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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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쓴 바랑 하나와 전화번호 7개가 전부"
[큰스님 편안하십니까]예산 향천사 천불선원 선덕 대용 스님
수행자는 드러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스님의 뜻과는 달리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노출되고 이로 인해 이른바 ‘유명 스님’이 되기도 한다. 대단한 결례다. 때문에 큰스님을 찾아뵙고 썩 유쾌하지 않은 객(客)이 되어 스님의 일상을 엿보고 법문을 청하는 일은, 개인적으론 마음 설레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 향천사 염화실에 주석하고 계신 대용 스님(천불선원 선덕)을 찾아뵙는 것도 그랬다. 평생 상좌 한 명 두지 않고, 종단의 소임 한 번 살지 않은 채 50여년을 대중선방에서 정진하신 대용 스님을 지면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크나큰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가벼운 춘설(春雪)이 내린 3월 2일, 한적한 촌로(村路)를 따라 향천사에 닿았다. 지난해 동안거에 든 후 갑자기 몸이 불편해진 대용 스님을 극진히 보살피고 있는 향천사 주지 옹산법광 스님이 기자를 염화실로 안내했다. 스님은 병환으로 인해 시자들의 도움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쇠약해졌지만,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형형(熒熒)한 운수납자(雲水納子)의 그것이었다.

향천사 천불선원 선덕 대용 스님은 출가 후 상좌 한 명 두지 않고 종단의 소임 한 번 살지 않은 채 50여년을 수행에만 매진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조용하던 거처가 취재기자, 사진기자, 동영상 촬영기자 등으로 번잡해짐에도 스님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대용 스님을 찾아뵙는 무구 스님(향천사 유치원장)은 곁에서 “예전 같으면 조용히 자리를 물리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가 후 50여 년 동안 상좌나 알은체 하는 신도 한 명 두지 않으실 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1929년 일본 경도(京都)에서 아버지 김봉학, 어머니 하순이 사이에서 태어난 스님은 43년 복강현 전천군 향순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한 후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45년 서울 체신학교 우편과를 수료하고 대구시 중앙우체국 사무원으로 재직하다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일등상사로 7년 만기 제대했다. 군 복무 당시 상주 화령 전투에서 전우들을 잃으면서 인생의 근본에 대해 고뇌하며 방황하게 된 스님은 제대 후 복직 대신 불법(佛法)을 찾아 나서는 길을 택했다. 불연(佛緣)을 맺기 위해 여러 사찰을 전전하던 중 사형(師兄)되는 희묵 스님의 안내로 예산 향천사로 출가, 58년 보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당시만 해도 체신학교를 수료하면 엘리트라 칭송받고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은사 스님으로부터 ‘수행자는 참선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적정처(寂靜處)를 찾아 62년 청암사 수도암을 시작으로 오로지 수좌의 길을 걷게 된다. 부안 월명암, 부산 선암사, 문경 김용사 등에서 정진했으며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경북 봉화 각화사, 지리산 벽송사, 문경 대승사, 도봉산 망월사 등에서 안거를 났단 1976년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94년 지리산 정각사에서 안거를 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향천사 천불선원에서 정진하고 계신 스님은 지난해에도 대중스님들과 함께 동안거에 들기도 했다.

2005년 향천사 천불선원 동안거 입제를 기념해 대중스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대용 스님.


대용 스님을 아는 사람은 끝없는 수행 이력과 함께 ‘무뚝뚝함’으로 스님을 기억한다. 신도들이나 시자들이 인사를 해도 잘 받지 않고 하루에 대화 몇 마디도 나누지 않을 만큼 차가웠기 때문이다.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혼자 외롭게 자라면서 말이 없어진 것 같아요. 괜한 인연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편찮으시고 난 후에는 조금 달라졌다. 가까이 있는 시자나 간병인이 걱정할까봐 늘 웃으며 “나 때문에 올 것 없다” “고맙다”고 말씀하시고, 공양을 올리는 시자의 손을 잡고 “손이 춥다”며 애틋한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너무 마음을 베풀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좀 더 말이 많았다면 늘 다른 사람과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붙이며) 이렇게 됐을 거예요.”

