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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 싶으면, 苦부터 자각하라!”
월정사 화엄산림-제3강(15·22품). 지운 스님(동화사 강주)
4월 1일 열린 화엄산림 세 번째 법사인 지운 스님(동화사 강주)은 <화엄경> 15~22품 강설에서 “괴로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 보리심을 내면 삶이 바뀐다”며 “‘나’라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 머물 때, 진정한 초발심이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지운 스님의 <화엄경> 강설내용을 정리한다. [편집자주]



오늘 법문할 부분은 <화엄경> ‘15품 십주품(十住品)’부터 ‘22품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까지 입니다. 우선 ‘십주품’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 하십니다. 깨달음 속의 삼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할 뿐입니다.

‘십주품’에서는 열 가지 머무는 곳(住處)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초발심주(初發心住)’는 보리심을 처음 일으켜 머무른 단계입니다. 여기서 ‘머물 주(住)’자는 그냥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공(我空)을 성취해 머무는 자리입니다. 보리심이 일어난다 함은 아공이 됐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에는 범부와 성문ㆍ연각, 그리고 보살이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중에 보살이 일으킨 보리심을 ‘진발심(眞發心)’이라고 하죠. 발심 앞에서 초(初)자가 붙어 초발심입니다. 이 경지는 아공(我空), 즉 인공(人空)의 단계입니다.

월정사 화엄학림에서 화엄경 강설을 하고 있는 동화사 강주 지운 스님. 사진=고영배 기자


그럼 발보리심은 무엇일까요? 진리를 깨치겠다는 말입니다. 왜 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할까요. 보리심을 일으켰다는 마음의 근저에는 고통에서 떠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보리심을 내기 전에는 몸과 마음이 괴롭다는 자각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인식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자리(自利)보리심’입니다. 여기에 이타의 보리심이 하나 더 들어가야 합니다. 괴로움을 자각하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마음을 일으키는 자리보리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중생에 대한 연민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리를 깨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인 ‘이타(利他)보리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함허 스님이 풀이한 <원각경>에서 깜짝 놀랄만한 구절을 봤습니다. ‘중생에 대한 연민심이 일어나면 보리심이 일어나고, 보리심이 일어나면 정각을 이룬다’는 말이었습니다. 경전에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처님이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일으키는 보리심, 둘째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진리를 깨쳐야겠다는 보리심, 셋째는 본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로워 스스로 일으키는 보리심, 넷째는 나보다 이웃 사람들과 많은 생명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으키는 연민심으로 내는 보리심, 마지막은 불법이 파괴되거나 그런 조짐을 볼 때, 마음이 아파서 일으키는 보리심입니다. 발보리심은 부처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발보리심 그 자체가 부처님의 법을 잇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보리심을 요즘 말로 하면, 수행의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기가 바로 괴로움인 거죠.

발보리심은 괴로움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발보리심입니다. ‘초발심주’가 바로 그렇습니다. ‘초발심주’는 실질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결국 ‘육체가 내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역시 자아가 없다’는 것을 명철하게 체득할 때 일어나는 참다운 보리심입니다. 그래서 ‘아공을 체득했다’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십주의 경지가 바로 이타의 보리심을 일으킨 이들이 닦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유마경> ‘관중생품’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고 유마 거사가 묻습니다. 유마 거사는 ‘중생을 볼 때, 물에 뜬 달처럼 봐야 한다. 물에 뜬 달은 있지만, 손으로 건질 수 없다. 또 돌로 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봐야 한다. 돌로 된 여자는 여자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중생은 중생으로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마 거사가 문수보살에게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 중생은 본래 공하다. 중생을 공으로 볼 때, 바로 자비심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타의 보리심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괴로움에 대한 자각과 중생에 대한 연민심이 생길 때, 일어나는 보리심입니다. 이때 공이란 말이 큰 화두가 됩니다.

4월 1일 월정사 대법륜전에서 열린 화엄산림 봉행 전경. 사진=고영배 기자


원효 스님은 <대품반야경>을 인용하면서 ‘공의 뜻은 깨달음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공은 무(無)가 아닙니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체란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공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독립된 것이 없습니다. 관계성에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시각으로 볼 때, 중생에 대한 연민심도 보리심도 일어나게 됩니다.

