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 신행 > 법문·교리 > 선지식
법 묻는 이에겐 언제나 문 '활짝'
큰스님 편안하십니까 - 진제 스님 동화사 조실

범룡 스님의 입적으로 동화사를 찾은 스님들과의 인사.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지낸 범룡 스님의 입적으로 분주한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동화사 염화실에도 조문차 동화사를 찾은 스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보통 때 같으면 금당선원 수좌들의 오전 정진을 경책한 후, 발우공양을 할 시간이지만 범룡 스님의 장례관계로 이날 점심에는 상 공양을 따로 받았다.

된장국, 콩나물무침, 오이무침 등 깔끔한 반찬으로 차려진 상을 받은 진제 스님의 공양 시간은 10분 내지 15분. 발우공양에 익숙해진 탓이라 공양 시간이 매우 짧다. 도를 위해 살아왔을 뿐 평생 몸을 보살피지 않았다는 스님에게 음식은 몸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식일 뿐이다.

보통 아침공양으로는 시자가 후원에서 가져온 죽을 먹고 점심에는 선원 수좌들과 발우공양을 하고 저녁에도 역시 후원에서 먹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먹는다.

“도를 위해 절집에 왔지, 편안하게 지내려고 절에 온 것이 아니니까 음식이든 입는 것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 도를 위해 산다는 그 신조가 그대로 이어져 왔지.”

누가 언제 찾아와도 항상 바른 참선법을 지도해 주는 진제 스님은 화두와 의심이 한덩어리가 되는 일념삼매를 지속할 것을 당부한다.
진제 스님은 건강에도 무심했다. 21세 출가 이후 깨달음을 인가받았던 34세까지는 모든 반연을 쉬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이 공부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고 망망대해를 홀로 거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만큼 치열한 구도 행각을 이어온 스님에게 건강을 돌볼 겨를이 허락될 리 만무했다. 깨달음을 인가받은 후 1971년 부산에 해운정사를 창건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느라 세수 일흔을 넘긴 지금까지 또다시 건강은 뒷전이다.

그러다보니 목 뒤에 군살이 생겨 5~6개월전부터는 스님이 직접 개발한 소나무 홍두깨로 이리 저리 지압 삼아 미는 것으로 건강관리를 대신하고 있다.

새벽 2시 45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영산전 법당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돌아오면 한 시간여 동안 홍두깨 운동을 빼놓지 않고 있다.

“뒷목의 굳은살이 아무리 주물러도 없어지질 않아. 그래서 소나무 홍두깨를 해서 자연스럽게 굴리다 보니 목도 가볍고 머리도 가볍고 효과가 좋아. 내가 개발한 나만의 건강비법이지. 허허허.”
홍두깨 운동을 마친 스님의 다음 일과는 참선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는 참선과는 다르게 ‘깨달은 세계를 그대로 누리는 참선’이라고 했다.

진제 스님이 건강관리 일환으로 개발한 "홍두깨 운동".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깨닫고 나면 중생의 습기는 없어지고 항시 밝은 진리의 즐거움이 지속 된다”고 답했다.

“나라는 아상이 없고 바른 진리의 눈을 갖추었기 때문에 세상법에 초연해지고 밥을 먹고 물을 마셔도 집착이 없으며 진리의 낙이 함께 해서 그게 생활화가 되고 그대로 일상의 살림살이에 수용 된다”는 것이었다.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 금당선원 수좌들을 향해 장군 죽비를 내려치며 경책을 하고 있는 스님은 이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든 또 누구든 법을 묻는 사람들을 맞아 바른 참선법을 지도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는다. 특히 진제 스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공부에 진실하고 간절한 이를 각별히 반긴다.

“법을 묻는 사람에겐 언제든 내 방문이 열려 있어요. 별별 사람이 많이 오거든. 와서 달려들고, 딴소리 하는 사람도 많아.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큰소리 치고 가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와서 참회를 해. 이제 동화사에 머물면서 잘 지도를 해서 내 밑으로 한 개, 두개의 ‘법기(法器)’는 만들어놓고 가야지.”

