遠. 대흥사 조실) 스님이다. 물론 원로의원인 스님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광주에 와서 취재차 곳곳을 다니다보니 포교를 위한 노스님의 활동이 경이로웠다.

천운 스님은 팔순이 얼마 안 남았지만 한달의 절반 이상을 전국의 사찰과 신행단체에서 법문을 한다. 광주 향림사 경내에서 포행하고 있는 천운 스님.


향림사는 종무소를 지나면 바로 천운 스님이 거처하는 방이 있다. 신도들이 종무소에 들르면 누구나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듯하다. 스님 방에 들어서면 사방을 에워싼 책이 방문객의 기를 죽인다.

“대승불교가 뭡니까. 상구보리 하화중생 아닙니까. 참선도 하고, 독경도 하고, 포교를 위해 책도 봐야합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 말할 수 없습니다.”

지역에서 천운 스님은 ‘광주불교의 신화’로 불린다.

37년 전, 광주의 어느 사찰에서 천운 스님에게 법문을 요청했다. 그날 받은 거마비로 변두리에 터를 잡았다. 오늘의 향림사다. 스님에게 포교는 곧 수행이었다. 한문경전을 한글화했고, 불교의식을 현대화했다. 또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있는대로 꺼내어 주었다.

그때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거두어 부처님 법당을 줄여 아이들 방을 만들어 함께 살았다. 이렇게 향림사를 거쳐간 아이들이 200여명에 이른다. 모두들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되어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중에는 출가 사문만 20여명이나 된다. 얼마 전 출판기념으로 문중을 정리해 보니 상좌가 70여명, 유발상좌가 100여명 가까이 됐다. 그래서 천운 스님은 한때 ‘중 만드는 공장장’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향림사 내에 있는 복지법인 향림원에는 노인과 장애인 5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요즘은 부모가 없거나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을 건립중이다.

천운 스님이 화순 기원정사 대웅전 부처님의 복장물을 봉안하고 있다.


불교 불모지 호남불교를 살리기 위해 스님은 교육불사에 주력했다. 승속을 떠나 배우겠다고 하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불교 유치원과 광주불교대학을 설립해 포교와 정법세우기에 혼신을 기울였다.

연로해지면서 스님은 산책삼아 유치원 아이들을 찾곤 한다.
친구들과 놀던 아이 하나가 스님을 붙잡고 묻는다.

“스님! 스님은 왜 머리가 없어요?”

“머리가 없어야 스님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

“스님은 왜 절에서 살아요?” “스님은 어째 옷이 똑같아요?”

여기저기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하나하나 대답해주는 노스님 모습이 정겹다.

“아이들 마음이 바로 부처 마음입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중생의 업이 나타나요. 업이 녹여지면 본래 부처자리가 드러납니다. 수행으로 업을 녹여야 해요”

유치원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천운 스님.


스님은 여기 저기서 들어오는 법문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수 팔순이 가까운 노장이건만 여전히 현역이다. 한달이면 보름가량을 전국의 사찰과 신행단체에서 법을 설한다.

수행과 포교를 향한 마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스님은 새벽예불이 끝나면 <금강경>독송을 빠트리지 않는다. 은사 지암 스님이 그러했다. 하루 4독을 하시는 은사스님은 출타시에도 경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다니며 장소를 불문하고 독송했다. 독송하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간절하던지 그대로가 부처님 모습이었다. 은사스님을 따라 스님도 평생을 두고 <금강경> 독송을 생활화하고 있다. 이제는 향림사 가풍이 되어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하루 전날 평창 월정사에서 열린 한암 스님 추모 다례재에 참석차 먼길을 다녀온 스님은 또 점심 무렵 여장을 챙긴다. 화순에 건립되는 절에서 부처님 복장의식을 청해왔던 것이다.

“스님, 힘들지 않으세요?”
“신심으로 사는데 어렵고 힘든 생각이 어디에 붙어요.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혜는 끝없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신심으로 일하세요.”


