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에 앞서 ‘왜 우리는 한암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여러분께 드려봅니다. 제가 왜 여러분에게 이런 화두를 드리는 것일까요. 이 얘기를 듣고 ‘한암 스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스님께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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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조계종단에서 한암 스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큰스님’을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은사에 은사를 호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큰스님이라고 하면 법, 도력, 인품, 인격, 참다운, 진짜라는 의미를 갖추고 있고, 영향력 있는 분을 얘기합니다.
다른 말로 고승, 거목, 큰 인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즉 ‘큰스님’은 큰 족적을 남기고 사회에 영향력이 있었으며, 교화를 많이 하신 분을 통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분들은 입적 후에도 중생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고, 다시보고 싶고, 닮고 싶은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큰스님’을 얘기 할 때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 저는 한암 스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첫째 조건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쪽에 관심을 두면 꼭 문제와 모순, 부패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한번도 명예나 욕심을 낸적이 없었습니다.
조계종단의 가장 큰 어르신은 종정(교정)입니다. 종정 스님은 종단, 교단의 대표이며 인격, 법을 상징합니다. 현재까지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큰스님은 해인사 성철 스님, 송광사 효봉 스님, 범어사 동산 스님, 도선사 청담 스님, 통도사 월하 스님, 백양사 서옹 스님, 70년대 종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고암 스님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스님들이 한암 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신 분들입니다. 이밖에도 석주, 고송, 범룡 스님등 아주 많습니다.
일제시대에 상원사 선원은 최고의 수행처였습니다. 한암 스님의 정신을 배우려고 이곳으로 납자들이 모여들다보니 칼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식량이 부족하여 아침에는 항상 죽으로 연명해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한암 스님이 주석하던 상원사는 일제시대 한국불교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한암 스님은 조계종단에서 4차례나 종정을 역임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1929년 조선불교 선교 양종때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본에 빼앗겼습니다. 일제는 1911년에 사찰령을 만들어 불교를 장악하고 통제및 관리에 나섰습니다. 당시에는 종단이 부재한 상태였고 다만 일제가 사찰령에 의해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분열시켜 놓았습니다.
이후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불교계에도 사찰령 철폐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7000여명의 스님중 2284명이 연판장에 서명을 했습니다. 종단의 구성을 막던 일제는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허가를 합니다.
드디어 1929년 1월 3~5일 107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승려대회가 열려 종헌제정, 교무원, 종회를 구성했습니다. 처음으로 불교 자주화와 역사성을 계승한 종단이 건설된 것입니다. 승려대회에서 교정(7인)을 선출했는데 53세의 방함암 스님을 비롯 김환응, 서해담, 김경운, 박한영, 이용허, 김동선 스님입니다. 하지만 첫 종단은 1년반정도 있다가 일제의 공작으로 좌절됩니다.
이후 1935에 창종한 조선불교 선종이 60명의 수좌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수좌대회를 열고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스님등 3인을 종정으로 추대합니다.
1941에는 현재의 종계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선불교 조계종이 창종합니다.
조선불교 선종이 친일, 의타성 때문에 종헌체제가 와해된 것이 원인인데,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1937년 2월에 총본산 건설운동이 시작됩니다.
이는 31본산의 전체 승려가 동의하는 총본산(중앙)을 세우고, 인사 및 재정권을 부여하며 한국불교 전체 운영의 틀을 잡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산 태고사를 각황사로 이전했습니다. 각황사를 태고사로 명칭변경 한 것은 태고 보우국사 계승의식이 있어서입니다. 지금은 보조국사 태고보우국사 도의선사등 종조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당시 스님들은 태고보우국사의 후예라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한국적이며 자생적 선종인 조계종이 창종하면서 본사주지 30명이 모여 종정선거를 한 결과 한암 스님이 19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암 스님등 주지 대표들이 상원사를 찾아와 한암 스님에게 종정으로 추대할 뜻을 피력합니다. 그러자 한암 스님은 찾아온 스님들에게 “나는 세상사를 일체 망각하고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을 벗삼아 살아가는 일개 운수납자인 나에게 그러한 중요한 책임은 천만부당하고 내 그림자를 오대산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이 내 신념입니다. 동구불출(洞口不出), 불출산(不出山)해도 불교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승낙하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종정을 역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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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네 번째는 1948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한 것입니다. 70대였던 한암 스님은 1948년 6월 30일 교정에 추대됩니다. 스님은 종단에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 공의를 모으라고 말하며 승가 화합을 강조하는 메시지등을 보내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암 스님의 가르침인 승가 오칙(僧家 五則)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간경입니다. 금강경 화엄경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스님은 선수행자도 경전은 기본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는 선입니다. 참선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는 염불입니다. 불교를 대중화하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포교하기 위해서는 염불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스님은 기본적으로 의식을 알아야 한다며 선방에서도 의식을 가르쳤습니다. 다섯번째는 가람수호입니다. 절을 잘 지키면 민족문화를 계승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중시했습니다.
스님은 항상 스님들은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