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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혜정 스님을 뵈러 북한산을 올랐을 때 스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고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스님을 찾아가는 산길은 변함이 없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분홍의 옷을 입은 진달래가 산을 오르는 이들을 반긴다. 터벅터벅 가파른 산길을 걷는 등산객들은 거친 호흡을 잊은 듯 웃음이 만발하다.
서울 구기동을 출발한지 한 시간여, 거의 정상에 이르러서야 문수사 경내에 들어섰다. 흠씬 땀에 젖고 난 뒤였다. 서울시내를 발 아래 둔 문수사에 오르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5년여가 지났을 뿐인데 문수사는 참 많이도 변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문수사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수많은 영험설화를 갖고 있는 문수영굴(文殊靈窟)은 말끔하게 새 단장을 했다. 대웅전, 나한전, 삼성각 등 전각들은 가파른 암벽을 절묘하게 이용해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산과 하나가 된 문수사를 보는 등산객들은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문수사를 찾은 주말 등산객들은 처마 밑에 잠시 짐을 풀어놓았다. 산을 오른 뒤 느끼는 벅찬 충만을 만끽하는 중일 것이었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져버린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기도를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 혜정 스님과 맞닥뜨렸다. 인사할 틈도 없이 대뜸 묻는다.
“올라오는데 얼마나 걸렸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고 답하자, 스님은 무심한 표정으로 ‘방(棒) 없는 방(棒)’을 내려친다.
“고생했어. 쉬었다 내려가.”
막무가내 찾아온 달갑지 않은 손에게 내린 벌칙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주변에서 쉬고 있는 등산객을 보고는 금새 미소를 머금고 먼저 말을 건넨다.
“산에 봄 잔치가 가득하지요? 저토록 소리 없이 제 할 일을 해 나가는 산이 있으니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차 한 잔 같이 마실 분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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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스님은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인심이 후한 탓이다. 그래서 공양시간이 되면 문수사 공양간은 늘 북적거린다. 물을 얻어 마시러 왔다가 밥까지 덤으로 먹고 가는 이들의 얼굴엔 흐뭇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스님의 하루는 뭇중생이 깨어나기 전인 새벽 3시 도량석과 예불로 시작됐다. 이어지는 나라와 중생을 위한 관음기도는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세간 보다 일찍 동이 트는 산허리지만, 문수사를 껴안은 북한산은 아직도 어둠을 벗지 못했다.
절에 없는 날, 혜정 스님은 예불을 올리기 위해서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머물고 있는 자리가 곧 법당이다. 여행을 하거나 법문을 하고 돌아오는 중이라도 적당한 장소를 찾아 예불과 기도를 올린다.
스님은 책을 접하기 어려운 이들이나 불우한 이웃에게 매번 불서를 보시한다. 산을 내려가서 하는 일 중에 불서를 고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매월 불서를 구입하는 비용이 70여만원에 달할 정도다. 그러고도 스님은 책을 보시한다는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온 얘기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보시와 무소유의 당부를 빼놓지 않는다. 이날 스님을 뵈러 들른 김수장 변호사에게도 무소유의 즐거움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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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역사서적을 뒤져 <고려사>에 등장하는 문수사 관련 기록을 찾아냈던 스님은 요즘 사적기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고려시대 탄연국사가 창건하고 조계종의 중흥조 태고보우국사가 주석했던 도량인데도 어엿한 사적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산중생활 틈틈이 근거자료를 모으는 스님의 노력은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혜정 스님은
문경 봉암사에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혜정 스님은 1958년 합천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문경 봉암사, 마산 성주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은사 청담 스님으로부터 인욕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3년부터 북한산 중턱에 있는 서울 문수사에 머문 스님은 우리나라 3대 문수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춘 중창주이다. 평소 책을 좋아하고, 어려운 이들이나 사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온정을 베푼 자비보살로 유명하다. 또한 평생 자가용을 두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큼 검소한 생활로 수행자의 사표가 되고 있다.
◇혜정 스님의 가르침
나의 산방(山房)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몇 권과 텅 빈 공간 뿐이지요. 그러면서도 산방은 꽉 찬 곳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빛으로 충만해 있고, 그 빛은 색깔이 없으며, 색깔이 없으면서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지요. 이 사유(思惟) 없이 어찌 존재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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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외금강 신계사 부근에 돈도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었어요. 홍도(弘道)라는 스님이 이 곳에 당도해보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모래 위에 온몸둥이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진심을 내지 말라는 경구였는데, “나는 진심을 한 번 낸 죄의 대가로 지금 뱀의 몸을 받았으니 내 글을 적어다가 계잠(戒箴)을 삼아서 화를 내지 말라”는 경책의 글이었습니다.
幸逢佛法得人身(행봉불법득인신)
多劫修行近成佛(다겁수행근성불)
松風吹榻眼中柴(송풍취탑안중시)
一起嗔心受蛇報(일기진심수사보)
다행히 사람몸 받아 불법의 행운 만나서
다겁에 수행하여 성불에 가까웠어라
솔바람이 불어와 눈에 티가 들어가서
한 번 성을 냈더니 뱀의 몸을 받았네
寧碎我身作微塵(녕쇄아신작미진)
誓不平生一起嗔(서불평생일기진)
願師還鄕閻浮提(원사환향염부제)
說我形容戒後人(설아형용계후인)
차라리 내 몸을 가루로 만들지라도
맹세코 평생에 진심 한 번 내지 않으리니
원컨대 스님게서 염부제 돌아가시거든
나의 몰골을 말해서 뒷사람을 경계케 해주오
홍도 스님의 일화가 어느 연대의 일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러한 회화적 걸작으로 후세를 경각시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含情口不能言語(함정구불능언어)
以尾成書露眞情(이미성서로진정)
願師書寫態壁上(원사서사태벽상)
欲起嗔心擧眼看(욕기진심거안간)
뜻은 품었으나 말로 능히 못하노니
꼬리로나마 글을 써 진정을 말합니다
원컨대 스님께서 이 글을 벽에 걸어
화가 날 때마다 쳐다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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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인 청담 스님은 제자들에게 인과를 철저히 믿고 인욕수행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나를 때리면 화가 나겠지요? 이마저도 청담 스님은 맞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때린 것이니 인욕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인과의 업은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일을 남의 탓을 하기 보다는 자신이 지은 인과의 결과로 받아들이면서 생활하세요. 그렇다고 억지로 일어나는 감정을 참는 것이 인욕은 아닙니다. 나라는 생각까지 다 놓아버려야 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수행이 필요합니다.
‘National'로 유명한 세계적인 기업 일본 마쓰시다전기의 설립자인 마쓰시다 고노스케(1894~1989)는 마쓰시다전기를 일군 기업가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아버지로도 유명합니다.
마쓰시다는 아버지의 계속된 사업실패로 초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하고 생업현장에 뛰어들 만큼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마쓰시다전기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마쓰시다는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그동안 부유한 생활과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니, 아버지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후 그의 아들은 마쓰시다전기가 아닌 다른 기업에 취직을 했고, 마쓰시다는 회사와 사재를 모두 직원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이런 기업가, 이런 불자가 되어야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