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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가운데 세로축으로는 삼신불(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이, 가로축으로 삼불(아미타불, 노사나불, 약사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즉 종선상으로는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으로 출가신도가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해야하는 자력(自力)신앙의 구조를, 횡선상으로는 ‘아미타-노사나-약사’의 중생구제를 위한 타력(他力)신앙의 구조를 보입니다. 작품 정중앙의 노사나불은 세로선상으로는 자수용신(自受用身), 가로선상으로는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그 양면적 의미가 주의 깊게 배치되어, 모두 오불존으로 구성되는 독특한 십자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종선상의 삼신이 삼신귀일(三身歸一) 또는 일승(一乘)의 원리로 하나로 표현될 경우, 조선시대 조각상 및 불화에서는 주로 석가불로 표현되어 ‘아미타-석가-약사’의 삼불로 유행했습니다. 또한 많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괘불의 주인공으로는, 본 작품 정중앙에 위치한 것과 같이, 양팔을 벌려 설법인을 취한 화려한 보살형의 노사나불이 특히 유행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결국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불화 도상의 기본 원리가, 바로 이 오불존도에 극명히 드러나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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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작품은 횡으로 위치한 삼불을 중심으로 위ㆍ아래 두개의 영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윗부분은 법신 비로자나를 위시하여 녹색 두광의 금빛육신 보살들로 가득한 청정법계(淸淨法界)이고, 아랫부분은 응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속세의 중생들로 가득한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그런데 중생계라고해도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궁녀, 비단옷과 진귀한 장신구를 두른 귀부인들로 가득한 것으로 미루어 궁정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에서 왕과 왕비로 보이는 인물 한 쌍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왕은 해와 달이 그려진 관을 쓰고 홀(笏)을 들고 왕비는 화려한 머리장식에 귀걸이 영락 등으로 치장하고, 나란히 예를 갖추고 합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 쌍의 왕과 왕비의 모습은 작품의 세 군데(그림 ①②③)에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세 곳에 나타나는 왕과 왕비의 의습ㆍ장신구ㆍ지물의 동일함이 확인되어 그 형식상의 묘사에 있어 차별화하려한 의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또 가장 아랫단의 왕과 왕비(그림 ①)의 산호 공양단지를 든 시녀가 윗단(그림 ③)에도 역시 동반되어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 세 쌍은 동일한 한 쌍임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하단의 사바세계에 있던 왕과 왕후는 점진적으로 위로 올라가, 드디어는 상단의 비로자나부처와 보살들만이 존재하는 법계(法界)의 문턱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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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발견하고 나면, 작품은 흥미진진한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극락왕생이 아니라 법계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했다는 사실. 일반적으로 기원되는 궁극의 세계는 정토(淨土), 정토라 하면 지역과 시대를 불문하고 극락정토(또는 서방정토)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아미타불의 원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타력왕생을 염원한 것이 아니라, 부단한 극기와 게으르지 않은 수행과 또 일체 서원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끈기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절대 법열의 경지인 ‘청정법계(淸淨法界)’를 목표로 했다는 것입니다.
법계에의 진입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려한 이러한 대담한 작품은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는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경지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왕과 왕후는 누구이며, 이들이 법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한 발원자는 누구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이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발원문은 바라져서 판독이 불능한 상태이고, 또 후대에 약 두 번에 걸쳐 보채를 가한 흔적이 보여 그나마 보이는 몇 자를 근거로 추론하는 것 역시 작품 오독의 우려가 다분합니다. 작품 형식 분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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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가 분명한 조선전기 관련 불화(예를 들면, 일본 영평사소장 1483년명 삼제석천도) 및 유사연대의 사경화 등과 형식을 비교해본 결과, 본 작품연대는 15세기 극말에서 16세기 극초로 추정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정황과 당시 생존했던 또는 이미 타계한 왕 및 왕비의 생몰연대를 고려해 몇몇 가능성들을 조심스레 배제해 나가다보면, 이 불화에 그려진 젊은 왕과 왕비는 성종과 그의 첫 왕비인 공혜왕비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세종ㆍ세조가 착수한 다양한 문화사업과 국가체제를 제도적으로 완비하여 문화 창달의 왕으로도 일컬어지는 성종은 홍치 갑인(1494)년 서른아홉 한창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그럼, 이 작품을 발원한 시주자는 누구일까요? 당시 끊임없는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불사(佛事)를 계속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위치의 인물, 불교에 대한 깊은 학문적 조예와 신앙심으로 이러한 오불존도와 같은 작품을 위탁했을 법한 인물은,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인수대비는 세조ㆍ예종ㆍ의경왕 등 선왕들을 위해, 또 무명 속을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기위해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등 경전을 일천 여 번이나의 인출한 바 있으며, 고승 학조(學祖·?~?)와 더불어 심지어 연산군 시대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수백 건의 불전언해 작업을 계속 추진하였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당시 불경언해본의 김수온(金守溫·1410~1481) 또는 고승 학조 등이 찬술한 발문에서, 법성(法性)과 보살행에 대한 인수대비의 깊은 학식과 열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상은 어디까지나 많이 고민해본 결과로서의 추론이고, 또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열어두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작품에 나타난 ‘법계를 향한 열망’입니다. 법계와 이에 이르는 구도의 길이 대서사시처럼 웅변되어 있는 화엄경의 한 유명한 게송에는 ‘만일 누구든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법계의 성품과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된 것임을 관하라’라고 역설되어 있습니다. 즉 법계의 실체는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이겠지요. 이 불화는 평범하나 또 비범한 진리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올 병술년에는 끊임없이 이는 마음의 거친 파도가 고요히 가라앉아, 청정하고 영롱한 만월(滿月)을, 그 본모습 그대로 가득 비추어낼 수 있었으면 하고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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