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3월 17일부터 총 6주간 공동 주최하는 ‘제2기 한암대종사 수행학림’에서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원융의 눈으로 보면 깨달음이고, 이원으로 바라보면 분별이 된다”며 이 같이 법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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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 스님은 17일 수행학림 입제 다음날 월정사 대법륜전에서 열린 ‘화엄산림’에서 “본래 원융무애한 자리에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지만, 중생들은 항상 미망의 꿈을 꿔 온갖 고통을 스스로 만들고 받고 있다”며 “화엄경에서 말하는 본래 고요하고 원융한 법성의 세계를 단박에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특히 번뇌 망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10전’ 비유를 들며, 화엄의 핵심 이치인 ‘즉(則)’과 ‘중(中)’ 도리를 바로 알면 단번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1전을 중시하느냐, 10전을 강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가 곧 열이다’는 일즉십(一則十)과 ‘열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십중일(十中一)의 도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중생은 자기를 사랑해달라는 욕망에서 삽니다. 그런 집착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하나를 온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반면, 상대방은 전체 중에 하나로 봅니다. ‘즉’과 ‘중’의 도리가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화엄의 원융에서 보면, 결국 즉이나 중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스님은 또 일반인들을 위한 화엄 신앙법에 대해서도 말했다.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신라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을 외고 독송하면 됩니다. 80권의 방대한 분량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약찬게는 <화엄경>의 구성이 모두 드러나 있고 법성게는 오로지 <화엄경>의 핵심 내용과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법성게와 약찬게를 외면 화엄의 구성과 내용이 그대로 한 목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재가자들의 화엄 신앙을 위해서는 일상에서 지혜를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자기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관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종범 스님 법문 전문.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는 <법화경> 신앙이 주류였다. <법화경> 신앙은 석가모니불과 쌍탑(雙塔)이 중심의 불탑신앙이 핵심을 이룬다. 그래서 석가모니불 혼자 또는 좌우로 보현과 문수보살을 모신다. 탑은 주로 일탑(一塔)의 경우에 석가모니불, 이탑(二塔)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탑이다. 한 곳은 석가모니탑, 다보의 탑인데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탑들이다. 보통 탑이 두 개일 경우에는 모두 <법화경>의 신앙을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쌍탑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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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처음에는 부처님을 모셔도 삼존불이 아니고, 두 분만 모신 경우가 있다. 이것이 <법화경> 신앙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의 경우가 그렇다. 양쪽에 부처님이 크게 모셔져 있고, 한 가운데에는 작은 보살상이 있다. 일반 불교미술학자들은 보살을 주불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나는 불교학논문집에 발표하기를, 태안 마애삼존불의 가운데의 조그마한 보살은 주불이 아니고, 공양하는 보살상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품’에서 “무진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보배 구슬을 공양 올렸는데, 관세음보살이 공양 받고 반으로 나눈다. 하나는 석가모니불에게, 또 하나는 다보여래부처님에게 올린다”고 했다. 태산 마애불의 왼쪽 부처님은 구슬을 갖고, 가운데 보살상이 구슬을 갖고 있는데, 오른쪽 부처상에서는 구슬이 없다. 한쪽 부처님을 공양을 올리고, 나머지 부처님한테는 공양을 못 올린 것이다. 단지 조형상 예배를 올리는 보살상을 가운데에 표현됐을 뿐이다. 이는 보살이 오른쪽 부처님에게 공양하려고 있는 것이다. 근거는 <법화경> 관세음보살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랬더니 불교미술학회에서 처음 주장된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동조도 반대도 없다. <법화경>에는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이 많이 나온다.
그러다 800년이 넘어가면서 비로자나불이 보편화된다. 9세기를 분기점으로 <법화경> 신앙에서 <화엄경> 신앙으로 전환된다. 법화신앙과 화엄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는 같은 석가모니불이라 해도, 법화신앙에서는 석가모니불은 어디까지나 사바세계에 있는 교주이다. 영산회상의 부처님이다. 하지만 화엄 신앙에서는 100억 화신의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다. 법화신앙에서는 사바세계의 교주이자 영축회상의 교주지만, 화엄에서는 1000억 화신으로서 석가모니불이다.
