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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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핸 어떤 농사 지으시렵니까?… “마음밭 갈아야지”
[큰스님 편안하십니까]조계산 천자암 조실 활안 스님
조계산 천자암 조실 활안(活眼·81) 스님이 백일 정진중이란 소식을 들었다. 친견하고 싶었다. 멀찌 감치에서나마 큰 스님의 정진을 훔쳐보고 싶었다. 혹여 세속에 살면서 얼키고 설킨 인연줄의 끄트머리를 잡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다.



천자암 스님의 가행정진은 익히 들었던 바이다. 80이 넘은 노구에도 새벽 도량석은 물론 손수 밭일과 수행을 병행한다. 스님의 눈푸른 수좌 기운은 초발심 그대로여서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며칠을 남아나지 못한다. 스님따라 일하고 공부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그러할진데 백일정진이 가히 짐작이 되었다.

서둘렀던 길이건만 밤이 되어서야 천자암(天子庵)에 올랐다. 하늘사람이 사는곳 이어서인지 유난히 별들이 총총하고 가까웠다.
스님의 주석처인 ‘염화조실’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저녁 정진을 마치고 기도객들과 법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무슨 물건이 와서 이렇게 대하는가?”
“… …”
어물어물하는데 스님이 또 묻는다.
“몇 걸음에 왔는가?”
“한 걸음에 왔습니다.”
혹여 말씀이 중단될까봐 사진기자가 즉각 답하자 스님은 ‘아니다’며 잘라 말한다.
“한 걸음도 의미가 없다. 모자라야 한 걸음이지.”
인사를 겸한 청법 삼배가 끝나기도 전에 졸지에 몇 방 얻어맞았다.
“부처보다 그 이상을 말하지 못하면 귀신이지. 네 놈같은 이가 바로 아는데는 귀신이고 뒷처리하는데 등신이야.”



스님은 알 듯 모를 듯, 한마디 한마디를 하고선 무어가 좋은지 마냥 웃어제낀다. 박장대소하는 한산 습득을 보는듯 하다. 스님은 장난끼 철철 넘치는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쩔쩔 맸지만 ‘공부하는데 게으르지 말라’며 질타하시는 스님이 싫지 않았다.

그날 밤늦도록 그렇게 얻어맞다가 스님방에서 물러났다.
스님은 1926년 병인(丙寅)생이다. 세수로 81세. 20대에 출가하여 지금까지 수행자 본분을 지키는데 한 치 흐트러짐없이 살았다. 50여년전, 오대산 북대에서 정진하면서 본인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게으름’에 있어서는 단호했다. 그 모양이 어찌나 무섭던지 호랑이띠인 스님은 자연스럽게 ‘오대산 호랑이’로 불렸다.
조계산에 주석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조계산 호랑이’가 된지 어느덧 30년이 넘었건만 새벽 도량석 목탁을 놓지않는다.
스님의 백일정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이 있다. 정진중에는 산문밖은 물론이고 방문밖도 나서지 않는다. 방안에서 손수 공양하고 정진한다. 법당에서보다 더많은 시간을 보내는 밭일도 정진기간에는 중단된다.



스님의 백일정진 발원은 ‘안정’이다. 주로 나라와 종단의 안정을 기원한다. 더불어 유주무주 고혼천도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회가 시끄럽고, 도량이 어수선하면 스님은 어김없이 백일정진에 들어간다.

다음날 새벽 2시, 어김없이 도량석 목탁이 울렸다. 새벽정진은 5시30분까지 계속됐다. 10여명의 기도객이 함께했다. 독경, 정근, 축원으로 진행되는 동안 스님은 한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정진을 이끌었다.

이러한 스님의 정진은 오전 8~10시, 오후 2~4시, 저녁 6시30분 예불까지 네 번에 걸쳐 진행된다.
정진이 간절하면 초인이 되는가보다. 1시간만 독경해도 목이 쉴듯 하건만 한번 시작한 정근은 끊이지 않는다.
이번 백일정진은 4월 10일 회향한다.

정진을 마치고 법당문을 나서는 스님앞에 버티고 섰다.
여쭙고 싶은 말은 많지만, 평생 흐트러짐 없이 살아온 수행자의 본분이 궁금했다.



"사람에게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어, 심성 밝히는 일이 먼저 할 일이지. 그래서 출가했어. 이제껏 실수없이 걸어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행복이나 사랑이 싫다는 것도 그렇고. 연애하자는 꼬드김도 받았어.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아닌바에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는거야. 항상 이것이 기준이 되었지. 이제는 천번 만번 실패해도 끄달리지 않아.”
“인과에 떨어지기보다 매이지 않는다”는 백장선사의 ‘할’처럼 “인연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스님의 가르침이 가슴을 울린다.
“이제 봄입니다. 새벽엔 춥더니 해가 뜨니 따사롭네요.”
“그것이 생명 재롱떠는 소리이지.”
“올해는 어떤 농사를 지으시렵니까?”
“심전(心田)을 갈아야지. 마음밭을 갈아 생명 싹을 틔울거야”
스님의 마음밭. 조계산 꼭대기에서 가을 바람이 내려올때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보여 주시리라.