최근 건강이 나빠지긴 했지만 스님은 세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스님의 건강법은 소식(小食)과 포행(匍行). 하지만 스님은 남과 시비하지 않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더 큰 건강비결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동안거 해제 전 입승스님이 “저희는 보따리 싸서 내일이면 떠납니다. 저희는 스님의 건강이 염려됩니다”라고 여쭙자 스님은 “나도 보따리 싸는 재미로 살았어. 보따리 싸는 재미가 있단 말이야. 나 참 보따리 많이 쌌어”라고 말할 만큼 머무름 없이 살아온 수행이력이 바로 건강의 초석일 것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걷고 싶으면 걷고, 배가 고프면 배를 채우고, 기차를 타던 버스를 타던 먼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먼 여행을….”

대용 스님이 현재 주석하고 계신 향천사 염화실. 사진=박재완 기자


평생 쓴 바랑 하나와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 7개가 전부일 만큼 단촐한 스님의 세간을 보며 천불선원 입구에 걸린 ‘대휴문(大休門)’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크게 쉬는 문. 배고프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스님은 저 대휴문을 넘어야 할까?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부디 평생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스님의 뜻을 거스른 과문한 기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대용(大用) 스님은?

향림당(香林堂) 대용(大用) 스님은 1929년 일본 경도에서 태어났다. 43년 일본 복강현 향순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45년 서울 체신학교 우편과를 수료했다. 대구시 중앙우체국 사무원으로 재직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일등상사로 7년 만기 제대했다. 58년 예산 향천사에서 보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62년 청암사 수도암을 시작으로 부안 월명암, 문경 김용사,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경북 봉화 각화사, 지리산 벽송사, 도봉산 망월사 등에서 정진했다. 76년 충남 보은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94년 지리산 정각사에서 안거 후 본사인 향천사 천불선원에서 지금까지 정진 중이다.


법문

▲스님! 안녕하십니까. 현대불교신문에서 온 기자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절을 합니까?

▲박재완, 여수령입니다.

△박재완, 여수령은 어머니 아버지가 준 물건이지만,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몸 받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찾아봐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을 내놔봐라’ 하면 내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일념으로 참구해야 합니다.

▲스님 출가 후 주지 등의 종단 소임은 거의 맡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임을 살거나 사중(寺中)일을 본다던가 하면 그 일에 끄달려서 힘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옛날 한 스님께서 “차라리 백년의 운수객(雲水客)이 될지언정 하루도 주지로 살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도(道)가 있는 사람도 이렇게 하였거늘, 하물며 말세의 근기가 약한 범부(凡夫)이겠습니까?



▲그럼 대중 포교나 설법도 하지 않으셨나요?

△백 사람의 지식인이 한 사람의 각성만 못합니다. 하루 24시간 중 일하는 것 빼고 잠자는 것 빼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니 정신을 한 군데로 모으는 공부를 해서 이 알 수 없는 것을 참구하는데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아 어렵고 힘들지만 물 흘러가듯 자꾸만 생각해 끊임없이 이어져 가면 정신 통일하는 법을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냉수는 우리가 매일 먹지만 담담해서 질리지 않습니다. 설탕물이나 꿀물은 처음에는 달고 맛있지만 자꾸 먹으면 질려서 먹지 못합니다. 참선 공부도 이 냉수 먹는 도리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도리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화두 하나를 주겠습니다. 그 화두는 모든 번뇌 망상이 녹아나는 자리요, 모든 티끌이 녹아나는 자리입니다.

