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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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과의 대화】 범룡스님
“부처님과 똑같이 되세요”


초파일은 성불 다짐하는 날
계 지키기 머리가 아닌 몸으로


◇계율이란 불제자로서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의 길라잡이라고 강조하시는 범룡스님.

◇범룡스님은 부처님처럼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원을 가지고 정진하기를 권유하셨다.


*약력
·1914년 평북 맹산 生
·3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허스님을 은사로 득도
·41년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덕사 범어사 해인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안거 성만
·80~81년 동화사 주지 역임
·94~96년 봉암사 조실 역임
·99년 11월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추대
·현재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에 주석


범룡스님. 현대불교자료사진.
“우리도 부처님같이” 불기2544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는 불자들은 누구나 부처님처럼 살기를 희망하며 성불에의 원(願)을 새롭게 세운다. 색신으로 몸을 나투시어 무명중생들에게 누구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일깨운 인류의 대스승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자비의 등, 지혜의 연등으로 온통 아름답게 장엄된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에는 일생을 참선수행에 매진해온 범룡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다. 스님을 배출하는 계단(戒壇)의 설치와 운영 수계식 등을 관장하는 막중한 책임인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맡고계시는 범룡스님을 뵙기 위해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을 찾은 날은 대웅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유난했다. 그렇지만 그 소리는 마치 ‘우리도 부처님같이’ 노래처럼 싱그럽게 들려왔다. 세수 87세의 범룡스님은 비로암의 비로자나부처님처럼 자애로운 미소가 얼굴 가득해 뵙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 지고 평화로워졌다.



─만해스님께서는 ‘부처님 나심은 온 누리의 빛이요, 뭇 삶의 목숨이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시대는 급변하고 물질은 풍족해졌지만 세상살이는 더 각박해지고 인간성은 메말라가며 대립과 갈등, 탐욕과 분노가 중생을 얽어매고 있는 이 시대, 부처님께서 이땅에 오신 뜻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절집에서 가장 많이 쓰고 또 인사로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 ‘성불하세요’예요. 이 말 보다 더 좋은 말은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부처님과 똑같이 되라는 말”이니까요.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 직후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선언하셨지요. “하늘위와 하늘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다 고통속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인류에게 희망을 준 자비선언 이자 인권선언입니다. 비록 무명에 가리워져 있지만 우리 모두가 찬란한 불성을 가진 주인으로서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마치 밝은 횃불처럼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날 길을 가르쳐 주셨지요. 다른 종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내세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다고 하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길을 걷기만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성불할 수가 있다고 일깨웁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서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생기도록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고 성불에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날이 되었으면 하지요.


─스님께서는 출가하신지 60년이 넘으셨고 또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참선으로 일관해 오셨습니다. 불교 특히 선이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 인류를 이끌어갈 정신문화의 대안이고 중심축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불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참선공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참선의 묘미는 어디에 있는지요.

▲어느 해던가, 부처님 성도절 용맹정진을 일주일간 하는데 그때 삼매에 들었던 것 같아요. 하여간 불법이 좋은 줄 알려면 삼매에 들어야 되겠더구만. 삼매라는게 들고싶다고 드는게 아니고 이렇게 앉아서 일주일동안 용맹정진하다 보니까 저절로 삼매에 들은 거지. 삼매에 들면 마음이 정해지고 육체도 정해지고 눈동자도 정해지고, 눈동자도 이렇게 움직이질 않고 서요. 눈으로 보기는 보는데 평상시와 다르지요. 보통때는 내가 보겠다는 생각이 그리로 가서 보지만 삼매에 들면 내 눈이 면경이라. 사물이 눈동자에 와 비치니까 보는 게지. 그러니까 무심으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삼매에 들어 칠일 이칠일 삼칠일 돼 가면 다 깨달을 수 있다는 건데... 혼자 앉아서 하면 칠일이고 이칠일이고 하겠는데 대중이 모여 앉아서 하다 그렇게 되니까 다리 푼다고 포행하다보니 그만 멈춰버렸지요. 세시간 정도 삼매에 들었는데 누가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 다 들리고, 모두 와서 이 수좌가 자나 죽었나 눈동자를 뒤집어보고 했어요.