진제 스님이 동화사 금당선원 주변에서 포행하고 있다.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시간. 진제 스님과 시자스님은 세수 대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는다. 저녁 예불이 끝나면 이어지는 이 시간은, 시자스님이 스승의 발을 씻어 드리는 일로 스승과 제자의 내밀한 정이 오가는 순간이다. 스승의 발에 비누를 칠하거나, 비누를 물로 헹구어내는 때에도 제자의 화두는 끊이지 않아야 한다. 발을 씻는 짧은 순간이지만 진제 스님은 그날의 간단한 일상사를 챙겨 물으며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사랑으로 제자의 공부를 점검한다.

세수가 많아질수록 제자를 야단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진제 스님. “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돼 일념삼매가 지속되도록 하라”는 당부로 일관하는 진제 스님의 하루는 ‘마주 손뼉을 칠 지음인을 찾아가는 한 길’로 통하고 있었다.



진제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이며 원로회의 의원인 진제 스님은 1931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석우 스님을 뵙고 불법을 배우던 오촌 당숙을 따라 나섰던 1954년 정월, ‘범부가 도인되는 길’을 찾아 출가했다, 세수 21세. 1967년 화두 관문을 뚫고 향곡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아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전해 내려오는 법맥을 이었다.

1971년 부산 해운정사를 창건, 도심속 참선의 대중화에 진력해왔으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진제 스님의 가르침

새해에는 마음을 새롭게 가져서 허송세월을 안 해야 합니다. 허송세월을 안 하기 위해서는 바른 참선을 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 바른 지도를 받고, 바르게 참구해서 실행에 옮기는게 제일입니다.

참선이 일생생활에서 무르익어야 됩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장사를 하나 농사를 지으나 화두가 흐르는 물처럼 항상 흘러가야 합니다. 그렇게 일념이 지속되면 밝은 지혜 눈을 갖추게 되는데 그러면 자동으로 마음의 갈등이 없어지는 동시에 사물도 정확하게 판단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아주 명랑하고 자신만만하고 근심걱정이 다 없어지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금당선원에서 안거중인 후학과의 대화.
참선을 해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발심을 했으면 앉아서 익히는 것이 출발선입니다. 좌선을 할 때 바른 자세가 정립돼야 몸뚱이에 끄달림이 없고, 화두 드는 데만 집중이 됩니다. 자세가 바르지 않고 화두를 챙기는데 힘이 들어가면 병이 오고 상기가 들어서 참선을 못하게 돼요. 그만큼 바른 자세가 중요한데 평좌로 앉아서 양손을 포개 아랫배에 붙이고 가슴과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게 하고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2m 앞 아래에 화두를 두되 시선은 편안하게 두되 눈을 뜨고 생각으로만 화두를 챙기면 돼요.

그러면 바른 자세가 유지되면서 화두가 흘러가게 되고 상기도 방지가 됩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하고 흘러가다가 혼침과 망상이 침범하면 다시 또렷또렷하게 챙기면 됩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한번 챙기면 한 시간이 흐르고, 몇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러한 경지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무한한 노력을 계속한 끝에 마음속의 화두가 시냇물처럼 밤낮없이 흐르듯 흘러가는 때가 오는데 그때는 몸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화두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지혜를 밝히는 이 일에 열중을 해서 마음속에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 어떤 것이 참나던고’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오매불망 정진하다보면 마음속의 갈등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없어져 버리면서 지혜가 밝아져서 탕탕자재하게 되는 겁니다. 비고 비어서 걸림이 없는 무애의 그 맛을 봐야 되는데 그 때가 고비입니다. 목숨을 다해서라도 대도를 알아야겠다는 간절한 발심이 선 사람만이 그 맛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금생에 이 일을 해결해서 대장부의 활개를 쳐야겠다는 용단을 내린 이는 한 3년, 또 길게는 10년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