화엄 신앙의 대표적인 것이 오대산 신앙이다. 가령 지장신앙은 밀교신앙이 되고, 아미타는 정토신앙, 관세음은 법화신앙, 아라한은 초기소승불교다. 종파불교 또는 초기 불교의 안목에서 보면 그렇다.
그런데 화엄 신앙에서는 관세음보살도 비로자나불의 화신이고, 아미타불도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아미타불이다. 아라한도 그렇다. 모든 것이 석가의 화현이다. 그 석가는 비로자나불의 석가다. 이렇게 된다. 그래서 화엄 신앙을 이해해야 한국불교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강조하고 싶다. 형태는 아미타불인데, 정토종 신앙의 아미타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100억 화신 가운데에 한 아미타불이다. 형태는 아라한인데, 초기불교의 16아라한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아라한이다.
전형적인 모습이 오대산 신앙이다. 중대는 비로자나불을, 미타, 동쪽은 관음, 남쪽은 지장, 북쪽은 아라한이라고 했다. 이 화엄 신앙에서 석가모니불이 단순히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이 아니고, 1000억 화신 석가모니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삼불이 원융하다 해서 화엄 신앙이다. 삼불이 원융하다는 것은 비로자나불로서 부처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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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이 법신 보신 화신불이다. 하나가 있는 곳에 셋이 다 있고, 셋이 있는데 곳에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삼불원융(三佛圓融) 화엄신앙’이다. 이 신앙이 깊게 들어가면 ‘십신(十信)’이 된다. 그래서 화엄신앙을 ‘삼불원융십신신앙’이라고 한다. 삼불이 원융하고 십신이 무애한 신앙 구조가 모든 의식에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다. 그래서 아라한을 불상으로 모시는 것은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아라한이고, 밀교신앙의 약사여래불도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약사여래불이다. 이것이 삼불원융, 십신무애란 화엄 신앙의 근본이 된다. 이런 신앙의 기반을 깔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이고, 화엄 신앙을 조명하지 않고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공부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화엄경> 또는 <화엄부>라고 한다. 이는 80권 60권 40권 등 권수별로 부를 때는 <화엄경>, 이를 합쳐 부를 때는 <화엄부>라 한다. 보통 80권 <화엄경>을 갖고 공부를 한다. 화엄학의 대가였던 중국 청량 징관선사가 편찬한 <신역화엄경칠처구회송석장(新譯華嚴經七處九會頌釋章)>에 따르면, 화엄경의 방대함과 기본 골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엄경은 권수가 80권이고, 게송만 4만5천개다.
7곳에서 9회의 법회를 열었고, 각 품과 장은 39이다.
차경팔십권(此經八十卷) 사만오천게(四萬五千偈)
칠처구회설(七處九會說) 삼십구품장(三十九品章)’
그럼, 일곱의 곳과 아홉 번의 법회를 연 곳은 어디인가? 처음 법회 연 곳은 보리수 밑이고, 2회는 보광전, 이후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천에서 법회를 봉행했으며, 7ㆍ8회는 다시 보광전에서 설법했다. 마지막은 인도 기원정사에서 했다. 초회보리장(初會菩提場) 이회보광전(二會普光殿) 삼회도리천(三會忉利天) 사회야마천(四會夜摩天) 오회도솔천(五會兜率天) 육회타화천(六會他化天) 칠팔중보광(七八重普光) 구회급고독(九會給孤獨) 등이 <화엄경>의 주요 구성 목차다.