하여간 화두와 하나가 되어 삼매에 들면 그 공부재미가 말할 것이 없지요.




─스님께서는 어느 화두를 드셨습니까?


▲‘무’자 화두지요.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으니 “무(無)” 해버렸거든. 조주스님이 “무” 했는데 조주스님이 무라 했으니 아무 것도 없는 무라 생각하지 말고, 있다, 없다 로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무’ 자 화두와 내 마음하고 하나가 되서 끊임없이 뚫어야 합니다. 내 맘 하고 화두 하고 조금만 떨어져 벌어지면 그저 망상이 나오고 밖에서 잠이 들어오고.... 화두와 내 마음이 하나가 따악 되면 잠도 못 들어오고 망상도 못 들어와요. 그러나 이것은 참선을 많이 해본 사람 아니면 알아듣기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지요.



─불자들은 참선 뿐 아니라 간경과 주력, 염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수행법으로는 깨닫기 어렵다는 말도 있고 하는데 이들 수행법과 참선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흔히들 간화선이 최상승의 선이라고 하지요. 최상승 근기를 타고나야 제대로 할 수 있지, 보통이나 낮은 근기를 타고나면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근기에 따라 염불이나 간경, 주력을 해도 깨닫겠다는 수행의 목적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얼마나 꾸준히, 열심히 하느냐는 점이지요. 주력중에서 불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진언이 천수다라니입니다. 진언을 자꾸 외우면 가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생활 틈틈히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을 자꾸 하면 좋겠어요. 다라니를 하면 내 힘이 반, 부처님 가피력이 반이예요. 요즘 같은 말세에는 중생들이 다라니를 열심히 하면 좋겠는데 건성으로 하거나 아예 하려고 하지도 않지요. 사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참선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참선이예요. 근본적으로 보면 염불과 참선이 같아요. 염불(念佛)이란 것이 생각 염 자에 부처님 불자 아니예요? 염불 하는 사람이 정말 생각이 염불에 딱 붙어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해야지 건성으로 염불하면 그게 뭐 아리랑 타령이지. 한번을 해도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해야 됩니다.

관세음보살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해가지고 관세음보살이 됐다는 이야기가 경에 있어요. 무슨 수행을 하든지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부처님을 생각하며 일념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스님들 사이에 지계정신이 자꾸 흐려져 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98년과 99년 두차례 일어난 조계종 사태도 청정계율 정신이 희박해져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계법(戒法)을 전하는 계사이며 종단의 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전계대화상으로서 안타까움이 더욱 크실텐데요. 일부에서는 2천5백년전에 만든 계율이기에 현대에 맞지않아 계율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난이 부처님 임종전에 여쭈었지요, 부처님께서 오늘은 계시지만 내일 열반에 드시면 뵈올 수 없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어떡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하셨지요. 불교가 올곧게 살아나려면 계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술먹고 고기먹는게 반야지에 걸림이 없다나 뭐라나 하며 제멋대로 합리화를 시키는데 그런 중생은 제 업대로 살다 가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진정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계율은 머리로 아는 것도 아니고 말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계율이란 불제자로서 걸어야 할 길을 가는 길라잡이요, 지침인데 파계를 한다면 어떻게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계율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계를 받고 안 지키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 탓이지 남이나 주위 환경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신라때 자장율사는 “내 차라리 계를 지키면서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수행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일반 재가불자들도 오계를 평소 생활에서 지키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계라는 것이 거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활화될 때 개인 생활 뿐 아니라 사회도 청정해지고 양심적이 돼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깨끗하고 양심적으로 살 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부터 오계를 지키고 산다면 이 세상은 한층 밝아지고 청정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현대 사회라는 것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겐 유혹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쉽사리 주위 환경에 끄달리고 중심을 잡기 어렵습니다. 50~60대의 불자들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이 젊을 때의 사진을 보면 젊고 탱탱한 모습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왜 이 때부터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까, 왜 쓰잘데 없는 헛일에 시간을 낭비했을까 안타깝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사실 젊어서는 불법을 만나도 나중에 수행하면 되지 뭐 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기 십상입니다.

