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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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뵌 큰스님】 범룡스님
“비워라, 그래야만 채울 수 있다”
화두와 내가
하나 되지 않으면
그 틈새로
망상이 나오는 법


◇범룡스님은 수행의 바른길을 제시할 뿐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스스로 깨우치고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게놈’이 뭐여?”
15일 오후에 찾아든 기자에게 범룡스님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스님의 시선은 신문 한 복판에서 멈춰있었다.

“예, 게놈이란 인간유전자정보를 뜻하는 말인데요…, 잘못쓰면 복제인간도 나오고요, 그러면…”“몸은 같을지 몰라도 마음이야 같을 수 있나. 과학으로 되는 것이 한계가 있는 법이지. 우주대자연의 원리를 누가 주고받고 할 수 있나. 질서를 깨뜨리면 혼란이 올 것이야.”세수 88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꼿꼿한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지.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단박에 ‘큰 스님’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무게’를 느꼈으리라. 하기야 범룡스님이 어떤 분인가. 스님을 배출하는 계단(戒壇)을 관장하는 조계종단의 전계대화상이 아니던가.

범룡스님. 현대불교자료사진.
“전계화상? 그게 뭐 중요한가, 수행만 잘하면 되지.”
그랬다. 수행만 잘하면 된다는 스님의 말씀은 스님 자신이 평생 지키고 살아온 신념이자 자세다. 스님은 지금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자지 않는다. 밤 10시경 들어간 잠자리에서 깨는 시간은 새벽 2시. 이때부터 아침 6시까지 참선에 든다. 죽으로 아침공양을 하고 나면 또다시 참선에 몰입한다. 점심공양은 따로 하지 않고 참선과 경전읽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기 위해 일간신문 하나를 뜯어보는 것이 쉼이라면 쉼일까.

“스님, 계율이란 무엇입니까?”
“무리 사이에는 질서가 있는 법이지. 계는 질서는 바로잡는 것이라고 보면 돼. ‘이계위사(以戒爲師)’라는 부처님 말씀이 있어요.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는 뜻이지. 자장율사도 ‘영위지계 일일생(寧爲持戒 一日生) 이언정 불위파계 백년생(不爲破戒 百年生)’이라고 하셨어요. 차라리 계를 지니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파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말씀인데 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면 참수행을 하기는 어려워요. 계율에서 계란 꼭 지켜야 하는 것이고, 율이란 시대와 지역에 맞게 하는 것이지. 율이라는 글자에는 ‘지범개차(持犯開遮)’ 이 넉 자의 뜻이 들어있는데, 가지기도 하고, 범하기도 하고, 열기도 하고, 막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가지기만 하면 고집불통이 돼서 못써요.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것이 율이지.”“가지기도 하고, 범하기도 하고, 열기도 하고, 막기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글쎄, 지범개차라니까.”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지식이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무언의 꾸짖음인가.

22살에 출가했으니 산문에 들어선 지도 벌써 66년째. 스님은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 지리산 등 전국 팔도에서 선방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늦추지 않았고, 한암, 만공, 동산, 효봉, 경봉스님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는 등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화엄경>, <능엄경>에도 능해 후학들로부터 선·교·율을 모두 갖춘 몇 안되는 선지식으로 알려져왔다.

범룡스님은 한암스님으로부터 받은 무(無)자 화두를 아직도 놓지 않고 있다. 유점사 승가대학을 마친 뒤 범룡스님은 곧바로 상원사 한암스님을 찾아가 참선과 <금강경>을 주로 배웠다. 범룡스님은 한암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참선을 하다가 십종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궁금했지. 어느날 한암스님께 여쭈었더니 스님은 화두를 들 때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이 곧 십종병이라고 하시더라구. 한암스님을 만난 것은 내겐 행운이었지. 지금 공부하는 수좌들이나 불자들이 참선을 한다고는 하지만 올바른 자세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거든요. 좌선하는 사람은 누구나 화두 하나씩을 가지고 있는데, 실은 화두하고 나하고 하나가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야.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틈새로 망상이 나오는 법이지.”“그렇다면 망상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방법은 무슨 방법, 스스로 깨우치고 찾아야 하는 거지.”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닫기도 전에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을 펼쳤다. 그리고는 신문지의 여백에 한자 한자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셨다.

‘거중중(居衆中)하여 심상평등(心常平等)이어다. 할애사친(割愛辭親)은 법계평등(法界平等)이니 약유친소(若有親疏)면 심불평등(心不平等)이라 수부출가(雖復出家)나 하덕지유(何德之有)리오’“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항상 마음을 평등하게 할지어다. 애정을 끊고 부모를 떠남은 온 법계를 평등하게 보는 것이니 만일 친하고 덜 친함이 있으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니 비록 출가는 했지만 어찌 덕이 있겠는가 하는 뜻이야. 나는 <초발심자경문> 중에서도 자경문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이 부분을 가장 중히 여기지. 그런데 말야, 10년 뒤에 미륵부처님이 난다느니, 어떤 사람은 벌써 났다느니 허망한 소리를 하는데 부처님 법이 아무리 좋아도 스스로 따르지 않는다면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이야.”21년간 이곳 비로암에서의 스님의 생활을 엿보면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큰 불사(佛事)란 성불(成佛)하는 것”이라며 수행정진에 게으르지 말 것을 강조했고, 스스로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비로암 주석 초기에는 논과 밭에서 하루를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수행의 근본으로 삼았고, 참선하고 경전을 읽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이를 견뎌내는 제자가 없을 정도였을까.

