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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주암 원통보전에 주석하고 계시는 정관 스님의 일상에는 동네 뒷산을 하루도 빠짐없이 몇십년 간 오르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평범 가운데의 위대함이 곳곳에 스며있다.
몇십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스님의 일상가운데는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것이 몇가지 있다. 30년째 매일 불(佛)자를 10장씩 쓰는 것, 매일 아침 15분정도 하는 보건 체조, 어김없이 실행되는 하루 9시간 30분의 정진이 그것이다.
반야심경을 써서 스님께 선물로 가져온 어떤 신도에게 감응을 받아 불(佛)자를 쓰기 시작했지만 3년 정도는 괜히 붓글씨 시작했다는 후회로 자신과의 싸움도 많았다. 의지를 넣어 3년을 넘어서자 매일 10장의 불(佛)자 쓰기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 후에야 불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작품을 별도로 쓰는 일이 시작됐다. 낙관을 찍는 회수가 많아지자 돌이나 나무로 만든 낙관이 닳아 벌써 네 개째 다시 팠다. 낙관과 종이의 마찰에 의해 낙관의 면이 닳는 것을 보면서 스님은 겁(劫)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해보게 되었다고 했다. 사방 4천리 되는 돌산을 천인이 천의를 입고 백년마다 한번씩 스쳐 그 돌산이 닳아 없어질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겁(劫).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이 스님의 일상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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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째 해온 일이지만 체조만은 어쩐 일인지 아직도 하기 싫은 마음이 나는 거야. 팔만사천 마구니 가운데 일등 마구니가 이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거든. 비가 오면 한번 하지 말까 하는 마음이 들고 아직도 의지가 좀 들어가야 돼. 자연으로 완전히 넘어가질 못한 거지.”
그렇지만 스님의 보건 체조는 의지를 넣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기 싫다고 안하면 몸 건강이 유지가 안되지. 큰 일 나.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올라가기가 어렵잖아. 하기 싫다고 안하면 자기 의지는 죽어버려. 자기 의지가 없으면 자기 인생은 없는거라. 내 일상은 ‘하고 있음’과 ‘함’에 대한 기쁨으로 일관돼 있어. 생각해봐. 만약에 내 몸이 여기 저기 아파서 병원에 가기 바빠면 이 일과를 못 지키잖아. 그러면 내 인생도 끝난 것이지. 그러니 하고 있다는 것하고 하고 있음에 대한 기쁨만 갖고 있으면 잘사는 거라. 그리고 그 함을 다음생까지 가져가야 돼. 그것이 안되니까 쳐지고 자기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거든. 수행도 그렇고 일상도 그렇고 함에 대한 기쁨이 없으니 허무주의에 빠져서 다른 것을 자꾸 추구하는 거야. ‘하는’ 과정이 곧 결과야. 함에 대한 기쁨, 그것이 성불이라. 결과에 대해서 논하면 아직 의식이 덜깬 거라. 다른 결과를 바라고 자꾸 허둥대지 말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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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몇 년만에 스님을 찾았다며 스님 한분이 앉아 있었다. 단소를 잘 하시는 스님으로 미국에서 공연을 자주 하신다는 그 스님을 향해 정관 스님은 즉석 연주를 권하신다. 단소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단소를 부는 스님을 지긋이 바라보던 스님은 연주가 끝나자 박수까지 치시며 기뻐하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른 사람 같으면 좋은 무대가 아니면 연주 안한다고 자존심 내세울수도 있는데 이렇게 선뜻 응해주니 저런 마음이 바로 보살심이야.” 대단한 칭찬이다. 대체로 후한 점수를 주는 스님이지만 공부 지도에는 에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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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시작된 스님의 하루는 아침 공양후 잠시 쉬는 것으로 마디를 짓는다. 이때 스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스님이 해가 중천에 떠도록 잠을 자는가’하고 오해를 하기도 할테지만 스님은 몸을 쉬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몸을 억지로 붙들어 장좌불와를 한다해도 모양새로만 하는 공부는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스스로에게 엄중하기에 그만큼 스스로를 보살피는 일에도 철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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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두가 스님이 일평생 공부를 통해 터득한 ‘하고 있음’에 대한 즐거움에서 비롯된다. 매일 아침 스님은 광안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방앞 난간에 앉는다. 영주암유치원에서 가져온 조그마한 의자에서 신심명이나 약찬게를 외는 그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부처님 경전보다 더한 명작은 없다고 매번 감탄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스님을 찾아 뵌 날, 다음날 있을 감로사 수계법회 법회에서 하실 게송을 미리 지어놓고 불자들을 만날 준비를 미리 하고 계셨는데 그 다음날엔 서울 법회가 예정돼 있었다.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거리 여행시 스님은 미리부터 안전한 여행을 발원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정성을 다하는 스님의 일상이 그 발원속에 담겨있다. 그렇지만 스님의 모든 발원은 큰 원(願) 하나로 귀결되고 있다. ‘이뭣꼬’ 참구로 시작해서 ‘이뭣꼬’ 참구로 끝이 나는 영겁을 이어가겠다는 원을 발했기 때문이다.
정관 스님은
스님은 1970년 영주암에 온 이후 지금까지 영주암에 계신다. 처음 왔을때 옮겨 심은 대나무가 땅밑으로 뿌리를 내려 도량 건너편까지 대숲을 이뤘다. 대나무가 굵은 마디를 만들고 숲은 이루는 세월 30여년, 그동안 한결같이 영주암에서 주석하고 있는 정관 스님의 ‘존재’가 대나무숲의 푸른 바람처럼 대중들에게 불어오고 있다.
