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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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닮은 米壽의 소년
[큰스님 편안하십니까]정법사 조실 석산 스님
석산 스님(石山·88)을 뵈러 간 것은 청명을 앞둔 이른 봄날 오후였다. 남쪽에는 때 이른 여름 날씨로 호들갑이었지만 삼각산 산중은 아직도 진달래가 겨우 꽃봉오리를 튀운 정도. 성북동 길을 따라 아스팔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아치형의 정법사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이라고는 하지만 속진은 닿지 않는 듯 새들과 산짐승들이 기자를 먼저 반긴다. 청설모 한 마리가 재를 지내고 마당에 고수레로 내놓은 밀감 하나를 물고 날쌔게 소나무 꼭대기로 치달아 올랐다.

정법사 조실 석산 스님


몇 해 전 상좌 법진 스님이 불사를 마친 대웅전 바로 옆에서 대략 40년쯤 되었다는 조실채가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비껴 앉았다. 그 앞에는 스님의 나이만큼 이 산을 지켰음직한 소나무 한그루가 버티고 있다. 대웅전 앞에 서면 범종각 너머로 서울 시내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어 산속에 자리 잡은 도심사찰의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 사이로 역시 40년 전쯤 신도들의 시주로 세웠다는 ‘나무용화미륵존여래불’ 입상이 5m 높이로 솟아 있다. 그 뒤로 아담한 산신각도 구색을 갖췄다.

석산 스님이 주석하는 조실채는 시멘트로 만든 낡은 슬래브 지붕에 녹슨 함석 처마가 세월을 말해주는 누옥이다. 요사 안으로 들어서면 좁은 나무마루를 사이로 침실과 작은 서재가 딸려있다.
서재에는 방금 전까지 붓글씨를 쓰시다 만 듯 벼루에 먹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인 지묵과 먹물을 닦기 위해 알맞은 크기로 잘라 차곡차곡 쌓아둔 휴지는 정갈한 스님의 평소 성격을 말해 주는 듯하다.

한가한 오후의 정적을 깨고 괘종시계만 ‘똑딱똑딱’ 거렸다.
얼마 전 미수를 갓 넘긴 노장은 나름대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마침 손수 머리를 다듬으셨는지 한손에는 면도기가 들려 있었다. 삭발을 했지만 속 피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나름대로 스님 스타일을 고집하는 탓인 듯했다. 기자가 까닭을 묻자 부끄럽다는 듯 “멋이지 뭐”라며 허허 웃으신다. 아직도 장난기 많은 소년의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건봉사서 魚山 배워 일가 이뤄

석산 스님은 17살 나이에 건봉사로 입산 출가했다. 전생의 인연이 두터웠던 탓일까. 스님은 당시를 “집이 싫었고 오직 중이 되는 것만 머릿속에 가득할 때”였다고. 건봉사에서는 강원에서 경을 보면서, 어장스님에게 염불을 배웠다.

금강경 사경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그때는 어찌나 신심이 나던지, 경전이든 염불이든 뭐든 한번 들으면 바로 머릿속에 속속 들어왔거든요.” 일단 머리를 깎고 나니 절집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만일염불회’로 유명했던 건봉사에서 ‘석산이 염불을 제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어산(魚山)을 공부했다. 염불은 후천적인 요인보다 선천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데, 스님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목소리를 타고 난 덕분인지 조계종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산의 일가를 개척했다. 그러나 기력이 쇠잔해진 지금은 그저 옛일이다.

해방되기 전인 1944년 혜화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은사 보광 스님의 부름을 받고 서울 가회동포교당에서 노전소임을 맡게 됐다. 망월사 해인사 범어사 등에서 수행하던 중, 60년에 은사스님이 입적했다. 은사스님의 가회동포교당을 정리하고 삼형제 약수가 솟았다는 삼각산 복천암(福泉庵)자리에 절을 세우고 생전 처음 주지를 맡은 것이 지금의 정법사다.


