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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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둘 아님 보여준 가르침 새겨야”
정념 스님, ‘한암대종사의 입멸관’ 주제로 선강의
“앉은 채로 열반에 든 한암 스님은 나고 죽음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하게 쓰는 법을 확연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둘 아님을 중생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줬던 것입니다. 생사를 자유롭게 넘나든 스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완전한 열반을 증득하라는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한암 스님의 입멸관에서 대해 강의하고 있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사진=고영배 기자


월정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3월 17일부터 6주간 공동주최하는 ‘제2기 한암대종사 수행학림’에서 주지 정념 스님은 ‘한암대종사의 입멸관’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이 같이 강조했다.

스님은 특히 “한암 스님의 열반모습은 가도 어디로 갔다든지, 와도 어디에서 왔다든지 하는 중생들의 양극단적인 견해를 경계하는데 큰 가르침이 있다”며 “양변을 떠나지 못해 갖는 생사의 의문을 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 등의 승가오칙을 실천하고 증득해 풀어야 한다”고 강의했다.

월정사 대웅전 앞뜰에 서있는 팔각구층석탑. 사진=고영배 기자


스님은 또 “실제 죽음이란 마주침에 일대사의 자신 경계심이 모두 다 드러나게 된다”며 “한암 스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도 절대 흔들림 없이 여법한 모습을 보여 스스로 일생의 수행을 점검한 선지식이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념 스님 강의 전문

궁극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는 인간사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일대사인연은 죽고 사는 문제를 말합니다. 바로 종교도 수행도 생사의 문제를 극복할 때, 비로소 완전한 행복으로 갈 수 있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결국 진리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진리의 실상에서는 오고 가고, 나고 죽음이 없습니다. 즉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릇된 진리의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오류적 몽상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몽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깨뜨리려면, 진리를 증득하고 깨달음을 성취해야 합니다. 깨달음의 실상에서는 오고 감, 나고 죽음이 원래 ‘둘이 아니다’는 것을 확연한 자기 체득 속에서 생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1951년 음력 2월 14일, 오대산 상원사에서 열반하셨던 한암 스님이 그랬습니다. 한암 스님은 마지막 열반 모습에서 바로 그런 생사가 둘이 아님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용무생사(用無生死: 생사 없는 도리를 씀)를 확연히 우리 앞에서 보인 것입니다.

한암 스님 진영.


당시 한암 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는 양력으로 초봄에 해당되지만, 겨울이 긴 오대산 상원사는 여전히 눈 덮인 산하(山河)였습니다. 상원사 선원은 6. 25 동란으로 인하여 대중은 모두가 남쪽으로 피난가고 선사(禪師) 옆에는 오직 한 명의 시자였던 만화(萬花)스님과 공양주보살뿐이었습니다. 상원사가 불태워질 처지에 놓인 것을 온 몸으로 막으신 스님은 봄에 이르러 미질(微疾)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7일 째 되던 날 아침, 일찍 스님은 시자를 불러서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하고 물으시고는, 아래 마을로 심부름 보낸 뒤 가사와 장삼을 수하시고는 단정히 가부좌하고 앉으시어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옆에는 공양주보살이 조실스님 방을 청소하고 있었지만 평소 늘 참선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참선을 하시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암 스님의 열반 모습은 좌탈입망(坐脫立亡) 가운데 ‘좌탈(坐脫)’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한국의 고승 가운데 열반할 때, 좌탈한 예는 아마 한암 스님 한 분일 것입니다. 앉은 채로 그대로 열반을 맞이한다는 것은 금강석 같은 수행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거의가 다 죽음에 이르러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설사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음을 하거나 신체를 가누지 못합니다. 부처님이나 한암 스님처럼 자신의 육체가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고 또 가는 날을 안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범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앉은 채로 열반에 든 한암 스님의 모습. 사진은 당시 정훈장교였던 김행기 불자가 찍은 것으로 현재 국방부에 보관돼 있다.