나도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석우 스님을 만나 발심 출가했고 공부 도중 남방 제일의 대선지식 향곡 선사의 바른 지도를 받으며 법의 방망이를 맞고 오로지 화두와 씨름한 끝에 오늘날 진제가 됐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진제’는 없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대도(大道), 즉 바른 공부는 먼저 깨달은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들여서 도를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신심과 발심으로 해야 합니다. 허공보다 더 넓은 진리의 세계를 스승 없이는 도저히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인가받은 선지식을 찾아가 공부를 점검받고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대도시가 많지만 서울특별시를 당하지 못하듯이 부산 대전 대구 등에서 서울에 다 왔다고 착각하고 우기는 현상이 생깁니다. 나를 찾아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진리’라는 서울이 경기도 한복판에 있는데 수원, 대전이나 대구에 와서 이곳이 ‘진리의 고향’ 서울이라 착각을 하는 이가 더러 있어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진리’의 고향인 경기도 한복판에 이르러서 남산에 올라 전체를 다 바라봐야 사방이 환해지고 동문서답을 멈추고 비로소 바른 문답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문답시에도 선지식이 아니면 가리지를 못합니다.

찾아오는 이가 부지기수지만 아직 바른 답을 하는 이가 없어요. 여래선 경지의 답을 하는 이가 몇 있지만은 그걸로는 안 되거든요. 모든 부처님이 비밀히 전한 ‘향상 일구(向上一句)’의 눈이 열려야 허락을 하고 제자를 두고 불법을 전하는 것이지. 법신의 진리나 여래선의 진리 가지고는 안돼요.

나도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알았다’는 그릇된 지견이 나서 그 길로 공부를 그만두고 전국의 큰 스님이라는 큰스님은 다 찾아 물으며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어요. 어떤 스님은 옳다 하고 어떤 스님은 그르다 해서 한 3년을 허비했지. 그런데 향곡 스님만이 내 말문을 막아버렸거든. 그래도 수긍을 않고 오대산으로 공부를 하러 들어갔는데 그 때는 절집 생활이 아주 어려웠어요. 밥 한끼도 근근히 먹고 석달 내내 김치 한가지로 생활하고 침구도 없는 채로 오로지 화두만 붙들고 씨름을 했어요. 9시쯤 자려고 하면 침구가 없으니 좌복을 배에 깔고 새우잠을 자다가 다시 새벽 3시쯤 일어나고 했거든. 혜암 스님, 활안 스님 등과 용맹정진을 하면서 정진을 이어가던 어느날, 혹한이 풀리면서 푸근한 날이었어요. 양지 바른 마루에 앉아 ‘내가 참말로 알았다고 끄덕거리고 있는데 바로 알았는가? 모든 고인의 법문을 바로 보고 막힘이 없는가?’ 자문을 하게 됐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물으면 거짓이 통하지를 않아요. 이걸 가지고 내가 알았다고 허송세월을 하면 나의 신세가 말이 아니다 싶어서 백지 상태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그 길로 향곡 스님을 찾아 뵙고 그곳에서 10년 세월을 보내면서 화두를 타파해서 동문서답하던 것을 바로 보는 눈을 갖춰서 전법게를 받게 된 것입니다.

향곡 스님께 전법게를 받은 후, 내 생애 남은 일은 오직 한가지, 법을 전할 법기(法器)를 키워내는 일뿐이지. 그래서 법을 묻는 이라면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놓았고. 내가 동화사에서 12년동안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 지도에 열의를 다하고 있어. 해운정사에도 30여 명이 공부 중이니 지도를 계속 하면 법을 이을 법기(法器)가 ‘한개’는 나올 것이라 믿고 있구만. 하하하!


열반적멸본무명(涅槃滅滅本無名)커니
(열반적정이 본래 이름이 없으니)
환작여여조시변(喚作如如早是變)라
(여여라고 분별 지을 것 같으면 문득 변한 것이다)
욕문경중하극즉(欲問經中何極則)면
(경 가운데 어떠한 것이 최고의 진리냐고 물으면)
석인야문목계성(石人夜聞木鷄聲)이라.
(돌사람이 밤에 나무로 깎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돌사람이 밤에 나무로 만든 닭울음소리를 듣는 경지를 알겠는가!
부지런히 정진해서 이 뜻을 알아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비밀히 전한 심인(心印)을 이을 장부가 되길 바랍니다.

대구 동화사/글=천미희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
2005-12-29 오전 11:37: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