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위빠사나는 ‘깨어있는 참여’를 중시할까? 1993년 미얀마 우 빤디따 스님에게 출가한 혜조 스님이 5년 전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경주 마하보디선원에서 그 답을 찾았다. (054)746-9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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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수행에는 에누리가 없었다. ‘좌선과 행선’이 새벽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홀ㆍ짝수 시간을 번갈아 가며 60분씩 빈틈없이 돌아갔다. 휴식시간이란 말도 차담시간도 아예 일정표에 없었다. 말 그대로 ‘한데 몰아치는’ 집중수행이었다.
미얀마 원어로 하는 새벽예불이 끝나자, 수행자 7명이 가부좌를 했다. 좌선시간. 침묵이 법당 안을 꽉 채웠다. 어떻게 1시간을 앉아 있어야 할까? 일단 ‘티끌도 없는 순간적인 알아차림이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란 선원장 혜조 스님의 말만 믿고 똬리를 틀었다.
10분쯤 있었을까? 알아차림은 엉뚱한 데에서 툭 올라왔다. ‘배고픔’이었다. 전날 11시 점심 공양이후부터 지켜온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씹는 음식물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배고픔이 느껴지자 배는 더 요동 쳤다. ‘꼬르륵! 꼬르륵!’ 민망한 뱃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오직 ‘꼬르륵’ 소리에 ‘배고픔’이란 느낌이 일어남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사라짐은 자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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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고픔’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좇을 즈음, 배고픔은 배고픔 그대로 흘러갔다. 있는 그대로 배고픔을 알아차리니, 배고프되 배고프지 않았다.
잠깐의 졸음도 알아차림의 단서가 됐다. 졸다 깨니 다리의 통증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눈 귀 코 등 육근(六根)의 문을 닫고 졸았더니, ‘알아차림’이 저만치 도망가 있었다. 다시 알아차림을 해야겠다는 것도 없이 깨고 나니 저린 다리가 알아차림이었다. 심지어 두 다리를 고쳐 앉는 사이에 들리는 바짓가랑이 스치는 소리조차도 알아차림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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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가 되자, 혜조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어김없이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러분들, 지금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알아차림은 마음챙김이자 주시입니다. 생동하는 ‘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대상을 늘 처음으로 경험하세요.”
스님은 지금 이 순간, 무상(無常)하게 흘러가는 찰나를 알아차리라고 법문했다. 육근을 철두철미하게 단속할 문지기로 ‘알아차림’을 중시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확하게 자각하는 데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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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의 문’을 잘 단속하라는 스님의 말처럼, 감각기관을 세밀히 살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좌선은 곧장 몸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뻐근함을 호소하다 법당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밤벌레들이 미친 듯이 법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깨어 있는’ 마음을 잘 챙기지 못하고, 통증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알아차림을 회피하려 했던 그 마음자리가 단번에 보였다.
행선시간도 알아차림의 연속이었다. 양말부터 벗었다. 발바닥과 땅과 부딪치는 감각을 온전히 알아차릴 욕심에서였다. 팔짱을 키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의 감각을 챙겨보니 천 리 만 리 길 행군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밤 9시, 마지막 좌선을 끝내고 묵언을 깼다. 수행자들의 체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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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가불자 위빠사나 수행동아리 ‘선우회’ 창립 멤버였던 이영희 교수(63ㆍ경성대 무용학과)는 “어느 날 갑자기 일상에서 무심코 접한 물건들이 매일 봤던 그 모습이 아님을 위빠사나 수행에서 경험하게 됐다”며 “감각기관에서 인식하는 대상들이 보다 더 섬세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틀간의 위빠사나 집중수행 체험. 일상에서 자각하지 않고 또 못했던 감각을 ‘깨어있는 참여’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늘 처음처럼. 이것이 위빠사나가 ‘깨어있는’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였다. 이렇게 될 때 오온을 꿰뚫어 삶의 현상을 순간순간 포착하여 그 변화를 보고 이것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 현상 이전의 본성을 파악함으로써 행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열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