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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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기억이 현재 지배하면 無明
정화 스님의 '대승기신론' 강의로 배우는 '무명의 정체'
-원래 청정한 마음, 법계가 하나임을 알지 못해 무명 생겨

-일심(一心)은 ‘삶과 죽음’ ‘진여와 생멸’ 등이 ‘다르지 않음(不異)’ 강조
-‘내가 진여, 즉 생멸하는 그 자체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기신론> 공부의 관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다. 그런데, 왜 무명(無明)이 일어나는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용수와 함께 보살로 추앙받는 마명이 중생들에게 대승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게 하려고 쓴 논서다. 따라서 무명의 정체를 물은 첫 질문은 <기신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마명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기신론>은 어렵기만 하다. 30년 넘게 <기신론> 연구에 매달려온 은정희 前 서울교대 교수도 “한 자 한 자가 암호 같았다”고 고충을 토로할 정도다.

그럼, <기신론>에서는 마음의 본질과 무명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11월 26일 오후, 정화 스님이 지난해 10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강의하는 서울 원남동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강의실을 찾았다. (02)3673-1125



# <기신론>, 너는 누구냐?

대승경전에서는 “불법의 큰 바다는 오직 신심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했다. 신심이야 말로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모체라는 의미다. <기신론>도 예외가 아니다. ‘믿음’의 강조에 있어 둘 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다.

정화 스님이 11월 26일 서울 원남동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강의실에서 대승기신론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김철우 기자
정화 스님은 마음의 본질과 무명에 대한 설명에 앞서,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말부터 풀어냈다. 마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깨달음의 봉우리가 되니,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승경전에서 ‘내가 부처라고 하는데, 부처 같지 않다’라고 의심을 갖지요? 그래도 계속 일심(一心)으로 이어가야 해요. 그러면 ‘내가 진여 그 자체로 부처의 활동이다’라고 점점 믿어 가는 마음이 생깁니다. 딱 믿는 마음이 생기면, ‘진여’ ‘생멸’ 일체가 부처의 활동이라는 인식 내용이 자리 잡습니다.”

<기신론>은 모든 중생들의 본래적인 참모습인 진여심을 나타내는데 그 핵심이 있다. 즉 진여심이 근본바탕이 돼, 이 마음이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법을 모두 포섭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때문에 ‘중생일심(衆生一心)’을 근본종지로 해 진여와 생멸의 두 문으로 열고 생멸의 근본을 철저하게 밝히고 미혹과 깨달음의 근원을 추구함으로써 그에 따른 수행의 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 ‘무명(無明)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마음의 근본 특성에는 염(念:기억)이 없어요. 염이 없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거죠. 그런데 법계가 하나인 것을 통달하지 못해 망념(妄念)이 생깁니다. ‘망념’은 과거의 어떤 것으로부터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홀연히’ 일어나죠. ‘홀연히’ 는 마음이 바로 전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어느 순간에 염이 일어나 그 일어난 마음이 뒤로 이어져 무명이 되는 겁니다.”

무명에 대한 정화 스님의 설명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무언가를 ‘인식한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한 순간이라도 과거에 기억돼온 영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그건 다 무명이다. 과거의 기억과 배경이 현재 순간을 지배하면, 그것 자체가 무명이라는 설명이다.

정화 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재가불자들. 사진=김철우 기자


# 언제 어떻게 무명을 끊을 수 있을까?

“현재 마음자리를 잘 관찰하면, 마음이 쉬게 됩니다. 그러면 늘 작용하는 ‘무명의 힘’이 줄어들게 되지요. 관찰을 열심히 하면 이 같은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의식이 다음 순간에 작용하기에 지금 관찰하면 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정화 스님의 설명이다.

정화 스님은 이런 어리석음의 원인을 ‘분리식(分離識:나눠 인식하려는 인식작용)’으로서의 의식에서 찾았다. 영원불변한 도리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의 변화상인 ‘생멸(生滅)’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생멸’에서 ‘나’란 존재에 집착하게 되고, ‘항상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리식’이 무명을 키운다는 의미다.

그럼, <기신론>에서는 무엇으로 무명을 끊으라고 할까? 스님은 ‘한 마음(一心)’에 있다고 강조한다. 일심에 대한 이해가 무명을 끊어내는 ‘지혜의 칼’이 된다는 것이다.

“‘생멸’을 강조하면, ‘불생불멸’을 못 본다고 했지요. 그래서 ‘생멸’만 보면서 고착된 삶을 사는 것을 범부라 합니다. <기신론>에서는 ‘일심’으로 살라고 누누이 말합니다. 일심은 ‘삶과 죽음’ ‘진여와 생멸’ 등이 ‘다르지 않음(不異)’을 가르쳐줍니다. 그 구체적인 설명이 바로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지요.”



# ‘불생불멸’이 ‘진여문’, ‘생멸’은 ‘생멸문’

두 개의 문, 진여와 생멸. 정화 스님은 “<기신론>은 ‘한 마음’, 즉 일심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의 길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두 개가 다른 게 아닙니다. 삶 속에 그 자체로 드러나 있습니다. ‘진여’에는 생멸문이 아닌 게 없고, 또 생멸한다고 해서 ‘진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여와 생멸의 혼재가 일심(一心)이지요. 우리네 삶이 끊임없이 변하고, 고통스럽다보니 ‘생멸’에 익숙한 나머지 ‘진여문’을 잠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잊어버린 사람을 범부라 하는 겁니다. 사실 한 마음 가운데에는 둘이 함께 있습니다.”



# 밖에서 찾지 말라

정화 스님은 마지막으로, ‘마음이 부처’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면 외도가 된다고 강조한다.

“마음을 총섭(總攝:모두 포괄한다)이라고 합니다. ‘심성(心性)’은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 획득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일체 마음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듯,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인 것을 깨닫게 되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스님은 이어 일심의 일체 활동이 모두 ‘부처(佛)’라고 설명한다. 이 이치를 적게나마 경험하면 법신을 체득하게 되고, 깨달음의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즉 부처는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순간순간 깨어있는 상태에서 인식하는 활동이란 의미다. 모든 인연 처에서 자유자재하게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에, 부처가 된다는 설명이다.

삶과 죽음 진여와 생멸은 하나라고 강조하는 정화 스님. 사진=김철우 기자


▤ 정화(正和) 스님은?

-소장학자에게 경전강의 5년째

2002년 조계종 기초선원에서 <중론>을, 올해는 <금강경>을 강의한 정화 스님은 30년전,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도견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송광사 해인사 백장암 등에서 10안거를 성만하고, 현재는 제주도에서 전셋집을 얻어 10년 넘게 홀로 수행 중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의 인연은 2001년부터. 소장학자들에게 <금강경> <유마경> 등의 불교경전을 수행의 언어로 풀어내 호응을 받고 있다. 또 서울 가회동 연등회관에서는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10년 넘게 <유식삼십송> <반야심경> <금강삼매경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글ㆍ사진=김철우 기자 |
2005-12-01 오전 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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