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내린 봄비로 개나리와 철쭉이 삼각산에 가득했다. 삼각산의 봄 내음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맑게 하는 것 같았다. 초행이라 도량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평창동 마을 어귀를 지나는 순간 정토사라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조그마한 마을길을 따라 삼각산 중턱으로 올라서자 불사가 한창인 정토사가 우리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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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원적에 든 청화 스님과 함께 염불 수행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설산 스님. 선지식이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서 일까 불사가 한창인 도심 사찰 정토사를 보는 순간 다소 낮선 느낌이 들었다. 공사가 한창이고 여기저기에서 나무를 자르는 전자톱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공사 자재를 피해 겨우 법당으로 올라가 삼배를 하고 스님이 기거 하신다는 아래층 요사채로 들어가자 설산 스님은 문 앞 쇼파에 앉아 반갑게 맞아 주었다. 8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얼굴은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삼배를 마치고 큰 스님에게 법문 한마디 듣고 싶어서 왔다고 말을 건내자 스님은 “법문이 뭐 별건가 얼굴 한번 보고 가면 되지” 하며 연신 웃으신다.
스님의 뵙자마자 어떻게 평생을 염불만하고 살아오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마음 한켠에서 불쑥 쏟아났다. 다자고자 스님에게 어떻게 염불 수행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물었다.
“15세의 나이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는데 당시 건봉사에는 강원과 염불방, 참선방이 따로 있었어요. 강원에서 조용히 경전을 읽었는데 ‘쿵’하는 소리가 나서 염불방에 가보니 10여명의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마음이 자꾸 그 염불 소리를 쫒아 가는거에요. 그래서 염불로 불법을 전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염불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벌써 한평생이 되었네요.”
설산 스님은 건봉사 강원을 졸업하고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며 참선 수행을 시작해 10하안거를 성만했다. 한국전쟁 당시 건봉사가 폐사되자 이곳 삼각산 자락에 정토사를 세우고 염불 수행에 매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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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만일 염불 수행의 서원을 세운 스님은 매일 일념으로 염불을 한다. 27년간의 만일 염불을 회향한 스님은 2001년 10월 건봉사에서 다시 만일 염불 정진에 돌입했다.
설산 스님의 하루는 여느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새벽 4시에 시작된다. 그러나 사중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고령이어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정토사 주지 응천 스님이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요사에 머무르시라는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스님은 예불을 올리는 동안 요사에서 염불 수행을 하신다.
설산 스님이 방으로 들어가자고 해 처소로 자리를 옮겼다.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자는 당황스러웠다. 사람 두세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도와 책꽃이의 책, 조그마한 간이 책상, 바구니 안에 놓인 천알 염주와 거북이 목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새벽 4시~5시, 저녁 6시~7시 매일 두차례 지극정성으로 염불 수행을 한다. 수행 방법도 특이했다. 정좌를 한 다음 간이 책상위에 거북이 목각과 천알 염주를 가지런히 놓고 염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입과 마음으로 칭명 염불을 한다. 천번을 다 돌리면 염주와 거북이를 정리한 다음 다시 반복한다.
하루에 두 번 염불 수행을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중생심이다. 스님은 밥먹을때나 화장실을 갈때도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선 수행자가 화두를 들 듯 하루 종일 염불을 한다.
저녁 6시 아미타부처님에게 염불을 한다는 것을 고한 이후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의 모습에서 웬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염불 수행을 하는 틈틈이 설산 스님은 만해 스님의 자료를 정리한다. 건봉사에서 만해 스님으로부터 직접 경전을 배웠고 누구보다도 만해 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다. 그래서 이생을 마감하기 전에 만해 스님의 자료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그동안 잘 몰랐던 스님으로서의 만해 스님을 불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 스님은 그동안 ‘산거’ 등 만해 스님과 관련된 여러편의 시를 지었다.
설산 스님은 왼쪽 발가락이 하나 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 갈수 없다는 항거의 표시 스스로 네 발가락을 잘랐기 때문이다. 60여년을 절뚝이며 살아왔지만 스님은 만해 스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음을 지어보이신다.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스님의 성치 않은 다리에서 민족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책꽃이에서 만해 스님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스님은 <지옥을 불태워 버려라>는 제목을 책을 기자에게 내밀었다. 청담스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책이었다. 스님은 청담 스님을 은사로 불교 정화 운동에 동참하는 등 굴곡의 한국 불교와 함께 해 왔다. 특히 총담 스님이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재임할 당시 스님의 수법제자가 되어 종단화합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은 고령에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지팡이와 벽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거동이 불편한 스님. 그러나 아직까지 염불하는데는 지장이 없다며 웃음을 지어보이시는 모습은 기자를 숙연하게 한다.
