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없이는 절대로 열반과 해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조계종 교육원 부설 불교서울전문강당이 12월 8일 한국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마련한 초청 특강에서 해인총림 율주 종진 스님은 40여 대중에게 “오직 지계행으로써 수행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행자는 ‘바른 믿음’을 통해 수행의 첫 걸음을 올곧게 내딛어야 하고, ‘번뇌라는 도적’은 계율로 붙잡아야 한다고 법문했다. ‘왜 계율이 필요하고, 수행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날 스님의 특강 내용을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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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의 첫걸음, ‘바른 믿음’ 키우는 계율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맹신이다. 또 미친 사람처럼 믿는 것은 광신이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다 배격했다. ‘바른 믿음’을 정신(正信)이라 하는데, 그 반대는 사신(邪信)이다. 삐뚤어진 믿음은 광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다.
<지도론>에서는 “불법 대해에는 믿음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는 믿음이 없이 성립될 수도, 깊이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맹신하고 광신을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열반에 도달할 수 없고,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곧 해탈할 수 없다는 의미다. 때문에 계율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믿고 가는데 ‘사다리’와 같다. 계율에서 수행의 첫걸음인 ‘바른 믿음’이 시작된다.
# 계율이 수행에 필요한 까닭은?
흔히들 과정은 어떻게 되든지 목적에만 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도만 깨달으면 됐지 계율이 뭐가 중요하느냐고 주장하는 출ㆍ재가자들이 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은 목적도 과정도 모두 중시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로써 강조했다.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철저한 지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논서(論書)에서는 계정혜 삼학 가운데, 계가 첫 번째라고 강조한다.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도제(道諦)가 바로 팔정도요, 팔정도가 중도라고 말한다. 맹신도 광신도 아닌 바른 믿음은 바로 중도적인 믿음이라야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팔정도에서도 정어(正語:바른 언어적 행위) 정업(正業:바른 신체적 행위) 정명(正命:바른 직업과 규칙적인 생활에 의한 바른 생활)은 바로 삼학 중 계에 해당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성실론>에서는 “계는 번뇌라는 도적을 붙드는 것과 같고, 정은 번뇌 도적을 포박하는 것이며, 혜는 번뇌라는 도적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한다. 즉 번뇌라는 도적을 붙들어야 포박할 수도 있고, 그 번뇌라는 도적을 꼼짝 못하게 죽일 수도 있는 것이라며, 계율의 중요성을 말했다.
또 계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 가운데, ‘계피(戒皮)’란 말도 있다. ‘계의 피부’란 뜻이다. 그리고 정(定)은 살, 혜(慧)는 뼈에 비유한다. 즉 ‘계피정육혜골(戒皮定肉慧骨)’이란 말로 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피부암에 걸렸으나 고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삼학 가운데 계를 처음에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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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안정시키기 위해 계율 제정
스님들은 스님답게 살 의무가 있고, 재가신도는 재가신도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하도록 만든 것이 계율이다. 여기서 ‘계’란 글자의 한자를 살펴보면 ‘두 손에 무기를 들고 경비를 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죄를 짓고 고통 받으며 사는 걸까? 번뇌 때문이다. 번뇌로 죄를 짓고, 그 죄로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래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인 번뇌를 없애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계란 도구이다.
<율장>에 의하면, 처음 계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칠불통계(七佛通戒)였다. 그 가르침만 갖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부처님 성도 후 12년이 되던 어느 해, 속가 모친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자식을 낳아준 수비나 비구의 문제가 발단이 돼 본격적으로 계율이 하나 하나씩 제정됐다. 부처님이 계율을 마련한 것은 ‘어떻게 하면 교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가’란 가장 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 지계에는 출ㆍ재가 ‘따로’ 없다
이처럼 중요한 계율은 출ㆍ재가에게 따로따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이같이 생각하거나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출·재가자든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이지, 자유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 5부중(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니), 재가 2부중(우바새, 우바이)이 계율에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통계조사조차 없다. 계율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희박하다.
선(禪)에서 열반을 안심입명이라 하는데 그 자리는 수행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불자라면 수행을 해야하고 계율정신으로 믿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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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문1 : 오계를 받았지만 지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마다 참회를 하지만, 늘 이처럼 범계를 반복한다. 참회하면 죄가 사라지는 것인가?
답 : 지킬 수 있는 계목만 지켜도 된다. 이를 분수(分受)라 한다. 지계에 자신이 있으면 수계할 때 각 계목에 대해 대답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답하지 마라. 거짓말을 할 바에는 ‘지키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좋다.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계율을 모두 지킬 수 없다. 참회를 하면, 더러운 옷을 세탁하듯이 깨끗해진다고 했다. 잘못을 했어도 바로 뉘우치면 그것은 용서가 된다. 단 그것을 반복하면 안 된다.
문2 : 현대사회에서 중도적 삶은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계율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답: 개차(開遮)법은 부처님만이 할 수 있다. 지금은 무불(無佛)시대다. 어느 누구도 계율에 융통성을 부여할 수 없다. 여기에는 방편도 적용 안 된다.
문 3: 스님께서는 승보(僧寶)를, 구족계 받은 비구ㆍ비구니만 적용된다고 했다.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는 승보에 속하지 않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답 : 사미는 넓은 의미에서 비구에 속하나 승보에 들지는 않는다. 사미는 사미라 하지, 사미승이라 하지 않는다. 식차마나, 사미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출가 5부중 가운데, 비구 비구니를 승보라 하고, 나머지 3부중은 승보가 아니다. <석문귀경의(釋門歸敬儀)>에 따르면, “비구 비구니 2부중이 승보에 속한다”고 명확하게 적혀있다. 사실 승의 개념도 처음에는 비구만을 의미했다. 그러다 구족계만 받으면 도를 깨닫든 못 깨닫든 상관없이 승보에 속하게 됐다.
문4 : 사회적 이슈인 줄기세포에 관련된 종교적 이견이 있다. 스님의 의견은?
답 :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계율이 윤리의 문제지만, 줄기세포 관련 사항은 불교의 생명관과 결부시켜 이해할 부분이다. 내가 성체세포니 배아줄기세포니 하는 것을 계율과 결부시키면, 논란만 부추길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