▲‘사난득(四難得)’이란 말이 있어요. 네가지 얻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사람몸 받기 어렵고 남자로 태어나기 어렵고, 출가사문이 되기 어렵고,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불자들이야 불교안에서 사니까 잘 모르지만 부처님법 만나기는 정말 인연이 안되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부처님법 만났을 적에, 그리고 참선법을 만났을 적에 전심전력으로 한번 해보기를 권하는 것이지요.

특히 출가의 인연이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승려생활이라는게 남보기엔 편한 것 같지만 사람구실 할려면 금생에 한 생 안 난셈 치고 부처님처럼 해보자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공부하다보면 유혹이 많게 마련이지요. 공부하다가도 이게 아닌데 혼돈도 오고 곧장 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렵기 그지 없어요. 그러기에 스승과 도반이 필요합니다. 어쩌다 불법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선을 한 번 해 보려면 여간해선 어려워요. 세상만사 다 작폐하고 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 없다, 금생에 이것밖에 할 일이 없다 그 생각만 있어도, 남은 생을 성불하는 일에 몸바치며 해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조금 하고 나가 자기 볼일 보고 또 조금 하고... 껍데기만 하다보면 도가 터질 수가 있나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 참선하는 도리를 알았으면 그것에 몸을 한번 던져보아야지요. 그래서 옛분들이 그랬어요. “한번 사람의 몸을 잃어버리면 만겁이라도 또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려우니 모든 도 닦는 사람은 간절히 모름지기 도를 닦을 지니라.”


─대부분 말을 들어보면 일심이 지속이 돼야, 소위 말해 화두일념이 돼야 견성성불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방에 계신 스님들도 일심을 지속하기 어려운데 속가에 있는 재가불자들은 할 일도 많고 그런데 과연 깨칠수 있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속에서 하는 말이, 무슨 일이 잘 안되거나 속상할 때는 에이 산중에 가서 도나 닦아야지 하는데 산중에 가 앉아있다고 도가 닦아집니까? 조용한 산중에 들어앉아 있으면 처음엔 참 좋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면 도는 안 닦아지고 산밖에 안 보입니다. 산중에서 참선공부에 몰두하기도 어려운데 직업가지면서 깨칠려면 마음적으로 더욱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할 일이 많아도 다른 일은 좀 덜하고 공부해야지요. 재가불자들은 좀더 부지런해야겠지요. 아침에도 좀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도 좀 늦게 자고 시간을 내야지요.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잠도 좀 덜 자고 시간을 내어 자기수련을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늘상 얘기합니다. 마음을 찾아야 한다고 하고, 비워야 한다고 하는데 마음도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요.

▲우리 마음이 항상 생주이멸(生住異滅)로 끝나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무슨 생각이 죽 나서는 조금 머물러 있다가 달라지거든요. 아침에 자고 깨서부터 잘 때까지 몇가지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요, 백 가지를 했는지 더했는지... 그런데 그것이 모두 생주이멸로 끝납니다. 우리 몸은 생노병사로 끝나고, 우리가 앉아있는 지구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거든요. 모든 것이 영원한 줄 착각하지만 어느 것 하나 무상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돌아가니 고정된 실체란 게 없고 실체가 없으니 집착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마음의 본성을 깨달아 보세요. 생주이멸하는 마음을 깨닫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곧 꿈속임을 안다면 깨달았다고 할 수 있지요. 모든 것이 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여기 팔공산에도 기도객들이 많이 오는데 기도할 때 원을 좀 크게 세워보세요. 내 가족, 내 자식을 위한 기도만을 할 것이 아니라 성불해서 부처님처럼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야 되겠다 이런 대원(大願)을 좀 세워보세요. 하나의 등을 밝히면 어둠이 물러가고 밝아지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밝히는 연등과도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부처님오신날만이라도 새롭게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대담=이경숙 부장(gslee@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ybgo@buddhapia.com)



200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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