흔히 7처를 말할 때는 지상 3처, 천상 7처라고 한다. 또 품수는 초회보리장 6품, 2회보광전 6품, 3회 도리천 6품, 4회 야마천 4품, 5회 도솔천 3품, 6회타화천 1품, 7회 보광전 11품, 8회 보광전 1품, 9회 급고독 1품 등이다. 이를 ‘7처 39품’이란 숫자가 나온다.
이후, 대중들을 위한 화엄 신앙이 나온다. 이것이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다. 80권의 방대한 분량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려워 주로 약찬게를 외고 법성게를 독송한다. 가장 손쉬운 화엄경 공부다.
먼저 약찬게는 <화엄경>의 구성이 드러나 있다. 약찬의 ‘찬’은 ‘엮을 찬’이다. 품수와 등장 인물과 품수의 이름 등의 중요한 정보와 항목을 묶여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사상이 없다. 반면 의상 스님의 법성게를 보면, <화엄경>의 구성에 대한 말을 일체 없고 오로지 그 내용과 사상이 담겨있다.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우주와 깨달음을 도표로 구성한 것이 법성게다. 그래서 법성게를 ‘반시(盤詩)’라고 한다. 도표와 그림이 함께 간다. 법성을 노래한 뜻이다. 법성게는 순전히 화엄의 내용만 말한 것이다. 약찬게는 그 구성을 말한다. 그래서 법성게와 약찬게를 외면 화엄의 구성과 내용이 그대로 한 목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7언 30송 210자’도 된 법성게의 구절을 살펴본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불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법성은 원융해 둘이 없고, 제법은 부동해 적멸상이다.
이름도 모양도 모두 없으니, 증득한 지혜로만 알 수 있다.’
그럼, 법성이 무엇인가? 온 우주 법계의 본성이다. 그것은 원융해서 둘이 없다. 원융은 시작이 바로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원융이다. 그래서 진리에는 둘이 없다. 그런데 생각에는 둘이 있다. 그래서 법성과 생각이 들어맞으면 되는데,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어제는 그랬는데 오늘은 왜 그럴까?’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있고 없음 등으로 나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둘이 아니다. 원융이다. 원융성으로 보면 깨달음이고, 이원성으로 보면 분별이다. 분별은 둘로 갈라보게 한다. 모든 고통과 대립은 둘에서 오는 것이다. 둘로 나눠보면,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원융에서 보면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을 집착할 것도 못 되고, 나쁜 것을 싫어할 것도 못 된다. 이것이 법성원융무이상이다.
그래서 제법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고요하다. 그런데 법성의 세계를 어떻게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그릴 수가 있는가? 인간은 지혜와 생각이 있는데, 생각은 항상 둘로 보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생각이 곧 둘이다. 그런데 지혜로 보면, 본래 고요함과 원융을 볼 수 있다. 이는 지혜로 느껴지는 세계다. 이름도 모양도 모두 없으니 증득한 지혜로만 말 할 수 있다.
