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는 일상을 허덕이게 한다. 지지고 볶고, 세간 살이 역시 삶을 옭아매기는 매한가지다. 산중의 출가사문은 그런 재가불자에게 “수행해라”, “놓으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고 놓으란 말인가.
노사(老師)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재가불자들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노동을 선으로 삼으면 노동선(勞動禪)이고, 염불로 여기면 노동염불이다’였다. 11월 11일, 경북 청도 보현사 고불당(古佛堂)에서 팔순에 가까운 일우 스님(태고종 원로회의 의장)과 마주 앉았다.
곧장 물었다. “재가자들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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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행법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스님에게 다시 여쭸다.
“자기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면 돼. 비유를 들어볼까. 팔만대장경은 곡식과 같아. 쌀 보리 조 팥 콩 같은 것이 팔만대장경에 다 들어있지.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쌀이든 콩이든 손에 움켜줘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모두 다 손에 쥘 생각은 하지마. 물론 몸에 다 이로운 것들이지만, 하나를 잡아야 해. 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염불을,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간경을 선택하면 되는 거지. 사실 백천 가지 모두가 방편문인데,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이 있겠어. 걸어가든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가든 성불이란 목적은 같아. 온갖 곡식은 다양한 불교 수행법이 되는 거고, 근기를 찾는다는 것은 자기 몸과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안다는 의미지.”
이번엔 간화선 수행에 대해 물었다. “신심, 의심, 분심 등이 간화선 수행에서 중요합니다. 재가불자들이 이 세 가지 마음을 잘 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첫째가 신심이야. 신심이 없으면 참선이든 염불이든 간경이든 되는 것이 없어. 신심을 잘 내려면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해야 해. 그러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붙어. 실력이 붙지 않으면 잡념이 일어나지. 신심이 굳건하면 수행이 순조롭게 이어져 나가. 신심이 수행의 모체이니,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어.”
그럼, 불교의 핵심이 되는 연기법 수행을 일상사로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어떨까? 스님은 수행을 잘 하면 인과를 초월하게 된다고 말했다. 인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말씀이다.
“인과를 해탈해야지, 인과에 얽매이면 안 돼. 그런데, 심성(心性)이 심상(心相)에 잊고 있어. 심성을 깨달은 불자는 인과가 진공묘유(眞空妙有)임을 알게 돼. 인연을 받고 안 받을 수 없는 진공묘유인 이치를 알게 되는 거지. 부처 행세를 하면 부처가 되고, 개의 행세를 하면 개가 되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야. 인과법은 이처럼 진공묘유에서 나와. 바로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거지. 그런 본심도 인연도 여읜 자리가 염불삼매요, 참선에서의 의단독로(疑團獨路)야. 넘어서는 것, 인연도 참선도 석가도 조사도 해탈도 모두 다 뛰어넘어서야 하는 거지.”
최근 재가불자들에게 부각되고 있는 계율수행에 대한 질문도 했다.
“재가불자들이 계율을 잘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대승보살계에는 48계목이 있는데, 이 것 모두를 지키려면 한걸음도 걸을 수 없어. 걸을 때 발밑에 보이지 않는 생명들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지. 그냥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거지. 계의 근본은 청정 본심으로 돌아가려는 데 있어. 가령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목의 경우, 사람이 술을 먹고 취해 방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계목이야. 사실 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야. 계율의 근본은 청정심을 배양하는 거야. 청정심만 길러지면 자연히 계는 완성되는 거지.”
그렇다면, 재가불자들이 계를 지킬 때에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
“삿된 마음을 버려야 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지. 거짓말을 하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고 생활에 지장이 와. 거짓말을 잘못했다가는 쇠고랑 차고 형무소로 가기 십상이지. 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모든 것이 나빠지는 원인이 돼. 청정한 마음, 청정한 계를 지킴으로써 모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거지.”
불교수행의 고갱이는 청정한 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일우 스님. 지계행의 의미에 대해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지계행이 없으면 청정해질 수 없어. 물이 탁할 때 바람이 불면 안 돼. 바람이 가만히 있어야 흙탕물이 가라앉아 물이 청정해져. 욕심바람, 성내는 바람, 거짓말 바람, 사치 바람 같은 팔풍(八風)은 사람을 유혹하는 나쁜 조건을 만들어 내거든. 유혹이 바람이 되고, 그 바람이 파도가 돼 흙탕물을 만드는 거지. 계율은 잡념을 잠재우는 도구야. ‘화경청정지묵(和敬淸淨之?:화합과 공경으로 청정해지면 마음은 자연히 고요해진다)’은 계율이 모든 행위의 지침이라는 것을 일러주지.”