‘십주품’에서의 ‘주’는 바로 아공ㆍ인공의 공성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심도 공에 자각에서 일어납니다. ‘나’라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 머물 때, 진정한 초발심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범행품’ ‘초발심공덕품’ 등도 십주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도 초발심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리심을 일으키는 내용에 대한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범행품(梵行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범행의 ‘범’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범행품’에서는 수행방법과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대한 핵심을 제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범행품’은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法慧)보살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내용으로 구성돼있습니다. 핵심내용은 ‘깨끗한 행위이자 번뇌가 없는 범행을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관찰 내용에 대한 결과에 대해 ‘범행품’은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데 집착할 것이 없으며 법에 머물 것이 없다. 또 과거는 이미 멸했고 미래는 이르지 못했으며 현재는 고요하다.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으며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과거는 멸했고, 미래는 이르지 않았으며, 현재는 고요해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이 중요할까요? 만일 화가 났다면 어떻습니까. 또 화냄이 자기 삶의 전부일까, 아님 부분일까요? 대다수 사람들은 화내는 것이 내 삶의 일부분뿐이지 전부라고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40년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40년을 자기 삶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래서 40년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기에, 화내는 것도 그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40년은 지나간 시간일 뿐입니다.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40년은 자기 삶이 아니지요. 거짓입니다. 현재 이 순간, 살고 있는 자신이 전부입니다. 40년은 과거이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40년일 뿐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미래를 추상하는 그 마음도, 과거를 기억하는 그 마음도 현재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추상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기억이고 추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면, 과거를 집착하게 됩니다. ‘지금, 바로, 여기’가 중요한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범행품’에서도 ‘범행이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에 대해,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고 현재 이 순간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를 냈다면, 화는 현재 이 순간에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지나가 없어 과거가 아니고, 미래는 오지 않아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 이 순간에만 존재하기에, 화는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지금 자기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느냐’가 자기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지금의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합니다. 지금 이 한 생각이 자기 삶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범행품>에서 핵심이 되는 이치입니다.

열 가지 법을 관찰해 범행을 성취하는 데 있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變正覺)’이 중요합니다. 첫 마음을 탁 내는 순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말이 과연 가능한 말일까요? 이유에 대해 법혜 보살이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함으로써 서로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며,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어 일체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성품임을 알아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마음 자체의 성품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언하대오(言下大悟), 즉 ‘말끝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가능하게 됩니다. ‘범행품’을 읽고 정각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재가불자들이 지운 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이 품의 핵심은 처음 마음을 냈을 때 어마어마한 공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치고자 마음을 냈을 때 도대체 얼마나의 공덕이 있을까요? 여기의 공덕에는 내적 성찰이 있습니다. 수행의 결과를 공덕이라 합니다. 깨달음의 다른 모습이 공덕인 셈입니다. 보리심을 내고 수행하면 여러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먼저,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보리심을 내면 우리 삶 자체가 바뀝니다. 괴로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 보리심을 내면 삶이 바뀌는 겁니다. 삶을 송두리째 전환시키게 합니다. 보리심을 낸 결과입니다. 보리심은 수행의 동기가 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수행을 하려는 의지를 만듭니다. 둘째는 괴로움에 대한 자각을 일으킨 사람에게는 자만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절대로 아만심과 자만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셋째는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이 괴로움에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 하기 때문에 산란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수행은 바로 그 욕망을 조절해 좋은 방향으로 바꿔줍니다. 괴로움의 자각 즉, 동기부여이자 깨침의 동기부여입니다. 그래서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넷째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절망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다섯째는 건강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몸뚱이라고 했습니다. 병이 나면 모든 것이 손수무책이지 않습니까? 보리심을 일으키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초발심공덕품’에서는 초발심의 공덕은 이런 차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바로 공성을 알아가는 마음이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보리심이 일어났기에 그렇습니다. 그 결과는 대단한 것입니다. 완전한 공덕과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십무진장품’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이 품의 이름에는 ‘열 가지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藏)은 기억과 앎을 감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진장에서 신장(信藏)은 믿음, 계장(戒藏)은 계율, 참장(慙藏)과 괴장(愧藏)은 부끄러움, 문장(聞藏)은 법문 듣는 것, 시장(施藏)은 보시, 혜장(慧藏)은 지혜, 염장(念藏)은 알아차림, 지장(持藏)은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하는 것, 변장(辨藏)은 경전과 논서를 말합니다.

그럼 이 열 가지 무진장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마음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하나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특성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기억하고 저장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다는 것을 마음에 확고하게 저장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키는 씨앗이 됩니다. 믿음이 우리 마음에 머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계장에서는 계목을 듣고 지키면 마음이 알아차려 그 정보를 저장합니다. 그러면서 현재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면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마음이 계율이 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참장과 괴장에서 부끄러움은 잘못을 바로 잡게 합니다. 문장은 마음이 법문 모두 저장하게 합니다. 마치 녹음기처럼 법문 내용을 모두 저장되어 있다가, 현재 행동의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몸과 마음으로 저장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자비심을 많이 갖고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십주든 십행이든 그 핵심은 마음입니다. 발보리심에 있는 겁니다. 바로 보리심이 정각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보리심은 중생에 대한 연민심이고, 그 연민심은 괴로움에 대한 자각이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창 월정사/정리=김철우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 |
2006-04-03 오후 6:07:00
 
한마디
시민정신님! 화엄경보현행원 카페( http://cafe.daum.net/bohhyun )에 오시면, 지운스님의 강의에 대한 저의 설명 및 견해가 [자유게시판]의 3652 번에 실려있습니다. 한번 방문하셔서 일독을 부탁드립니다. 카페는 100% 열린 곳이라,회원 가입 안하셔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꼭 한번 방문 주세요~*^*^*_()_
(2006-04-09 오전 3:07:46)
90
강론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대학원생이 세미나하는 것 같이 무미 건조하거니와 삶 속에서 녹아나온 느낌이 안드는구려. 체득하고 체험한 사람의 말에서 울리는 생생함이 부족한 강좌로세.
(2006-04-06 오후 8:03:27)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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