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강설 이전에 화엄산림이 열리고 있는 월정사와 <화엄경>의 인연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알고 보면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엄법회가 열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깊은 인연의 이치입니다.
| ||||
오대산은 전통적으로 문수도량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화엄삼성(華嚴三聖) 중 한 분이시지요. 그러니 오대산은 화엄도량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도 연관이 깊으며, 前 월정사 조실이셨던 탄허 스님께서도 생전에 ‘화엄대가’라, 70년대 말에 <화엄경> 강의를 직접 이곳에서 열기도 하시고, <화엄경> 번역도 하셨지요.
그럼 23품 ‘승도솔천궁품(昇兜率天宮品)’을 살펴볼까요. 이 품은 부처님이 6번째 욕계천상계인 도솔천궁에 오르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부처님이 해인삼매에 드신 채로 처음 앉아계셨던 보리수 아래와 수미산정, 야마천궁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계시면서 도솔천궁으로 오르셨다고 나옵니다.
<화엄경>을 이해하려면 삼매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허구적인 이야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갖고 천상에 오르다니,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 |||
그런데 불교에서는 마음에 불가사의한 힘이 있어 마음이 무엇이든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꿈을 꿀 때,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서 보고 듣고 다 하지요. 의식으로 말하자면 몽중의식(夢中意識)인데 실제 눈으로 직접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꿈에서 보고 듣는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화엄경>을 설명할 때 ‘삼매 속에서 설해진 경전이다’라는 말은 ‘삼매 속에서 시방의 불보살이 등장하고 불가사의하게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가 삼매 속에서 설해져 나왔다’는 뜻 입니다.
‘승도솔천궁품’은 흔히 5회 십회향법문이 시작되는 품이라고 불립니다. 도솔천왕이 마니장사자좌를 마련하고 부처님을 영접하고, 이어 24품 ‘도솔천궁게찬품(兜率天宮偈偈讚品)’에서는 금강당보살을 위시한 10당보살들이 게송을 설하며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이어지는 25품이 ‘십회향품(十廻向品)’입니다.
금강장보살이 보살지광삼매에서 한량없는 지혜를 얻고 일어나 10가지 회향을 설하는데, 이 회향은 모두 3곳으로 회향됩니다. 중생회향, 실제회향, 진여회향이 그것입니다. 아래로는 중생에게 향하고 위로는 보리를 구한다는 이야기지요.
| |||
<화엄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품이 몇 개 있습니다. 3회의 십주(十住, 보살이 가져야 할 10가지 마음가짐), 4회의 십행(十行, 보살이 행해야 할 10가지 행위), 5회의 십회향(十廻向, 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10가지 행위)이 그것입니다.
이 십주, 십행, 십회향이 성취되고 나서야 십지법문이 설해집니다. 십회향 전체가 십지로 나아가는 덕을 설한 법문이기에, 십회향법문은 십지법문을 위한 전 단계 순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십지품(十地品)’은 보살에 이르는 10가지 수행단계를 밝혀놓은 품입니다. 앞의 십회향, 십주, 십행 수행은 관법(灌法)에 의해 수행이 이루어지지만, 이제는 직접 체험하는 본격적인 보살수행에 들어가게 됩니다.