질문의 차원을 달리해봤다. 출ㆍ재가 구분 없이 수행자라면, 늘 품고 있는 ‘본래 면목’에 대한 것이었다.
“본래 면목을 어디서 봐야 합니까?”
“본래 면목을 잊어야 본래 면목을 볼 수 있어. 본래 면목을 집착 하지 않고, 잊어버리면 ‘평상시심도심(平常心是道心)’를 얻을 수 있어. 본래 면목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아난존자고 내가 가섭존자야. 대화하는 그대로가 본래 면목인 거지.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어. 본래 면목은 가도 옴이 없어.”
스님은 ‘진리비동실상이언(眞理非動實相離言:진리는 움직이지 않고, 실상은 말이 없는 말이다)’이었다. 말 자체는 말이지 진리가 아니기에, 말 없는 것이 진리라고 스님은 법문했다.
“돌이 진리요, 바위가 진리요, 산이 진리야.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꽃이 떨어지는 것도 진리야. 산하대지 모두, 진리 아닌 것이 없어. 법문 안 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 자네가 온 것도, 내가 말하는 것도 전부가 진리야.”
“재가불자들이 ‘평상심시도’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우치지 말고 살아야 해. 평상심시도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와 인욕’을 갖게 하는 힘이 돼. 가정에서는 가족을 화합하게 하는 힘이 되지.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살리려 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면, 언제라도 투쟁과 갈등이 생기지. 재가불자들은 나쁜 것도 받아들이고 좋은 것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해. 그러면서 생활화해야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
스님의 말씀이 끝나는 순간, 의심이 툭 올라왔다. ‘그럼 깊이 잠들었을 때, 평상심은 어디에 있을까. 또 잠 잘 때에는 화두든 염불이든 마음자리를 어떻게 챙겨야 할까?’
스님은 본래 면목에 대한 말씀으로 대답했다.
“잠 잘 때에도 본래 면목은 그 속에 숨어 있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잠자는 자체가 본래 면목이야. 본래 면목은 이 방안에도 가득 차 있어. 잠 잘 때에도, 죽을 때에도, 자네한테도 , 나한테도 있어. 본래 면목은 저 생과 이생에 죽고 사는데 있는 게 아니야. 없는 데가 없이, 이 우주에 꽉 차 있어.”
스님과 대화를 나눈 지 두 시간이 흘렀을까? 스님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참선과 경전 공부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참선만 하면 마음은 움직이나 말은 제대로 못하게 돼. 또 경전만 읽으면 입은 있으나 마음이 움직이질 않게 돼. ‘선불심(禪佛心) 교불언(敎佛言)’이란 말이 있어. ‘말 없는 마음 없고 마음 없는 말 없다’는 얘기지. 선은 교를, 교는 선을 아우를 줄 알아야. 이처럼 재가불자들도 일과 수행을 둘로 보면 안 돼. 함께 닦는다는 생각을 잊으면 안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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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스님은 박스에 감을 연신 담고 있었다. 올 가을 농사지은 감을 신도 30세대에 손수 싸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치 출가시킨 자식들 집에 선물을 보내는 아버지처럼, 주섬주섬 감을 싸고 있었다. 그리곤 스님은 곧장 보현사 텃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 배추, 고추 등을 손수 심어놓은 밭에서 호미질을 했다. 상좌 혜묵 스님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스님께서 이렇게 농사를 지은 지 벌써 60년째”라고 귀띔했다.
일우 스님은 농삿일을 통한 ‘노동선(勞動禪)’ 수행을 강조한다. 스님이 16살에 적천사로 출가한 이후로, 신도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온 까닭이 이 때문이라고 신도들은 입을 모았다.
스님은 지역불교 활성화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청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사람이 스님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지역불교계에서는 일우 스님을 ‘청도불교의 터줏대감’이라고 부른다. 청도에서 태어났고, 청도에서 지난 1950년부터 살고 있어, ‘일우 스님이 청도불교의 역사’라 해도 이론을 달지 않는다고 한다.
일우 스님은 1927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1943년 적천사에서 동명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1944년 동화사 강원을 수료했다. 이후 동화사 도솔암, 통도사 극락암 등에서 수행했으며, 보현사 주지, 태고종 중앙종의회 의원, 태고종 경북교구종무원 종무원장을 거쳐 1998년 태고종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태고종 원로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