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 큰스님이 동산 양개(조동종 창시자 807~869)의 그릇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어리지만 갈고 닦아 볼 만한 재목이구나"라고 말했을 때, 동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자유인’을 말한 이 대목을 읽으니 곧바로 원효대사가 떠오릅니다.
인간은 물론 ‘사회적 동물’인지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좋든 싫든 그 사회의 가치관에 지배되어 자신 삶의 패턴을 다잡으며 살아나가게 됩니다.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는 ‘생사(生死)’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는데, 당시 사회적 제도나 가치관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심지어 불법(佛法)까지도요.
<삼국유사>에는 ‘걸림이 없는 자, 원효(元曉不羈)’라고 하여, 원효의 무애행(無碍行, 경계와 장애가 일체 없다는 뜻)과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던진 그의 파격적인 보살행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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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카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에쇼닌(1173~1232)은 이러한 원효의 인품을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을 원효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가 제작한 ‘화엄연기(화엄종조사회전)-원효도’에는 원효의 행적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장면 장면마다 자신 주변의 풍경과 중첩되면서 자아몰입을 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 ‘원효도’는 당으로의 유학길에 오른 의상과 원효가 큰 비를 만나 한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자던 중 꿈에 귀신에게 시달려 식은땀을 흘리고 깨어난 원효(그림1). ‘어제는 작은 동굴이라고 생각해 그지없이 편안하더니 오늘 시체 유골의 무덤임을 알고 나니 마음이 이리 괴롭구나’.
여기서 바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유심(唯心)’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돈오(頓悟)의 순간입니다. 이 깨달음 이후, 대사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천민들 속에서 거문고를 타고(그림3), 대자연 속에서 달을 노래하고(그림4), 춤을 춥니다. 때로는 경론의 소를 지어 강찬(講讚)하여 듣는 모든 이들을 눈물짓게 합니다.
또 산속에서 좌선하면 새와 호랑이, 이리가 와서 굴복했다고 합니다. ‘지혜는 견줄 것이 없었고 행덕은 가늠키 어려웠다’라고 작품 화기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한 원효의 영향으로, 묘에쇼닌이 평생에 걸쳐 주력한 것이 바로 ‘명상에 의한 의식의 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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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불교 서적에 두루 통달하였고 또 방대한 양(약 일백 권 이상 추정)의 책을 저술하여 높은 학덕으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던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당시 불교계로부터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왕의 통치기간동안 단 한번 열린다는 백고좌 인왕법회는 당 시대 일백 명의 명승들이 참석하여 거행되는 거국적 행사입니다.
그런데 ‘미치광이와 같은 천인을 청할 수는 없다’라는 다른 승려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원효는 참석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합니다. <송고승전-원효전>에도 ‘계·정·혜 삼학에 통달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신의 경지에 올라 만인의 적(萬人之敵)이 되었다’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비범함은 도저히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그의 학덕은 그의 이름 원효(元曉)처럼, ‘새벽의 빛’처럼 그렇게 온 나라를 비추게 됩니다. 신라의 왕비가 악성종양을 앓아 백약이 무효하여 약을 구하러 사신이 급기야는 당나라로 뱃길을 떠납니다. 가던 중, 바다의 용왕을 만나 <금강삼매경>을 얻는데, 이 경의 소(疏)를 짓고 강찬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라 합니다. 지난 회에 소개한 ‘의상도’에서 역시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과 불법을 수호합니다. ‘원효도’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비로자나 대용왕이 나타나 해법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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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누가 이 경을 강의할 것인가? 오직 원효법사라야 이 경을 가히 강의 할만하다’ 그런데, 원효가 혼혈을 기울여 저술한 <금강삼매경>의 주석서 다섯 권은, 황룡사에서의 연설 당일 바로 직전, 시기하던 자가 훔쳐가 버립니다. 이 도난의 현장을 묘사한 장면에는, 이를 목격한 누렁개 한 마리가 목을 뒤로 한껏 젖히고 어두운 허공을 향해 안타깝게 울부짖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원효는 굴하지 않고 삼일을 연기하여 다시 세 권의 주석서(略疏)를 짓는데, 이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 <금강삼매경소>입니다. 드디어 원효가 황룡사에서 강의를 하니,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그의 설법은 가히 만고의 진리가 될 만하였습니다.
작품에 묘사된 원효의 허름하고 누추한 행상은 ‘의상도’의 깔끔하고도 곱상한 진골 출신 의상과 비교됩니다. 항상 단정하고 깨끗한 승복을 갖추어 입는 하얀 피부의 의상에 비해, 원효는 삭발에도 면도에도 전혀 신경을 안 쓴 듯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의상도’와 ‘원효도’ 양자의 화풍입니다. ‘의상도’는 주변 정황을 사실적으로 처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꼼꼼하고 성실한 표현 기법을 쓰지만, ‘원효도’는 사사로운 기법에 구애받기보다는 내용의 맛을 살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과감한 장면 전환, 줌 아웃되는 조감도식 풍경 등 소탈한 듯한 일필휘지의 붓놀림이 서툰 듯 매력적입니다. 마치 원효의 인품과도 닮은 화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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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효는 계율과 불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초월’을 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진실한 내공도 없이 어설프게 원효의 걸림 없는 행적만을 추종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유정신에 누를 끼치는 것이겠지요.
그의 해동화엄은 역으로 불교의 종주국인 중국과 또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금강삼매경소>는 중국에서 당나라 불교학자들에 의해 <금경삼매경론>으로 승격되어 추앙됩니다.
‘론’이라는 것은 아무 주석서에나 함부로 붙이지 못하는 것으로 이 원효의 찬술이 얼마나 높은 학덕으로 지어졌는지를 대변해줍니다. 당시 중국을 정점으로 한 방향 일색으로 흐르던 불교의 커다란 흐름에, 이제는 쌍방향으로 일대 전환이 오게 된 것입니다. 불교철학을 연구하는 한 유명 해외학자는 원효를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종교적 원형’으로 규정하고 그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는 물론 원효가 비춘 ‘빛’이 신라 땅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밝혔기 때문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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