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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으로 읽고 분심으로 못 깨침을 경책해라”
【기획인터뷰】선학자 현각 스님에게 배우는 선어록 공부



선어록은 역대 조사들의 수행창고이기에 후학들에게 수행의 나침반이 된다고 강조하는 현각 스님. 사진=김철우 기자
“세 가지 마음으로 선어록을 읽어야 한다. 신심(信心)으로 읽고, 의심(疑心)으로 뜻을 헤아리며, 분심(忿心)으로 ‘조사의 뜻을 왜 모르는가’를 늘 경책해야 한다.”

중국 조사 24명, 한국 선사 27명의 어록을 묶어 최근 <선어록 산책>을 펴낸 동국대 선학과 교수 현각 스님(사진)은 선어록 공부의 자세를 이렇게 강조했다. 법주사 혜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현각 스님은 2000년에 한국선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온라인(on-line) 선어록강좌’를 개설하는 등 선어록 공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선사들이 깨닫기까지의 수행과정과 깨닫는 순간의 상황을 기록한 선어록. 그 선사들의 발자취를 언어ㆍ문화ㆍ시대ㆍ지역을 초월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읽고 공부해야 할까?



▶선어록 공부가 왜 필요한가?

-역설적으로 선에서는 문자를 활용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경전도 조사어록도 문자로 돼있다. 왜 그런가? 구전으로 이어지면, 사(邪)가 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은 공부경지를 부득이 문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본인만 알고 끝났다면, 그것은 역사와 진리의 단절이 되는 것이다.

선어록은 역대 조사들의 수행창고이기에 후학들에게 수행의 나침반이 된다. 마치 길을 가본 사람이 가는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초행자는, 지역은 알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 이처럼 선어록은 공부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절대 필요하다.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을 중시한다. 이런 수행정서에서 문자로 된 선어록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수행자에게 깨달음의 계기 또는 기연을 줄 수 있는가?

-석가여래는 별을 보고 깨달았다. 역대 조사들은 기연을 만나는
데 한결같이 소리로써 깨달았다. 육조 혜능 스님도 <금강경>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글귀를 소리로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보조 스님은 선어록을 낭독하다가 깨달았다. 그래서 누구든 조사들의 선어록 언구(言句) 어디에서도 모두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선어록에 등장하는 선사들의 말은 그것이 어디를 향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평상심, 자성, 본래 면목 등의 키워드로 선어록을 파고들면, 이해하기 쉽다고 한다.

-조주의 무(無)자 화두든 ‘이뭣고’란 공안이든, 몇 개의 공안이 선어록 이해의 키워드가 된다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중생의 근기가 제각기 다른 상황에서 몇 개의 공안으로 선어록을 이해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광대무변한 마음의 세계를 한곳에 묶어 두는 것이 된다. 선어록 공부에서 개념설명에 치중하면, 도식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소위 ‘핵심언구’에 천착하면 치열한 수행의 결과인 어록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선어록 공부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선어록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어록을 쓴 조사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보고 읽어야 한다. 세속의 잣대와 지적 욕구 충족 차원에서 선어록의 책장을 넘기면, 공부 의미가 없다. 조사스님들의 정신세계부터 이해하고, 그 세계에 몰입해 그 어록과 동체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선어록은 선사들의 대화다. 두 가지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과 당사자의 직접적인 체험을 자기화해서 읽는 것이다.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은 모든 사람의 본성은 완전하고 온전하고 완성됐는데, 이런 본성이 번뇌와 욕심에 뒤덮여 제 기능을 못한다. 그런데 번뇌나 욕심은 실체가 허망하기 때문에, 그 허망함을 자각해 무심하게 그 본성에 내맡겨 그 본성을 따르면 그것이 깨달은 이의 삶이다. 선사들은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다.