활안 스님의 가르침

지금부터 1천2백 여 년 전에 중국에 마조(馬祖 道一)라는 큰 망아지가 나타나서 천하 사람을 다 답사(踏死)시켰습니다. 조사니 선사니 할 것 없이 다 밟아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조 스님 슬하에는 84명의 입실제자가 있었고, 따르는 제자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 마조 스님이 하루는 제자인 백장(百丈) 스님에게 “내가 숨을 안 쉬게 되면 체와 용(부처님의 근본 법과 근본 법의 쓰임) 두 가지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키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보였습니다.



이어 백장 스님이 되묻기를 “스님은 나에게 법을 마지막 전하실 때, 양의 뼈와 살을 굴려서 어떻게 중생에게 파종하시겠습니까? 법을 명실공히 전하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 역시 주장자를 들어 눈앞에 보여주었습니다.
제자 역시 이것을 버리고 써야 옳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바로 사용해야 옳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마조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할!”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바람에 백장 스님은 3일 동안 귀가 꽉 막혔답니다. ‘통현일할 만기복(通玄一喝 萬機伏)’ 하니, 통현 장자의 할에 온갖 번뇌망상이 굴복하니, 법신 경계, 보신 경계, 화신 경계가 다 일망타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삶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습니까? 삶을 살아가는 생활용법은 천하에 간단합니다. 일종의 숫자 놀음과 같아서 크나 작으나 간에 내 삶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숫자가 파악이 되면 먼저 납득을 하는 겁니다.

내 삶의 숫자가 100인지 200인지. 그렇게 되면 그 숫자를 분해할 수도 있고, 능히 조립할 수도 있게 됩니다. 조립이 잘 되면 모든 중생 한 사람 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크거나 작은 대로 그 존재의 삶은 끝없이 빛이 납니다.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생을 보는 부처님의 마음은 어떠하느냐? 마치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나서 재롱 떠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처럼, 자식 잘되는 것이 제일인 어머니의 마음처럼 행복합니다. 그것이 부처님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중생의 삶이 빛이 나면 이 활안이란 중의 마음은 끝 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그것이 공정(共正)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의 삶의 숫자를 파악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래의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를 바르고 밝게 꿰는 지혜로써 내 마음자리를 깨닫고 나면 우주 만물이 생기는 법, 죽는 법이 이루어지기 전의 본래의 내 모습이 바로 보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어떤 절대자가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 내 대신 살아줄 수도 없는, 바로 나만이 나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이고,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지혜가 없어서’ 하면서 수행을 미루고 둘러대고 변명을 합니다. 이건 다 거짓말입니다. 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 싫어서입니다. 변명도 시방삼세 부처님이 꼼짝할 수 없는 큰 변명을 하면 성불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게으름과 고통만 남습니다.

왜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안 해야 할 일은 해 놓고서,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흉보고 그럽니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는 건 핑계일 뿐입니다.
내가 한 생각 설계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은 내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는 마음의 옷입니다. 몰랐을 때에는 몸뚱이의 생사가 둘이지만, 알고 나면 생사가 본래 공한 것입니다. 마음의 옷이 더러우면 빨아 입고, 떨어지면 기워 입고, 못 쓰게 되면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 입어야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무슨 마음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 끝없이 빛이 날지, 판단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마음 근본의 흰 바탕 즉, 내 자성자리를 바로 보는 것,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자성자리를 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혜가 생겨서 내 마음자리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일구 참선이나 그 화두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미타불을 염하든지, 아니면 <법화경> <화엄경> <금강경> <반야심경> 그도 아니면 찬탄의 노래라도 선택하십시오.
그 내용이 무엇이냐? 시간과 공간은 원래 공한 것이고, 삼라만상도 본래 공한 것이고, 그 공은 일념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일념이라면 ‘양동 태허(陽動太虛: 양이 움직이니 크게 비워지다)’이며, 능히 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능력에 따라서 적으면 적은 대로 크면 큰대로 노력하면 아주 큰 것은 아주 적은 것의 양이 되고, 아주 적은 것은 아주 큰 것의 근본이 됩니다. 이렇게 진실해지면 이 공덕으로 나와 남이 모두 성불할 것입니다.
바닷물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항상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깊은 밑바닥은 연못보다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거칠고 힘든 일을 당해 울고 웃고 할지라도, 속마음은 돌보다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야 합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바닷속 고요가 출렁이는 파도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처럼.
정리=이준엽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활안 스님은

활안 스님이 조계산 천자암에서 발걸음을 멈췄던 때가 1974년, 이후 이곳에서 30여년을 한결같이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정진’으로 일관하고 있다. 당시 오두막 한 채가 전부였던 천자암도 세월이 흘러 격을 갖춘 법당과 선원이 들어섰다.

법왕루, 종각, 나한전, 산신각과 요사채가 들어서 풍채 당당한 가람으로 거듭났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쌍향수(천연기념물 88호)와 스님의 정진뿐이다. 스님은 매년 1~2차례 특별정진을 하고 있다. 그동안 특별정진만 백여차례를 넘게 해 왔다.

스님은 1926년 전남 담양 용연리에서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1945년 광복되던 해 순창 순평사에서 효봉스님의 은사인 석두 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했다. 당시는 총체적 혼란기여서 뒤늦게 1953년 월산 스님을 은사로 승적에 올렸다. 이후 수덕사 법주사 불국사 상원사 칠불암 등 제방선원에서 40안거를 성만했다.
글=이준엽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순천/글=이준엽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 |
2006-04-01 오후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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