설산 스님은
1919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스님은 15세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건봉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공비생으로 선발되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청담 스님의 수법제자로 종회의원, 건봉사 주지 등을 역임했고 실달학원 원장을 맡아 후학지도와 수행교화에 헌신해 왔다.
현재 삼각산 정토사에 주석하고 계시며 저서로는 회고록 <뚜껑없는 조선 역사책>과 사찰 안내서 <명찰고찰따라> 등 다수가 있다.
설산 스님은 경율론 삼장 교학은 물론 선지에도 밝고 항상 석문의 도를 지키며 실천에 앞장서는 수행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토사 주지 응찬 스님은 “큰 스님을 바로보면 부처님같으시다는 생각이 든다”며 “평생을 한결같이 염불 수행을 해 오신 스님의 실천행이 후학들에게는 사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설산 스님의 가르침
저는 평생 염불 수행을 한 사람이라 법문을 하라니 뭐를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염불 수행을 하라는 법문은 많이 했으니 오늘은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연(因緣)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인연의 참된 뜻을 알고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연은 인(因)과 연(緣)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은 한마디로 업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과거의 업보에 의해 오늘의 내가 모양 지어졌기 때문이죠.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직접적인 내적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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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후천적 노력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먼저 전화도 하고 맛난 음식을 같이 먹는 등 서로가 노력했기 때문에 아직도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에서 1년 이상 함께 공부한 급우라고 해서 모두가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엄청난 노력을 했기에 지금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인의 영역이라 하겠습니다. 후천적 노력이 없다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관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생에 수백겁의 인연이 있고 업식이 쌓여서 금생에 옷깃을 스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불법은 인연법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이 서로 인연이 되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합니다. 이같은 존재 방식을 연기(緣起) 또는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기의 이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윤회 전생의 연자방아가 도는 것처럼, 생사고해에서 헤매며 하루밤에도 수 천 번 죽고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이같은 인과응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선방에 앉아 연기법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인생을 걸고 용맹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선, 염불, 절, 사경 등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저는 염불을 평생 수행으로 살아왔습니다. 염불이야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하게 되네요.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명호를 외우면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아미타불과 여러 성중(聖衆)들이 나타나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염불의 공덕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한번 염불을 해 보십시오. 돈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단 1초를 염불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다른 생각 말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불러 보십시오. 그 1초가 바로 극락입니다. 또한 1초가 다시 1초로 거듭나면 그것이 바로 염불 삼매의 경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10만독, 20만독을 하는 것보다 지성으로 1초를 호명하는 것이 더 공덕일 클 수 있습니다.
염불은 얼마나 하느냐보다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며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불 수행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쉽게 일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집에서 밥 할 때나 지하철을 탈 때도 한마음으로 염불을 해 보십시오.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듯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금강같이 단단해 집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칭명 염불을 하는 것도 좋은 수행법이지만 마음속으로 칭명을 하는 것도 염불 수행의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매일 아침 시간을 정해 놓고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1만번씩만 해 보십시오. 생활이 달라 질 것입니다. 아침 염불을 하기 위해서 저녁에 일찍 자야 할 것이고 일찍 자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하루 일과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염불 공덕도 쌓고 스스로 생활의 변화를 가져와 매일매일 살아있는 참된 불자가 될 것입니다.
아미타불을 호명하면 극락에 간다고 많은 불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저도 건봉사 염불방에서 처음으로 염불을 배울때 그렇게 들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인지라 그것이 극락이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관세음보살 염불을 시작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다보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바로 연기의 도리를 깨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깨침의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임을 관세음보살이 알려줍니다.
다소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염불 수행한 저는 매일매일 관세음보살의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불러보면 관세음보살이 분명 극락세계를 일러 주실 것입니다. 열심히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 보세요.
다만 하나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염불을 하려는 불자들은 많은데 염불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참선을 중요시하는 한국불교의 특성상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인식이 있어 염불을 등한시 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염불을 기복 신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염불 정진은 불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불심을 더 돈독하게 하는 정토 신앙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참선과 같은 하나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몸과 마음으로 호명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