십지, 십주, 십회향, 십행…. <화엄경>에는 이렇게 10자가 들어가는 품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탄허 스님께서는 생전에 통현장자의 <화엄론>을 중시하고 이를 근거로 <화엄경>강설을 많이 하셨는데, 이 통현장자의 <화엄론>을 보면 <화엄경>에 나타나는 10자가 상징하는 바를 밝혀놓은 구절이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10은 만수(滿數)를 상징하는 동시에 십바라밀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바라밀을 더해 십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을 상징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10지 수행은 십바라밀에 배대해 설해졌으며, 또 한 지위가 다른 지위를 모두 포함하고 한 행이 모든 행을 다 갖춘 원만 융통한 보현행을 자세히 보이는 법문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파악할 때 한 단면에 얽매이지만, 하나 속에는 모두가 들어있습니다. 십바라밀은 차례대로 십지와 대응되지만 실제로는 각 지마다 십바라밀이 갖춰져 원만 융통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 |||
<화엄경>은 동적인 수행을 권장하는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엄’이 ‘꽃으로 장엄한다’는 뜻이듯이, <화엄경>은 ‘보살이여, 만행화(萬行華)로 깨달음의 길을 꾸며놓으라’는 참 뜻을 갖고 있지요. 부처님 법따라 살아가고 수행길따라 살아가려고 마음 낸 사람이 행함을 통해 일생을 항상 아름답게 꾸미며 살아가라, 이것이 바로 경전이 뜻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27품은 ‘십정품(十定品)’입니다. 한 마디로 십지 보살수행을 완성한 다음 얻는 깨달음에 직결되는 경계를 보여주는 내용들입니다. 지혜의 근본인 10가지 선정을 말하고 있지요. 불교에서는 계ㆍ정ㆍ혜를 삼학(三學)이라 부릅니다. 동시에 수행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화엄경>의 특이한 점은, 마치 의상의 <법성게>에 나오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처럼 점수적 단계에 있으면서도 대번에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깊이 공부하는 분 중에는 십주 성불론을 내세우는 분도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십정품’은 보살이 수행을 완성하면 십정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8품 ‘십통품’에서는 십정에서 십통이 나오는 것으로 설명이 이어지고 있지요. 이어 29품 ‘십인품(十忍品)’에서는 앞 품의 십통이 어루어지면 다시 열 가지 지혜의 인(忍)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0품 ‘아승지품(阿僧祗品)’의 ‘아승지’는 범어를 음차한 단어입니다. 이 품은 124개의 대수(大數)를 설해놓은 품입니다.
흔히 <화엄경>을 교상 판석할 때 ‘원교’, 즉 ‘원만한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 수용한다는 뜻이지요. 바닷물이 지상의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이 제법을 모두 수용해 조화시켰다고도 표현합니다.
이 화엄의 정신이 바로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인도불교는 부파불교, 중국불교는 종파불교라고 말해온 반면 우리나라 불교는 ‘통불교’라고 말합니다. 서로 모아서 소통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고, 모든 종파의 교의를 하나로 묶었다는 뜻이지요. 이 회통의 근거가 바로 <화엄경>에서 나옵니다.
<화엄경>은 대의를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 혹은 ‘통만법귀일심(統萬法歸一心)’이라 표현해 일체 만법을 통합해 마음으로 돌리는 유심법문으로 요약합니다. 한마음을 밝힌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화엄도리’입니다. 마음은 갖가지 오온(五蘊)을 만들어내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져 나오지요. 즉, <화엄경>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진열해 놓은 대형 종합백화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화엄경>의 별명을 ‘잡화경(雜華經)’이라 하는 것처럼 화엄법문 안에는 온갖 잡화사상이 두루 수용돼있는데, 이것은 다른 나라 불교보다 기층민의 무속적인 면에서부터 고도의 선수행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과 상통합니다.
마음에 탐진치 삼독(三毒)이 있으면 사는 것이 힘들어지니까 욕망을 끊고 해탈하자, 이것은 성문연각이 하는 말입니다.
대승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번뇌를 끊고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 번뇌 그대로가 해탈이다! 실천행과 함께 가라, 이것이 바로 <화엄경>의 사상입니다.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말할 때도 화엄사상을 갖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한국불교에는 선 수행의 장점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때의 구산선문에서 시작된 선풍은 중국선에 의지해 모방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외려 보조국사가 <화엄경>을 읽고 자극받았다는 이야기처럼, 깨달음의 경계를 내적으로 체험했다 하더라도 화엄의 사사무애를 통한 대외적 이타원력이 결핍되면 수행은 좀처럼 완성될 수 없습니다.
화엄사상은 원효ㆍ의상 스님에서 시작해 한 때는 우리 불교의 우수성을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과시했던 사상입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현수ㆍ법장 스님 뿐 아니라 중국의 화엄사조인 청량국사도 원효 스님의 교설을 소중히 대했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탁월한 법풍에 의해 창도되고 계도된 한국의 화엄사상은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한국불교의 기반이 됐습니다. 교학적 측면에서 중국이 원각경 불교, 일본이 법화경 불교라면 우리나라 불교의 가치의식은 바로 화엄 불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불은 못했지만 부처의 정신을 바로 세워보자!’ 이것이 바로 화엄의 정신입니다. 중생 핑계 대며 나쁜 짓 골라하지 말고, 학 다리가 길면 긴대로, 오리 다리 짧으면 짧은 대로 본래 평등한 것, 그것이 화엄의 정신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세운 이 화엄의 가치야말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으며 또 손상 훼손될 수도 없는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