천운 스님은

192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으나 한의사였던 부친이 3년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중,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부러워 중학교에 가고자 집을 나왔다. 1946년 내장사에서 박한영 스님을 만나 시봉을 하고 월정사에서 지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선운사 대교과를 수료하고 제방선원에서 수선정진했다. 화엄사, 대흥사 등 교구본사 주지와 총무원 교무부장을 역임했다. 교화활동을 인정받아 조계종 포교대상을 두차례나 수상하는 등 각종 포교관련 상을 받았다. 2001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현재 해남 대흥사와 광주 향림사 조실, 정광중·고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원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봐서 행 하는길> <알고가는 길> <끝없는 행원> <더불의 사는 삶> 등 다수가 있다.


천운 스님의 가르침

올해도 어김없이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습니다.
금년이 불기(佛紀) 2550년이지만 현재 우리가 쓰는 불기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해를 기점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80년을 사셨으니 부처님 오신지 어언 2630년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도에서 태어나신 부처님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여러나라와 중국을 거쳐 오게 되었고,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을 거쳐 전해지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도 부처님 가르침이 전래되었습니다.

천운 스님은 모든 허물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래 인도 왕족이었던 허 황후가 서기 48년 불상을 모시고 뱃길로 가야에 온 것은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승려였던 마라난타 존자가 384년 법성포로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고, 이로써 화려했던 백제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한라산 영실에 존자암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부처님 제세 시 제자였던 발타라 존자가 한라산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부도가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600년 전 중국을 거쳐 고구려(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2600년 전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는 부처님 열반이후 부처님 제자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는 진인(眞人)불교였습니다.
고구려 이전, 이 땅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한문으로 쓰여진 경전에 의존하기보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인 진인불교였을 것입니다.

오늘 또다시 맞이하는 초파일에 진인불교를 생각해봅니다. 문자에 갇혀있는 불교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불교를 말합니다.

36년 전, 광주에 향림사를 창건할 당시 주위에서 모두들 말렸습니다. 나무 하나 없이 민가와 함께 있는 절에 누가 오겠냐고요. 그렇지만 부처님은 산속에 계시지 않았고,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가르침을 펴셨고 길에서 가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속세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바꾸었고, 뜻 모르는 경전을 읽기보다 찬불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참선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돌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향림사에는 오래전부터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장애인, 고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절과 복지시설에서 먹고 자는 대중이 150여명에 이릅니다. 신도들의 보시와 봉사로 이제껏 한번도 굶지 않았고, 누구에게 비굴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참으로 곤혹스런 시대였습니다.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선지식들의 간절한 수행과 포교로 불교의 맥은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더 큰 힘은 어머니들이었습니다. 흔히들 치마불교라고 하지만 어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불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참선을 한다고 앉지도 못했고, 글을 모르기에 경전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들의 입에서는 한시도 염불과 주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나무아미타불’하며 숟가락하나 더 놓고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인불교입니다.

참선, 염불, 주력, 포교, 가람수호는 오늘의 불자들이 행해야할 5대수행입니다. 불자라면 이 가운데 하나라도 선택해 간절히 해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문제를 살펴보면 입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천수경> 십악참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하는데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등 4가지가 바로 입과 관련된 것입니다. 구업을 막는 방법으로 염불과 주력이 최고입니다.

공부를 했고 안했고는 화내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는가를 보려면 얼마나 화를 내지 않는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살면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내고 보면 모든 허물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을 원망해서는 더욱 안됩니다.

입으로 진실된 말을 하고, 자비실천을 수행하면 성내는 마음은 저절로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금년은 초파일과 어린이날이 겹쳤습니다. 어린이는 마음에 때가 없이 순수합니다. 깨끗한 거울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따라서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부모들이 싸우거나, 못살겠다며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맑은 마음의 거울에 비쳐져서 언젠가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초파일을 맞아 진인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한 부처님의 가르침(七佛通偈)을 소개합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것이 곧 불교다)
대흥사/글=이준엽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2006-05-03 오후 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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