염불·사경 그리고 소박한 공양

정법사는 조선의 옛 군사들이 도성을 지키기 위해 진지를 쌓았었다는 삼각산 구진봉(舊陣峯)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고급주택들이 즐비해 절 입구까지 도로가 났지만 40여 년 전 성북동은 아카시아 숲이 우거져 산 아래는 보이지도 않았다.
요즘은 청와대를 지키는 수방사 군인들이 절 주위를 지켜주고(?) 있다.

스님의 건강비결은 규칙적인 일과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염불과 기도 수행의 힘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낭랑한 목소리로 염불을 시작한다.

“요즘도 빼놓지 않고 아침 예불은 <천수경> 한편을 외고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합니다. 저녁에도 천수경과 장엄염불을 하는데 대략 1시간쯤 걸려요. 그러나 빨리 하면 금방입니다, 그렇지만 예전 같은 목소리는 안 나와요.”

낮에는 잉크펜으로 대학노트에 빼곡히 <금강경>을 사경하고, 경내에 붙일 붓글씨도 손수 쓴다.

젊은 시절부터 소식하는 습관이 배어 있어 반드시 하루 3번 공양을 거르지 않는다. 공양주 보살이 가져온 저녁 공양상을 얼핏 훔쳐봤다. 밥은 그릇의 1/3을 담았고 된장국과 도토리묵 두 조각, 배추김치 조금에 나물 두어 가지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진 저녁 5시 30분, 부목 처사가 종루에 올라 종을 울린다.
떠~엉~. 긴 공명(共鳴)이 도회의 중생들에게 퍼져나간다.
공양을 마친 스님은 어떤 주변의 소리에도 무관심한 듯 불편한 걸음을 이끌고 천천히 대웅전 주변을 포행하기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정근에 몰입한다. 모진 풍상에도 변함없는 대웅전앞 소나무와 출가사문으로 미수(米壽)의 세월을 꼿꼿이 살아온 스님의 굽은 허리를 보면서 문득, 스님이 삼각산의 소나무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종의 ‘공명’처럼 스님의 염불소리가 무겁고 낮게 주변을 흔들었다.

스님은 대웅전 30바퀴를 돌고 천천히 부처님께 합장 반배하고 말없이 처소로 걸음을 옮기셨다.



석산 스님은

1919년 강원도 명주군(지금의 강릉)에서 태어난 석산 스님은 37년 건봉사서 보광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56년 범어사서 동산 스님으로부터 비구계 수지했다. 평생 명예를 좇지 않고 염불과 기도로 출가자의 본분사에 충실했다.
상좌 법진 스님은 “80년대 중반 상좌와 인도 부처님 4대 성지를 다녀온 것 외에는 외국을 나가 본적이 없다”며 “평생 신도들의 시주가 허투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며 후납들을 경책했다”고 말했다. 77~9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성북동 정법사에 주석하고 있다. (02)762-0774
글=조용수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석산 스님의 가르침

조주 스님이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고 물어오는 한 스님에게 ‘무(無)’라고 했답니다. 그 까닭을 아세요? 요즘 불자들은 이미 알음알이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들 아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선학원은 한국불교의 근간인 선수행 전통을 이어온 곳입니다. (서재 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걸려있는 편액 ‘신해행증(信解行證)’은 선학원에서 이사장을 오래 했던 석주 스님이 40여 년 전에 써 주신 겁니다. 바르게 믿고 이해하는 바를 바르게 행해야만 깨달음을 증득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경지는 머릿속에서나 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실천할 때 나오는 겁니다.


바로 믿고 이해하고 행하라

조주 스님이 ‘무’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닦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본래 불성이라는 건 닦을 것이 없는데 중생은 욕심의 티끌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중생은 목숨을 걸고 정진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경을 볼 때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황급하고 절박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건봉사에 있을 때 조실로 있던 만해 스님도 이 ‘무’자 화두를 주셨습니다. ‘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예불 빠지고 중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도반들을 보면 그렇게 보기 싫고 미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면 미운 것도 고운 것도 없어 시비가 없습니다.

