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채비를 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참으로도 독특한 형식의 거폭(세로1m96cm, 가로1m33cm) 불화였는데, 틀림없는 한국불화입니다. 화면 정중앙의 방형 구획 안에는 여래를 중심으로 한 군상이 있고, 이 구획 밖으로는 참으로 무수하게 많은 작은 부처님 좌상이 깨알같이 가득 그려져 있었습니다. 중심 여래의 육계주에서는 광명의 빛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퍼져나가고 있고 지권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어, 이 주존이 모든 부처의 근본불인 비로자나불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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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와 그 협시를 포함한 성중의 둘레에는 상서로운 기(氣)의 구름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협시군중의 구성을 살펴보니 비로자나불 좌우로 먼저 문수와 보현보살ㆍ그 외 6대 보살ㆍ사천왕ㆍ십대제자ㆍ팔부중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풍미한 영산회상도의 석가모니를 보좌하는 협시군중과 같은 구성 요소입니다. 본 작품은 비로자나와 석가모니는 결국 불이(不二) 동체라는 도상학적 암시를 나타낸 귀중한 사례로 판명됩니다.
방형의 중심군 주변의 약 일만 구(종 84열ㆍ횡 95구)에 달하는 작은 부처는, 녹색 광배에 붉은색 납의를 감아 둘렀는데, 보통 천불 삼천불 또는 만불 등 무수한 부처님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소략한 형식으로 취하며 넓은 화면을 촘촘히 메우고 있습니다.
작품의 윗부분 약 40㎝ 폭은 보완 수리를 하였고, 주존불의 천개 및 보살 등 부분에 2ㆍ3차례 걸쳐 보채를 가한 흔적이 남아있어, 이 불화의 순탄치 않았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채색부분이 배접면과 분리되어 많이 떨어져 나갔고, 이러한 박락이 계속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로자나를 위시한 중심 성중 무리는, 두광 및 의습 윤곽선이 섬세한 금선묘로 처리되었고 또 인물의 배치에 있어 전후의 공간감과 합리적인 단축법이 지켜져 엄격한 고려의 회화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수많은 작은 부처들은, 웃는 부처ㆍ졸고 있는 부처ㆍ노래 부르는 듯 입을 쫑긋 모은 부처ㆍ고개가 갸우뚱해있는 부처 등 각각 그 표정이 다릅니다.
중국 및 일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량한 부처의 여느 묘사처럼, 천편일률적인 반복이 아니라, 그 표현력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특히 얼굴표현에는 장난기가 가득 감돌아 조선 특유의 유머러스한 터치가 십분 발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려와 조선적 특징이 복합적으로 간취되는 이 불화는 일단 고려말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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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불화 속의 비로자나와 무수한 부처님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화엄경> ‘여래현상품’의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몸 온 법계에 가득하시니/ 간 데마다 중생 앞에 나타나시며/ 인연 따라 골고루 나아가지만/ 언제나 보리좌에 계시고/ 여래의 하나하나 털구멍마다 온 세계의 티끌 수만큼의 부처 계시고 (중략) 모든 세계 국토의 티끌 수처럼/ 구름같이 몸을 나투어 가득하시고/ 중생들을 위하여 광명 놓으며/ 자비의 법비를 내리시네’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Vairocana)는 바로 ‘광명의 부처’인데, 그 무량한 빛을 일체 세간에 두루 비추어 어둠을 물리치고 만물을 생성시키는 신비한 힘 그 자체입니다. 시공간에 가득한 법력은 각양각색의 중생의 번뇌에 응답하고 세상을 밝힙니다. 즉 ‘우주에 가득한 여래’라는 것은 ‘우주에 가득한 빛’과도 마찬가지의 의미겠지요.
<화엄경>이라는 경전 제목 자체가 비로자나의 ‘연화장세계’를 ‘장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숙지한다면, ‘한량없고 그지없는 세계(삼천대천세계)’를 ‘무량한 부처’ㆍ‘무한한 광명’ㆍ‘불가사의한 진리’ㆍ‘일체의 자비’로 가득 장엄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심오한 경전의 내용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무량천만억’ㆍ‘일체시방세계’ㆍ‘아승지겁’ㆍ‘항하사’ 등 ‘무한’을 표현하는 다양한 형용사적 문구의 끊임없는 나열에 아연실색할 정도입니다.
마치 <화엄경>의 원융무애의 세계관은 ‘무한’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유한’에의 거부, 그러고 보니 인간의 모든 번뇌와 고통은 이 유한적 사고방식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유한이라는 각박한 생각 속에서 경쟁과 시기가 일어나고 질투와 탐욕을 부리게 됩니다.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생각을 가질 때야만 비로소 스스로도 풍요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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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주에 가득한 무한한 법성’을 가시화하려한 노력은, 일찍이 6세기의 중국 윈강석굴 18동의 거대한 불상에서 확인됩니다. 노사나불이 걸치고 있는 법의에는 무수한 화생불이 가득 조각되어 있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당초제사의 노사나불좌상의 이중광배에는 일천 화불이 뒤덮고 있어, 화엄미술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같이 유한적 표현으로 무한을 조형화하려는 대담한 도전은 불교미술사선상에서 계속되었는데, 특히 한국 고려시대에는 본 작품에서와 같이 이러한 형식의 불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작은 부처 하나 하나가 모여 전체의 한 화폭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리ㆍ부분은 전체이고 또 전체는 부분이라는 연기사상ㆍ상호공존의 법칙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사회적 개체인 개개인은 사회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또 사회적 정치 경제구조는 개인의 인격마저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일그러진 사회는 일그러진 개개인을, 일그러진 개인은 일그러진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겠지요. 상대가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고, 또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야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같은 지구 운명공동체임을 인식하면, 개인적 이익만 챙기려드는 이 각박함에서 밝고 조화롭게 공생하는 사회가 모색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는 헤밍웨이의 소설제목으로 더욱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실은 17세기 영국시인인 존 단의 시 제목입니다. 아마도 존 단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 울려올 때, 다음과 같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일부이며 대양의 일부이니/ 조그만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가도/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고/ 모래가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그 이유는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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