스님의 이런 구도열은 젊어서 이미 그 본모습을 드러냈었다. 한암스님에게서 참선과 경전을 공부 한 후 어느 해인가 화두를 참구하며 오대산에서 부산 범어사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옛 조사들이 일보일배(一步一拜)를 하면서 도를 찾으려 했다는 데 절은 못할망정 걸어서라도 가야겠다는 굳은 구도심에서였다. 뿐만 아니다. 스승과 경전에 대한 애정은 구도심만큼이나 깊었다. 범룡스님이 한암스님 아래서 공부하던 당시 <화엄경>에 우리말로 토를 달아놓은 것이 없던 때였다. 범룡스님은 후학들을 위해 <화엄경>에 토를 달겠다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화엄경 절요>를 붓글씨로 정리해서 한암스님께 드렸고, 한암스님은 이를 바탕으로 토다는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범룡스님은 그것으로 만족하기 어려웠다. 스승의 뜻을 묻어둔다는 것도 제자로서 도리가 아니었지만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한암스님의 토가 달린 <화엄경>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상원사에 보관돼 있던 한암스님이 쓴 책을 가져와 영인해냈다. 출판을 위해 세 달 이상을 비로암에서 대구 시내의 출판사까지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면서 끼니도 거른 채 영인작업에 매달린 결과였다. 화엄경의 이치를 알리기 위해 98년에는 불자들을 대상으로 매주 한차례씩 ‘화엄경산림법회’를 열고 화엄사상을 펴기도 했다. 상좌 수련스님(비로암 주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원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상원사까지 가서 책을 가져오고, 스승의 업적에 한치라도 누가 될까봐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스님, 공부하는 불자들을 위해 한 말씀 더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부처되면 저절로 알게 될텐데 물을 게 또 있나”
그저 불자들에게 전해줄 말씀 한마디 더 듣자고 작정했던 기자는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막무가내로 자리를 틀고 앉아 있자니 스님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뒤 스님은 다시 입을 여셨다. “불법이 좋다해도 무엇이 좋은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삼매에 들어야 부처님 법이 좋은 줄 알텐데, 삼매라는 것이 들고 싶다고 드는 것도 아니고. 욕심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불하겠다는 간절한 신심이 있어야 가능해요. 삼매에 들어보시오. 손도 안 움직여지고 눈도 고정되고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마음이 정해지기 때문이지. 삼매에 들면 내 눈이 거울이 되고 밖의 사물이 와서 저절로 비춰져요. 보겠다는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게 되는 것이지. 사람들은 발심하는 때와 성불하는 때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발심만 투철히 하면 그 시간이 곧 도를 깨닫는 때야. 그러니까 발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참선할 때 우리는 참구한다고 말해요. 참선이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시간에 얽매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그러면서 스님은 또 <초발심자경문>을 펼치시더니 책 끝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권여은근수선도(勸汝慇懃修善道) 하나니 속성불과제미륜(速成佛果濟迷倫)이어다. 금생약부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간절히 권하나니 선도(善道)를 닦아 불과(佛果)를 빨리 얻어 번뇌에서 헤매는 중생을 제도하라. 금생에서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후세에 한탄이 클 것이다. 부처님 법문은 알아도 듣고 몰라도 듣는 게지 모른다고 안 들으면 영영 모르게 되지. 듣기만 해도 좋다는 신심으로 들으면 차차 알아지는 게라.”눈으로 뒤덮인 비로암을 뒤로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셨던 스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공간처럼 비워라. 그래야만 가득 채울 수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법을 따르라는 스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이나마도 깨우치지 못했을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은 동대구를 출발한 기차가 서울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글=한명우 기자
(mwhan@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범룡스님은


한국불교 대표적 선지식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고요한 바다’ ‘청렴결백한 성품’ ‘철저한 수행자’ ‘수행의 실천가’범룡스님을 모시는 제자들은 한결같이 스님에게 이런 수식어를 붙인다. 온종일 가도 단 한마디조차 없을 때가 다반사라고 한다. 연로하신 까닭에 지금은 논밭을 일구시지 않지만 3년전까지만 해도 하루종일 흙 속에서 사셨다. 상좌 성팔스님은 “큰스님의 시봉이 됐다니까 어떤 스님이 발우를 선물하며 저보고 행복한 놈이라고 하데요. 그런 큰 스님 밑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복이냐는 말이었죠”라고 술회했다.

범룡스님을 시봉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성팔스님이 범룡스님께 들었던 말씀은 “아상을 버리고 공부에 열중해라. 경을 알고 참선을 하는 게 좋다”는 단 한마디뿐이다.

비로암 주지 수련스님은 “20년 가까이 스님을 모시고 살았지만 스님께서 손수 다하시니 해드릴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늘 조용하시면서도 철저한 수행을 하시면서 평상심 그대로 사시는 모습 자체가 저희에게는 수행의 귀감이죠” 라고 말했다.

언젠가는 정당 간부들이 범룡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비로암을 다녀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참수행자를 봤다”고.

1914년 평북 맹산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193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 38년 만허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유점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으며, 41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상원사 수덕사 범어사 해인사 등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했다. 80년 동화사 주지, 94년 봉암사 조실을 역임했으며, 77년부터 지금까지 동화사 비로암에서 주석해 오고 있다.



200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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