문제는 ‘지혜와 생각’이다. 지혜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생각에 메이면 모든 고통이 생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과 재능이 아니다. 요즘은 지식적 카리스마를 요구한다. 그런데 지식과 재능만으로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자기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행복과 불행은 ‘자기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가’에 있다. 매우 중요한 문제다. 작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모든 일을 한순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 감정의 성격은 무엇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상 스님의 유명한 ‘10전’ 비유로 이를 알 수 있다. 동전 10개의 비유가 있다. 동전 10개를 보는 관점이 있다. 1전을 중시하느냐 10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전체로 보면 10전도 1전에 의해 생긴다. 문제는 1 또는 10에다 중심을 두느냐다. 이것이 ‘즉(則)’과 ‘중(中)’이다. 즉은 일즉십(一則十), ‘하나가 곧 열이다’는 관점이고, 중은 십중일(十中一), ‘열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관점이다. 같은 하나인데, 이 하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를 곧 열이라는 것과 하나는 전체 중에 하나일 뿐이란 관점이다. 그런데 감정은 자기를 사랑하는 노력이기에, 자기 나 하나를 모두 우주로 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사람도 우주도 없다는 생각이다. 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들을 전체 중에 하나로 본다. 이것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과 다른 이가 나를 보는 데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보고 나를 나와 같이 사랑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느냐면, 그 이유는 사랑받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다. 싸움도 사랑해달라는 요구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도 사랑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방법이 틀렸다. 고함치는 것도 나를 사랑해달라는 것이다. 폭력 행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사랑을 요구하는가? 자기가 보면, 자기가 모든 것이다. 일즉십이다. 이 세상에 자기 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은 왜 나를 나처럼 봐주지 않는가. 즉 열중이의 시각이 부딪치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달라고, 사랑해달라고 그런 욕구를 갖고 있다. 이것이 감정이다. 감정은 둘로 보는데서 온다. 나와 나 아닌 것, 즉 본래 고요하다는 법성은 원융하다는 지혜가 없는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죽음 등으로 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이 보여 지니, 철저히 나를 보호하려고, 그래서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갖기 하기 위해서 화내고 고통을 받는다. ‘왜 화내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모두 나를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다. 마음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모두 자기 사랑을 위해 표현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감싸주면, 그대로 그 마음이 녹아든다. 자기주장, 자기 의견, 자기표현은 옳지 않다. 문제는 사랑받을 짓을 모른다는 것이다. 중생의 윤회 세계가 이렇다.
보령 성주사지 만해무념 국사 화상 비문에 “이 몸에는 주인도 스승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몸의 주인(身主)은 무엇인가? 마음이다. 그럼 마음의 스승(心師)은 무엇인가? 몸이다. 몸이 공경하면 마음이 따라 공경하고, 몸이 근면하면 마음도 부지런해진다는 이치다. 마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화엄과 연관된 수행가풍이다. 마음의 주인을 중시하고, 몸의 스승을 경시하는 가풍이 있는데, 한암 스님의 가풍은 그렇지 않다. 몸을 마음의 스승으로 봤다. 그래서 전쟁 통에서도 좌정하신 한암 스님의 수행이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자, 몸은 마음의 스승이란 말을 깨치면, 삶과 죽음의 경계도 간단히 해결된다고 본다.
법성게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불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지혜의 무진보로 온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한다.
실제의 진실한 중도상(본적상과 원융성)에 앉으면 예부터 그대로니 부처이다.’
다라니는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다는 뜻이다. 즉 지혜다. 총지(總智)가 다라니다. 보배로 말하면,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지혜보배라는 것이다. 지혜로써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일으키면 무진보다. 얼마든지 사랑을 만들고 줄 수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자기도 남도 괴롭히는 것이다. 지혜로써 알고 보면, 항상 원융무애한 중도상에 앉아 있다. 본래 원융무애한 자리에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다. 다만 꿈을 꿔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꿈을 깨면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닫고 보면,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없다. 그대로 부처다. 이것이 화엄의 골수다.
이를 의상 스님이 법성게를 설명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권상1에서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라 했다. ‘가는 데마다 본래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 출발지’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본래자리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에 사로잡혀 죽고 살 걱정으로 고통을 받는다. 가나오나 본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둘로 보는 생각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다 해도 꿈을 꾸면, 자기 집인 줄 모른다. 꿈을 깨면 본래 자기 집임을 안다. 교학이든 철학이든 수행이든 <화엄경>은 엄청난 가르침이다.
오늘 강설한 부분은 <화엄경> 초회 6품에는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등이다. 그럼 이 부분의 내용은 무엇인가?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불했을 때의 광경을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경전에는 이렇지 않다. 초회 6품은 부처님이 성불한 세계를 설명한다.