조사스님들의 직접 체험을 알아차려야 한다. 어느 선어록을 보더라도 깨달음이란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그것도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한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선객의 질문에, “호떡!”이라 대답한 조주선사의 말이 있다. 이 말은 호떡으로 상대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이다. 부처 내지는 깨달음의 문제는 남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니, 입 닥치라는 호령이다.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사자의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각 스님은 "누구든 조사들의 선어록 언구(言句) 어디에서도 모두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김철우 기자
▶불교에 갓 입문한 불자들이 선어록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수행체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체험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해, 그 표현과 체험이 일치하는가를 늘 관조해야 한다. 이렇게 해 자신의 수행이 제대로 되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 또 활구(活句)를 터득해야 한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 지은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이는 문자를 떠난 교외별전의 이야기다. 이것이 활구다. 사구(死句)는 경전 등을 통해 구절구절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혜종고는 스승의 <벽암록>을 불살아 버리면서, 문자선(文字禪) 해오선(解悟禪)을 경계했다.




▲그렇다면, 선어록을 간경수행처럼 하면 공덕이 되는가?

-간경은 경전의 소중한 가치에 호감을 가지는 것 자체가 무량공덕이 된다. 그럼 선어록을 읽으면 공덕이 될까? 그렇지 않다. 한 구절 알고 읽으면서 그 뜻을 음미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내버리거나, 또 조금 내용이 눈에 보인다고 까불면 안 된다. 내용을 모르면 ‘그 말에 뜻이 있을 턴데’ 하고 자꾸 참구하는 자세가 돼야 공덕이 된다.




▶실제적인 노력은 어떻게?

-우선 선종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선을 어떻게 지금까지 흘러왔는지, 어떤 조사들이 법을 폈는지 개괄적이라고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핵심을 꿰뚫는 안목이 갖출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된다. 구체적인 노력으로는 한자 공부가 필요하다. 물론 한자가 어려우면, 한글로 된 선어록을 먼저 읽어도 된다. 만약 한글로 번역된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한문 원문을 볼 경우, 뜻을 쉽게 알게 된다. 또 수시로 조사 어록을 써보고 외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록이 툭 튀어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르는 낱말 뜻이 있으면, 수시로 사전도 뒤져봐야 한다.




▶선어록 공부에 있어 주의할 점은?

-선어록만 보고 선을 이해하면 안 된다. 무임편승하는 것과 같다. 또 선수행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선어록을 보지 않고, ‘혼자도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면 안 된다. 특히 좀 앞서 간다고 지적 받은 사람은 겸허한 마음으로 읽어야 되고, 자기 공부에 용맹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용맹심을 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선어록 한 권씩 읽어나가면서, 수행자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치우쳤구나’, ‘내가 너무 풀어놓고 살았구나’ 하고 자신을 늘 반성해야 한다.




▶스님이 펴낸 <선어록 산책>에서 재가불자들 공부에 유익한 구절을 소개한다면?

-요즘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는 분별심을 내, 덜 가진 것에 불만을 갖는다. 수행에서 이 분별심은 가장 큰 장애다. 보조 스님 제자인 혜심 선사의 <혜심어록>에서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혜심 선사 상당법문 어록에 의하면, “평등이란 산을 깎아 연못을 메운다든가 학 다리를 잘라 오리 다리에 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긴 것은 길게, 짧은 것은 짧게, 높은 것은 높게 해 모든 법이 그런 줄 알면 저절로 서로가 평등해진다”고 돼 있다. 불법에서 평등의 의미를 일러주는 대목이다. 평등의 불교적 이름이 평상심이다. 마음의 굴곡이 없이 한결같이 같은 마음을 말한다. 평등의 본래 면목을 가르쳐주고 있는 부분이다.

일상에서 평상심을 실천하기 위한 어록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 조주 스님의 <조주록>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도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자, 남전 스님이 “평소의 마음 그대로가 곧 도”라고 답한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는 법이다. 그와 달리 참된 부처는 오직 자신 속에 앉아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진불이 있다는 말이다. 수행을 통해 닦고 닦으면 진불이 내 몸에 내재돼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자기 터득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다.
김철우 기자 | in-gan@buddhapia.com
2005-11-16 오후 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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