이처럼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하게 썼던 한암 스님의 가르침에도,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늘 생명의 불안감과 공포를 느낍니다. 때문에 완전한 행복의 성취가 어렵습니다. 물론 우주는 근본적으로 텅 비어있고 허망하지만, 그 이치만을 갖고 실제 생사의 문제를 초탈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수행을 통해 자기 스스로 증득할 때, 생사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암 스님의 열반은 삶과 죽음을 자유자재하게 넘나드는 모습을 직접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사는 재가자들은 스님의 열반상을 보면서 이를 알아야 합니다. 또 자기 자신과 객관계를 바라보는 정견이 선행돼야 합니다. 나와 객관계가 본래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7년 동안 산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특히 생전에 그 흔한 법문집조차 남기지 않았던 한암 스님이 간화선 수행의 공부법을 간명직결하게 규명한 문집인 <선문답21조>에서도 스님의 이런 열반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선문답21조> 가운데 20조에서 보면, 어떤 수행자가 한암 스님에게 “이미 생사를 초탈했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나누어짐에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일면불(一面佛) 월면(月面佛)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암 스님의 부도탑.


이 조문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근본 실상에서는 가고 옴의 문제가 결국, 가도 어디로 갔다든지 와도 어디에서 왔다든지 등 우리의 중생계의 양단적인 견해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생사의 견해는 양변을 떠나지 못해 갖는 의문인 것입니다. 본분의 문제는 ‘있다 없다’의 유무 차원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리의 궁극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문 자체는 스스로 증득해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치로 설명하고 자신의 지식이나 알음알이로 이해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생사의 문제, 나고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철저한 수행과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암 스님의 일생이었고, 마지막 앉아서 열반에 든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실제 죽음이란 마주침에 일대사의 자신 경계심이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천하의 도를 말하고, 호언장담을 해도 실제로 죽음이란 본분에 부딪혔을 때 흔들리지 십상입니다. 한암 스님은 이런 죽음에 있어 절대 흔들리지 않고 여법한 모습을 보여 일생 수행의 점검 을 스스로 하신 것입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오복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인연을 분연히 맞이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든 상관없이 생사의 이치를 확연히 타파한 수행자에게는 복이 있고 없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죽음에 대해 본래 가고 옴이 없음을 깨달으면, 죽음도 혼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을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수행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창 월정사=김철우 기자 |
2006-03-18 오후 8:30:00
 
한마디
멸빈자 사면....휴...아래 수좌..진정 수좌인가?...조계종 수좌들도 이젠 다 되었네...멍청하고 무지한 이들만 넘치는 군....
(2006-03-19 오후 8:18:26)
53
정념스님, 한암종사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분이 양변을 여의고...라는 가르침을 왜 받들지 아니하고 멸빈자의 사면을 팔걷어부치고 반대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나요 스님이 도법스님의 ...안에 들어 있다더니 사실인가요
(2006-03-19 오후 12:25:34)
58
중생 때가 되면 다 죽는 법, 좌탈입멸이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니다. 심지어 '사리'가 나와야 큰 스님이라고 주장할 이유도 없다. 생전에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한암대종사를 추모하는 것은 '잘 죽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수행정신을 남기셨던 모습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2006-03-19 오전 12:29:30)
52
허공에 구름잡는 얘기 그만해야한다. 그저 길거리에서 고통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감로수 한그릇 이 더 필요한 시대다. 직장마다 야수쟁이 등살에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고 곳곳에서 하소연하는 소리를 못 듣는가???
(2006-03-19 오전 12:19:46)
51
조사선 선불교의 독창성은 스스로 석가가 되는 것이다. 하물며 석가를부정할 진대 조사를 들먹이지 말고 스스로의이시대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 말리 바로 법어다.
(2006-03-18 오후 10:00:43)
50
언제까지 한국 불교가 죽은 선사를 팔아 먹고 살 것인가? 산자의모습으로설법하라.....................................
(2006-03-18 오후 9:58:47)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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