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차이로 거리의 번잡스러움은 간데없고 산사의 고요만이 팔달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곳 팔달사를 40여 년간 지키고 있는 조실 범행 스님은 전날 법주사에서 결제법어를 내리고 온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법을 청하는 자리를 물리치지 않았다.
진성은 물들지 않아 본래 원만한 성품이고(眞性無染本自圓性)
다만 망령된 생각을 여읜 즉 부처와 같으니라(但離妄念則如如佛)
어제 법주사에서 결제에 드는 수행자 200여 명을 만나고 왔습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수행자들이 결제 기간 동안 ‘본래 자기’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게송을 들려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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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지구가 만들어졌을 때 이 지구는 너무나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땅에는 곤충과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고 초목 과수도 아름드리 우거져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과일, 좀 더 많은 곡식, 좀 더 많은 고기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농약을 쓰고 비료를 주고 땅을 파헤치고 하면서 땅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기반인 땅이 죽는데 어떻게 사람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달픈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妄想) 공상(空想)에 사로잡혀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에 집착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욕심을 끊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이뤄지지 않으니 성내는 마음, 즉 진심(瞋心)이 생기게 되고 이 진심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癡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이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제 스스로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대로 안 되면 부처님께 ‘무엇을 해주십시오’ ‘무엇을 이뤄주십시오’ 하고 자꾸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버리라’는 것인데, 왜 자꾸 부처님께 바라고 이루려 합니까?
하루 밥 세 그릇 이상 있으면 오히려 귀찮은 겁니다. 재산을 잔뜩 집에 쌓아놓으면 도둑맞을까 걱정만 되잖아요? 내가 노력해서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속을 썩게 마련이고, 늘 ‘살기 힘들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탐심(貪心)을 내지 말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쉬어야 합니다. 나보다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조금 더 가지려 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진정한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자들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모자란 사람에게 늘 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바로 들여다보고 인욕하며, 수행에 힘써 마음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부처님께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나눠주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늘 수행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수행이라고 하면 참선이나 간화선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에는 다 외도로 취급하는 참선지상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佛家)에는 참선 외에도 많은 수행법이 있지요. 저는 그동안 수차례 법문을 통해 제가 불문(佛門)에 들어와 수행했던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부잣집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몸이 너무 약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술 담배도 멀리한 채 화학공장을 경영했습니다. 비누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하루는 실험을 하다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우리 집안은 아버님과 두 형님, 작은어머니까지 모두 폐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폐병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렇게 살다 젊은 나이에 각혈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구사일생 살아난 거예요.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어요.
그 후 요양이라도 할 생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싸들고 금산 태고사를 찾았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포산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스님과 3주 동안 문학과 철학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부처님법 앞에서는 그동안 내가 배운 문학이나 철학이 가진 한계를 뚜렷이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지요.
출가 후 포산 스님은 저에게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佛頂心觀世音菩薩母陀羅尼)’를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생사의 위대한 법을 일러주신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가고자 잠도 자지 않고 다라니를 외웠습니다. 그렇게 5주 정도 지났을까,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주치의였던 일본인 의사가 나타나 ‘이제 다 나았구나. 아주 잘 됐다’고 말하더군요. 깜짝 놀라 깼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기운이 나고 아픈 것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피력으로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 후 서울 선학원에서 조실로 계시던 금오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됐는데, 스님은 늘 ‘참선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주력 수행에만 매진했던 터라 처음엔 참선이 잘 되질 않았어요. 그래도 스승의 말씀을 따르고자 틈틈이 참선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공주 마곡사의 토굴에서 정진하게 됐는데, 그때 참선이나 주력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이러한 제 경험을 바탕으로 늘 불자들에게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매진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한다고 말합니다. 염불이든 주력이든 참선이든 자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극한 마음으로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실 겁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도(道)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자라고 하면서 부처님 생애도 제대로 모르거나 경전 한 줄 읽지 않는다면 어찌 큰 가르침을 얻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참선한다고 벽만 보고 있으면 깨달음이 얻어집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열심히 읽다보면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이라는 한 구절을 보고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들이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경전이나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깨쳐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깨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깨친다’는 것은 인연법을 제대로 안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흔히 불자들은 ‘인연이 없다’ ‘인연에 따라 이뤄진다’고 말을 하며 인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인연법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인연, 즉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인과란 철저한 것입니다. 미래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과거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똑바로 보면 됩니다. 불교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신통력 있는 종교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과의 원리를 잘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짓는 모든 것이 인연이 되고 업이 되기 때문이지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저 사람이 없어져야 내가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수천수만 가지의 직업이 있는데, 그 직업들 중 홀로 존재하는 직업이 있을까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자동차를 타고, 그걸 또 고쳐주는 사람도 필요하지요. 여기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기 위해서는 석유를 캐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런 겁니다. 모든 직업이 존재해야 하고 원만히 굴러갈 때 우리네 삶이 올바르게 영위됩니다. 우리가 화합해서 더불어 잘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 생을 버려서라도, 한 생에 이룰 수 없다면 누생(累生)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치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부처님께 복 빌고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참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그것만이 크나큰 부처님의 자비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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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풀들을 만나는 게 참 좋아요. 풀들이 날 보고 ‘스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난 이 풀 한 포기를 뽑거나 가지를 칠 때도 ‘얘들아, 미안하다. 이걸 잘라야겠구나’하고 얘기해줘요.”
전날 법주사까지의 장거리 이동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범행 스님은 기자를 데리고 직접 사찰 곳곳을 안내해주셨다. ‘호랑이 담배 피는 모습’이 담긴 사찰 벽화와 씨앗으로 심어 지금은 아름드리로 자란 은행나무, 전국 곳곳에서 모종을 얻어와 심고 가꾼 백목단ㆍ작약 등을 일일이 일러주던 스님은 “거짓 없는 자연처럼 사람들도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여든 다섯이라는 세수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빛을 간직한 스님에게 건강 비결을 여쭙자 “특별히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오후불식하는 것이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답하셨다.
1921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5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55년 봉은사 주지, 56년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 57년 서울 조계사 주지, 68년 불국사 주지, 71년 대한불교신문사 사장, 75~91 재단법인 선학원 1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수원 팔달사와 속리산 법주사 조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