화엄의 부처님을 어떻게 표현할까? 대방광불이고 한다. 대방광불은 부처님의 세계다. 원효 스님 <화엄경서문>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은 법계가 끝이 없는 세계다. 법계는 지혜의 세계다. 인간에게 지닌 지혜가 곧 불지혜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성이다. 좋은 지혜를 잘 펴 쓰면, 무궁무진하다. 이를 대방광”이라고 한다. 여기서 대는 끝이 없고, 방은 법칙이 있고, 광은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체와 용이다. 지혜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것이다. 이를 부처님이 화엄을 한다고 한다. 부처님이 온갖 공덕의 꽃을 피워 우주 법계를 꾸민다. 화엄에서 장엄불, 선에서는 자성불이라 한다. 그래서 화엄경 수행은 보현행원, 선은 무념수행이다. 화엄과 선 수행의 차이점이다. 화엄수행을 온갖 공덕을 짓고 회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보살은 자기 지은 복을 자기가 탐하지 않는다. 복은 많이 짓되 항상 보시하고 회향하는 것이 화엄수행이다. 회향하지 않으면 자기 사업과 이익 몰두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념수행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수행이다. 집착인 애증을 놓는 것이다. 인간에게 비극이 생기는 까닭에 여기에 있다. 아집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좋고 싫어하는 감정이다. 여기서 윤회한다. 역대 선사들은 눈감고 보지 말고 귀 막고 듣지 말라 했다. 부처님은 무엇을 보든 무상함으로 알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면 고통만 있지, 허망한 이치를 안다. 이를 살펴 아는 것은 지혜고, 그것을 살피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선정이다. 보되 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그것이 정혜쌍수다. 정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혜는 보는 대로 아는 것이다. 집착해서 망상을 안 일으키면 무념선정이다. 보되 좋고 싫음의 애증을 안 일으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승선정이다. 화엄이 바로 그렇다. 만행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선, 초회 6품의 ‘제1 세주묘엄품’에서 기막힌 시작을 볼 수 있다. <화엄경>은 ‘시성정각(始成正覺)’, 처음부터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출발한다. 그 다음은 정각의 세계를 설명한다. 깨닫고 보니 보이는 세계부터 달라졌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난야 법보리장에서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었다. 그 땅은 견고하여 금강으로 됐다. 가장 묘한 보배들과 여러 가지 훌륭한 꽃과 깨끗한 마니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므로 온갖 빛깔들이 그지없이 나타났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성불에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지혜로써 해결되고 완성된다. 지금 이 순간 무량한 업겁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데 걸림이 없게 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에 들어가 평등하고 몸이 일체 세간에 가득해 없는 데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고 우리들의 세계다. 시공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시공을 극복하는 불교의 방법이다. 지혜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지혜를 얻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제2 ‘여래현상품’의 핵심은 다음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부처님 몸이 온 법계에 가득하니, 일체중생 앞에 모두 나타나시었다.
인연 따라 가지 않는 데 없지만, 언제나 보리좌에 항상 계신다.’
‘불신상현현(佛身常顯現) 법계실충만(法界悉充滿)
항연광대음(恒演廣大音) 보진십방국(普震十方國)
부처님 몸이 항상 나타나 법계에 가득히 찼다.
늘 광대한 음성을 내어 시방국토를 모두 진동하신다.’
이는 바로 지혜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는 의미다. 깨친 마음의 지혜 세계가 못 깨친 생각의 세계와 다름을 말하고 있다. 어둠과 공포를 만드는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지혜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리석은 업력에 빠지면 고통 없는 곳에서 고통을 만든다.
우리는 <화엄경>을 통해 일상에서 지혜를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혜로 돌아가면 모두 해결된다. 어리석은 감정을 해결하려면,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학습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관조(觀照), 자기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기 챙기고 돌아보는 노력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원망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마음 챙기는 수행이 더욱 필요하다. 자기 마음을 늘 관조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바라는 마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바라는 대로 해주질 않아 고통스럽고 미운 그 마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바라는 마음을 늘 들여다보면, 상대방이 밉지 않다. 이것이 관조다. 다음은 수련이다. 마음공부다. 끊임없이 닦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공부를 제대로 익히면, 자기 마음을 스스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