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84세가 믿기질 않는 짱짱한 목소리다. 치열하게 법에게 대들면서 마음으로 일군 정직한 살림살이가 카랑카랑한 음색에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말끝에 선 칼날이 날카롭다. 당장 부처의 목이라도 베어버릴 기세다. 움켜쥔 의심에 잔뜩 독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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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한ㆍ중ㆍ일 국제무차선법회 때를 기억하세요? 법문을 막 끝낸 진제 스님과 법거량을 하셨잖아요. 스님께서 ‘오늘 이 법회가 무슨 법회요?’라고 묻자, 진제 스님이 ‘만 천하에 가득합니다.소승의 허물이.’라고 답했지요. 그러자 스님이 ‘입을 열 적에 그르쳤다. 내려와!’하고 고함을 질렀지요. 왜 그랬나요?”
‘괜할 걸 물었나.’ 따귀라도 맞을 요량에 뺨을 스님께 대차게 가져다댔다.
“하! 하! 하!”
크게 한 번 웃고 만다. 거침없는 선문답을 쏟아냈던 그 까닭을 묻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다. 하긴 범부의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통도사 경봉 스님, 관음사 향곡 스님, 월정사 탄허 스님, 범어사 동산 스님, 용화사 전강 스님 같은 선지식을 만나 탁마를 했는데요. 수행담 한 자락을 들려주시지요.”
“가야총림 부목살이 한 철을 나고, 하늘같은 조실스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지. 곧장 물었어. ‘사대 오온이 어찌 생겼습니까?’ 그러자 조실스님이 ‘조주 무(無)자 화두나 들거라’ 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조주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 했다면, 그 자리에서 조주 모가지를 잘라버렸을 겁니다.’ 벼락같은 소리를 냅다 지르고 방에서 뛰쳐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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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스님이 안거 해제 날, 해인사 현당에서 이렇게 법문을 설했지. ‘안거를 무사히 마친 여러분에게 노자라도 쥐어줘야 하는데, 이 노승은 가진 것이 없소. 내 몸뚱이를 사서 노잣돈을 쓰시오.’ 그때 내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지. ‘그 썩은 몸뚱이를 어느 놈이 사겠소.’ 그랬더니 효봉 스님이 ‘저 수좌는 장판 때 묻은 옷이나 빨고 가거라.’ 하시더군. 한 철 공부깨나 열심히 했다는 격려였지.”
묵산 스님은 그 당시를 술회하며 효봉 스님의 경책을 지금도 마음 깊이 지닌다고 말한다. ‘제방 납자들이여! 촌초(寸草: 마디 풀)도 없는 곳으로 향해서 가거라.’ 해제법문은 묵산 스님의 귀에 박혀 너무도 거룩하게 자리 잡게 됐다.
“선지식한테 두들겨 맞아야 큰 깨달음이 오지. 임제의 30방이 그렇잖아. 60년 넘게 전국 방방곡곡의 선지식을 찾아 다녔지. 얻은 것은 이 놈의 마음 그릇이 좀 커졌다는 것이야. 법을 받아들이고 담아낼 그릇이 커진 것이지.”
‘살림살이.’ 인생을 송두리째 거는 수행자의 존재이유다. 남의 살림살이를 부여잡고 앵무새 짓을 할 바에 미련 떨지 말고 세속으로 나가버리라는 소리다. 자기와 벌일 처절한 한판 승부에 핏대를 제대로 세우라는 의미일 게다.
“허공이 부서져야만 우리의 진면목이 드러나. 우리가 허공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허공을 감싸고 있는 거야.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공생대각중 여해일포발(空生大覺中 如海一泡發)”이라 했지. ‘허공이 대각 가운데에서 생겼는데, 저 바다에 물거품이 생긴 것과 같다’는 뜻이야. 우리 마음은 미국을 생각하면 미국이 들어오고, 해와 달을 생각하면 해와 달이 마음에 쑥 들어오지. 그러니 ‘내가 부처요 허공이 내 몸’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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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없는 자가 근본이라(無面目者是本然)
두두 물물이 이리 쫓아왔다(頭頭物物從此來)
추월, 춘화를 그대는 아는가(秋月春花君知否)
돌여인 젓대 부는데, 목인이 춤추더라(石女吹笛木人舞)’
깨달음의 게송은 훌쩍 넘긴 공양 시간의 허기를 대신한다. 잠시, 물음을 그치고 낯빛을 살핀다. 오전 내내 치열했던 살림살이를 드러내 보인 묵산 스님. 곰삭은 얼굴에는 피곤함이 저만치 물러나 있다. 기억력의 산화는 무심함을 낳는다고 하지만, 샘솟는 깨달음의 흔적은 스님을 젊은 납자로 만든다.
사실 스님은 약골이었다. 조실부모한 결핵 환자. 각혈을 몸에 달고 살았다.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병마가 화두였다. ‘중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목탁 하나 달랑 들고 종로 탑골공원에서 90일 관세음기도에 들어갔다.
“개신교인들이 목탁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지랄 발광을 해. 며칠 후던가. 종로 깡패들이 나한테 와서 고기와 술을 사달라고 거들먹대. 그래서 보란 듯이 사줬지. 하루하루 지나니 그 놈들과 친해졌어. 그러니 예수교인들이 꼼짝을 못해. 하하하!”
늘어진 오후 시간을 부여 잡고 있을 즈음, 궁금증은 스님의 하루일과 이야기로 이어진다.