1933년 경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1954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범어사에서 14안거를 성만했다. 범어사, 영주암 주지를 역임하며 대중 외호에 힘써왔고, 금정학원 이사장, 부산불교연합회 회장,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이사장 등 사회복지, 어린이 포교 등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왔다.
틈틈이 쓴 원고를 모아 <죽음이 없는 樂> <인도성지참배> <하늘같은 자유>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간화선과 염불의 차이점를 밝히고 간화선 수행의 지침서가 될 <간화선의 길> 출간을 앞두고 있다.
정관 스님 법문
평균 수명 백세 시대가 왔습니다. 평균 백세시대를 맞아서 복지(福祉) 백살이 돼야 되는데 아무 생각없이 세월만 보내면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평균 수명 백세시대가 고통의 백살, 천덕꾸러기 백살이 안 되고 건강의 백살, 복지 백살이 되도록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신심(信心)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이 없으면 절대로 복지 백살이 될 수가 없어요. 물질로 하는 복지는 다함이 있지만 신심의 복지는 무한이고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심의 복지는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에서 일으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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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것을 안다고는 하지만 찬 것은 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해부를 해봐도 ‘차다’하는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안 믿고, 모른다고 안 믿으면 신(信)이 없습니다. 신이 없으면 설 땅이 없는 거와 같아요. 태중 이전의 이 알 지(知)을 안 믿으면 자기라고 하는 것은 그저 섞어지는 육신밖에 없게 돼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듣고 하는 이 마음,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이것은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점을 못 찍어요. 점을 찍을 수 있었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벌써 찍었겠지만 석가모니 부처님도 못찍었는데 누가 감히 점을 찍어요? 점을 못 찍으니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이거 빼놓고는 안식처가 없어요.
이제 알 지(知)가 있다고 알았으면 체험을 해야 됩니다. 체험을 해야 달관자가 되고 증득자가 되는 겁니다. 지식을 놔 버려야 합니다. 경을 읽어 아는 것으로는 자기 안식이 안 됩니다. 지식을 놓으려고 하면 참선공부를 안하면 안됩니다. 참구하고 참구하는 것으로 본래 알 지(知), 즉 본래지(本來知)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그 알 지(知)를 증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염불이라고 하고 간화선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송화두(염불)와, 간화선이라는 말을 씁니다. 간화선과 송화두 즉, 염불의 차이점은 화두는 벽을 뚫고 들어가는 힘이 있다면 염불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힘은 없어도 벽을 맴돌고 있는 겁니다. 맴돌고 있으니 다음에 뚫을 채비를 갖춘 셈이지요. 그리고 화두의 생명은 의문이 붙어야 합니다. 의문이 붙어 그 의문을 늘 참구해 들어가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의문이 없는 공부는 향상이 없어요. 마치 입에 자갈을 물고 잇는 것과 같아서 갑갑하고 힘이 들어요. 의문이 안나는데 억지로 앉아 있으면 상기가 되고 지겹고 공부에 진전이 없게 됩니다. 그럴때 나는 송화두를 하라고 권합니다. 반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반복하다 보면 거기서 어느때인가는 스스로 의문이 날 때가 있습니다. 오로지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해 나가겠다는 그 지극정성, 분발심, 이것만이 자기 구도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송화두든 간화선이든 하고 있는 이 자체가 결과라는 것을 알고 다른 결과를 바라지 마십시오. 결과부터 먼저 바라니 결과가 자기가 바라는대로 안 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리고 실패자가 돼요. 흔히 사람들이 여러 공부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하고 있음에 대한 집중과 즐거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상중에는 자기 직분에 대한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이 자기 직분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겁니다. 모두 판검사를 해야 직정이 풀리지만 판검사만 있어서는 세상이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판검사를 안하면 자기 직분에 대한 긍지가 없어요.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이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선진국은 안 그렇습니다. 일본같은 경우도 이발사가 5대 내려가고 국장사가 6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국이 맛이 없을수가 없고 이발이 멋이 안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계적인 선진국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얼마전 신문에서 경복궁 보수를 끝내고 기념식을 하는데 그 보수를 맡은 도목수를 말단에 앉히고 꽃다발 하나도 대접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봤어요.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이고 못나고 뒤떨어진 생각 수준입니다. 장관이 열명이 있어도 도목수 그분이 없으면 경복궁 보수 못하잖아요? 그러니 장관도 있어야 되고 기술자도 있어야 되고 모두 평등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범어사에 있을때 청소차가 늦으면 “오늘 지장보살님이 왜 이리 늦나?” 그랬어요. 청소하시는 분들이 조금만 늦게 와도 도량에 냄새가 나요. 그분들이 없으면 거리가 더러워서 못다녀요. 그러니 그 분들이 중생들을 위해 나퉈주는 보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니 어떠한 일을 하든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긍지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요, 멋진 생활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 말하고 듣고 보는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촉발시켜 의문을 참구하십시오. 의문이 붙어서 의문을 가지고 참구하고 참구하다보면 어느때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춤도 절도 나오고 결정신자가 되는 겁니다. 답이 안나오면 결정신자가 아니예요. 그저 믿을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 모름에 대해서 알려고 추구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해 보십시오. 그 몰두에서 즐거움이 나옵니다. 끝이 없는 마음을 쏟을 때가 없으면 병자가 됩니다. 서양의 문화는 말하고 듣는 이 것에 대한 참구가 없으니까 자꾸 바깥으로만 마음 쏟을 데를 찾으니 더욱 더 갈증을 느끼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가지고는 안식이 없어요. 참구하고 참구하다 답이 나오면 안식자(安息者)가 되고 그 안식은 시방세계에 가득합니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으면 결정신자가 되어야 하고 독거락(獨居樂)을 누리는 영원한 안식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