▲입춘이 지나 이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어제는 봄을 시샘하는 이른 춘설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눈은 햇빛만 보면 금방 녹아버립니다. 눈은 그렇게 녹지만, 그대들의 마음에 낀 티끌은 누가 쓸어버릴 것입니까? 어떻게 녹아 내겠습니까? 부지런히 정진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지난해 동안거 결제에 드셨을 때 선덕으로서 대중스님들에게 소참법문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좌들에게 항상 결제한다는 마음으로 수행하다 보면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 보면 결제나 해제가 따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또한 결제와 더불어 신도들이 100일 기도를 동참하는 날이기도 해, 신도들에게 ‘늘 100일 기도를 하고 있다 생각하시고 일념으로 기도하면 정신세계가 멋쟁이가 되고 육신이 아름다워질 것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 안거다 100일 기도다 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결제를 합니다. 석 달도 좋고 삼년도 좋지만 가장 절실한 결제는 ‘순간결제’가 으뜸입니다. 마음이 화두를 놓치고 해이해졌을 때 다시 화두를 잡고 순간순간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순간결제가 으뜸인 것입니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시지요?

△나의 주인공은 편안하지만 사대(四大)로 생긴 이 색신(色身)은 허물어져 가는 중입니다. 몸으로는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능히 참고, 마음으로는 복잡한 것이 있어도 다 쉬고, 외부의 인연을 일체 끊어버리고 그리고서 공부를 시작하는 이때가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주 허공도 늙는다는데, 이 몸뚱어리야 어찌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사(生死)의 주인공은 늙는다거나 아프다거나 죽는다는 것이 없이 여여(如如)한 그 자리입니다.

▲하루 종일 누워 계시면 무얼 하십니까?

△아무 것도 안합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본래면목을 찾고 있습니다.

▲평생을 선방에서 정진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 본래면목을 찾지 못하셨습니까?

△벌써야 벌써 찾았지만 찾고, 찾고 계속 찾아야 합니다. 기자도 자기의 본래면목을 부지런히 찾아봐야 합니다. 삼천 년 전 부처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을 하며 얻은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 지위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바를 버리고 얻은 바가 무엇입니까? 부귀영화를 버리고 얻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얻고 내가 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온 인류를 위하는 자비스러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모든 일을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너무 빠르고 복잡하게 변해갑니다.

△제가 석굴암에 10여년 정도 기거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세상은 시끄럽게 마련인가 봅니다. 신라시대 때 도성이 어지러워 임금이 시름을 달래려고 시내에 나왔다가 누더기 입은 충담 스님을 만났습니다. 임금이 “어떻게 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잘 살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자 충담 스님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스님은 스님답게 살면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법문 중에 ‘깨달음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고통이나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수행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은 귀한 것이고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다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왕위도 버리고 왕궁도 버리고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시고 모든 것을 다 얻으셨습니다.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가 있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입니다. 가득찬 그릇에는 담을 수 없지만 비어 있는 그릇에는 담을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를 배우는 것이나 부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를 배우는 것이고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이 옳은 불교요, 옳은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나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은 성품을 봤다는 말인데, 내가 견성했다느니 인가를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 약은 진짜고 가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약은 선전하지 않아도 그 약을 찾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견성한 사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다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본성(本性)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와 인생을 구성하는 진리의 본성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본성은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도 독립적이며 고정불변한 것은 없으며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연기(緣起)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제행이 무상하고 본래 자성이 없는 무아는 바로 연기의 법칙, 이렇게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한 것이 세계와 우주와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명에 의한 집착입니다. 그 집착 때문에 지옥도 만들고 극락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해탈의 올바른 길을 보여주고자 깨달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운명은 그 행위에 따라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스님! 새봄이 오면 피어나는 꽃과 나무와 더불어 건강하게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춘래춘풍(春來春風)이면 백초일색(百草一色)이라. 승속원융(僧俗圓融)하여 일월왕래(日月往來)로다. 봄이 와 봄바람이 불면, 백가지 풀이 일색이요. 승속이 원융하여 해와 달이 스스로 뜨고 지더라.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6-03-15 오전 11:21:00
 
한마디
향림당 대용스님께서 19일(음 3월 22일)입적하셨습니다. 21일 오전 10시 향천사 염화실에서 영결식을 합니다. 스님.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2006-04-21 오전 12: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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