“밤 12시까지 좌선을 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곧장 <육조단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사경하지. 요즘은 나이가 드니까 운동도 해. 몸을 비틀고, 주먹으로 목덜미의 기혈을 누르면서 발가락으로 서서 걷는 운동을 하지. 심신의 기혈을 잘 돌려야 병이 들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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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마음을 한가롭게 하기 위해서지.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경전을 찬탄하려고 쓰는 거야. 이것을 쓰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 ‘불심(佛心)’도 ‘선(禪)’자도 쓰는데 말이야. 한 장씩 가져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스님은 절 한 귀퉁이에 묶어놓은 개의 목줄을 풀어줬다. 개는 곧장 난리굿을 피우며 절집을 휘젖고 돌아다녔다. 저렇게 날뛰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 런지.
10년전부터 매주 토요일 철야정진
묵산 스님은
1922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난 묵산 스님은 1940년 제주 중문 원만암으로 출가해 43년 황룡사에서 금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44년 만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해인사에서 인곡 스님과 효봉 스님을 모시고 정진했으며, 백양사 대각사 칠불암, 수덕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75년 서울 정릉에 보림사를 창건한 스님은 96년부터 매주 토요일 재가불자들의 철야정진을 지도하고 있다.
묵산 스님의 가르침
하심하면 세상이 화목
사람은 늙어갑니다. 항상 젊은 것이 아니지요. 늙어서 병이 들면 공포감이 옵니다. 여기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그때 떳떳한 정신을 가지려면, 미리 수행을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옹골차게 걷어잡는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장소와 시간을 떠나 항상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생에서 가장 거룩한 길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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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들은 마음의 근본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에서 꺼진다는 진리를 깨쳐야 해요. 마치 물거품이 바다에서 일어나 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 등에서 한량없이 일어나는 작용은 마음을 근본으로 해 생멸합니다. 이 이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원만하게 잘 굴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덕을 기르는 도리로, 지혜를 계발하는 도리로 알아야만, 인생 문제가 순탄하게 해결되는 겁니다.
승속을 막론하고 몸을 버릴 때는 고통이 없어야 합니다. 깨끗하게 몸을 벗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들어야 가능해요. 그 때는 불법을 믿기보다 자기 자성을 잘 가꾸고 깨달아 자신의 본바탕을 본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주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한 팔만대장경의 모든 법문도 이를 위한 거지요. 사람이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도리를 보리수 밑에서 6년간의 수행을 통해 깨달았어요. 인생 공부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심(下心)’ 공부를 하기 위해 걸식하며 무진법문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 자신을 낮추는 하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을 존경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하심은 남을 위해 살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또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화(家和), 인화(人和), 세계화(世界和)의 단초가 되는 것이지요. 마음을 항상 단정히 하고 청결하게 하면, 거룩한 이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부자라서 대통령이라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사대(四大)가 구족한 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불자들은 어렵게 인간의 몸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수행해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잘 가꾸고 잘 개발해야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지혜를 잘 닦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선구자가 돼야 해요.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모습놀이와 물질에 속지 말고, 자성 즉 부처 자리를 어떻게든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을 잘 못 쓰면, 마음자리가 황무지로 변하기 때문이죠. 새카맣게 녹이 슬게 하지 말고,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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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불자들의 삶과 수행은 따로 놉니다. ‘불이(不二)법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해야 이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스물세살 때였습니다. 고봉 스님이 견성했다는 소문을 듣고, 한강 인근의 비구니 사찰에서 문답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이때 수좌 4명이 같이 있었는데,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아 고봉 스님에게 불이법문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래 둘이 아닌데, 어찌 둘이 됩니까?”
“어찌 분별하느냐?”
“스승과 제자가 둘인데, 어찌 분별을 안 하겠습니까.”
“악! 귀도 생기지 않은 것이 사람을 떠보려고 하느냐. 썩 나가거라.”
“어디로 나갈까요?”
그랬더니 고봉 스님이 묵묵부답하셨습니다.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나가라’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들어오면 나가는 도리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도 고봉 스님은 나갈 곳도 들어갈 곳도 둘이 아니기에 침묵하신 것 같아요. ‘말없이’ 불이법문의 이치를 알려준 것이지요.
불교란 무엇일까요? 서른 살 때 <석문의범(釋門義範)>의 대례참례(大禮懺禮)에 있는 글귀를 보고 이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 螟眼睫起皇州(초명안첩기황주)
玉皇帝侯次第投(옥황제후차제투)
天子臨軒論土廣(천자임헌론토광)
太虛猶是一浮 (태허유시일부구)
사마귀 곤충 알의 눈동자 속에 황제가 사는 고을이 일어나니
옥황과 제후들이 순서대로 늘어앉은 세계가 벌어지네.
임금이 조정헌에서 국토가 얼마나 넓은가 논하니
태허를 가리키며 오히려 한 물거품이라.”
불교의 근본이자 일체세계가 일어난 동기를 말하는 글귀입니다. 사마귀 곤충 알의 눈동자에서 세계가 일어났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순간, 거기에서 허공을 느꼈습니다. 깨달음의 눈이 뜨였습니다. ‘불교가 이 허공이 물거품’이란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불교는 반드시 알고 느껴야 합니다. 불교는 따로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습니다. 항상 ‘회광반조해서 내가 무엇이며’ ‘어찌해서 보고 듣는지’ ‘그 작용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의심하면서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오래오래 하면 어느 순간, 느낌이 옵니다. 근본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인 까닭에, 그 마음을 항상 궁리(窮理)해서 노력하면 반드시 깨달음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