삼각산의 소나무 같은 석산 스님


부산 범어사에서 노전을 보며 후학들에게 염불을 가르치던 시절 만 4년을 동산 스님을 모시고 산적이 있어요. 제 평생을 제대로 중노릇 하면서 살수 있게 해준 힘은 당시 동산 스님과 같이 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동산 스님의 원력과 신심은 그 어떤 스님네도 못 따라 갑니다.

큰 절 조실이라 하면 대개 ‘해태심(解怠心)’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예불에 빠지거나 대중들과는 잘 생활하지 않는 것이 예사인대 동산 스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불은 절대 빠지는 법이 없었고, 항상 대중보다 30분 먼저 각단에 예배하고 대웅전 상단에 턱 하니 앉아 계셨어요.
아침공양이 끝나면 언제나 조실스님이 먼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기 시작합니다. 사중의 제일 어른이 비질을 하는데 대중들 가운데 누가 빠지고 열외를 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에게 동산 스님은 걸음걸이 하나, 손동작 하나 까지도 따르고 배워야 할 큰 스승이었습니다.


쌀 한톨에 시주 공덕이 일곱근

하지만 날마다 마당을 쓸고 닦는데 뭐 쓸게 있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스님은 늘 마당을 쓸어내는 것으로 큰 가르침을 주셨어요. 공부는 닦을 것이 있거나 없거나 출가한 이라면 항상심으로 늘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을 말없이 행동법문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조주 스님의 ‘무’자 화두도 사실은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다 없다에 얽매이지 말고 그러한 분별을 놓아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닦을 것이 없는 불성의 참 이치를 깨달으라는 큰 가르침을 모르고 조주 스님이 ‘무’자 화두만을 가르쳤다고 우기는 우매한 중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중노릇이란 것이 짐이 아주 무거워요. 출가하지 않았을 때는 부모님에게만 효도하면 되지만 일단 출가를 하면 부처님과 뭇 중생들에게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겁니다. 직업을 갖지 않고 신도가 가져다주는 것을 먹어야 하는 처지에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 시은을 갚기 어렵거든요,

고승들은 후학들을 경책하기 위해 늘 ‘백미 한 톨에 시주공덕이 7근’이라고 했습니다. 신도가 가져오는 쌀알 한 톨에 깃든 공덕의 무게가 그 정도인데 어떻게 함부로 시주를 쓸 수 있겠습니까?


지계와 수행으로 선근 닦아야

수행자가 한 생각 잘못하면 복짓는 것은 신도고 죄짓는 것은 중이에요. 그저 젊은 스님들을 경책하기 위해 하는 소리라고 흘려듣지 마세요. 출가해서 시은을 못 갚으면 그것만큼 큰 죄가 없어요. 우리 중생은 욕심을 버리고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세상을 욕심으로만 살려고 하니까 불성이 흐려지고 닦아 내야할 먼지가 두터워져요. 이것이 한생에 끝나지 않고 업장으로 남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럴수록 출가자나 재가자나 가릴 것 없이 계율 잘 지키고 매일 자신의 근기에 맞게 일정한 수행법을 정해 선근을 닦아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죠. 지키기 어려우니까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출가자가 시주자의 은혜를 갚는 길은 물론 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이겠지만 먼저 계(戒)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신심이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끈기 있고,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가운데서 계는 스님은 물론 재가자에게도 가장 근본 덕목입니다. 특히 출가수행자가 계를 지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이미 중이 아닙니다. 시은을 무섭게 여길 줄 안다면 절대 계행을 청정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자님들에게 늘 수행 할 것을 당부합니다. 제가 불자들에게 제일 많이 권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잠자리 들기 전 <천수경>과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하면 그 공덕은 비할 데 없이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열심히 염불하는 가운데 부처님의 가호가 오고, 신심이 바로 서 내 삶이 밝아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꼭 명심하세요.

글=조용수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pressphoto1@hanmail.net
2006-04-10 오후 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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