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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 태백선원 선덕 고우 스님이 프랑스 파리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국간화선의 정수를 알리는 법문을 전했다.
파리 한국문화원은 11월 3~9일까지 ‘한국불교특별주간’으로 선정하고 고우스님의 특강과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동승’ 등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상영, 승무 바라춤 법고무 등 불교문화공연이 펼쳐졌다.
고우 스님의 법문은 4일 ‘세계문화의 집’ 6일 ‘파리 제7대학’ 등에서 2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한국간화선의 전통과 정신을 외국인들이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이번 법회에서 고우스님은 “나에 대한 집착과 착각으로 끝없는 욕망을 빠져있는 현대인들은 마음을 다스려 본래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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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우 스님의 법문을 요약 한 것.
만약, 선禪을 말한다면 하늘을 보려 하면서 땅을 보는 것과 같으며, 땅을 보려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진리란 형상이 있든 형상이 없든 모든 존재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보편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우주가 멸망한 이후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고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잡으려야 잡을 수 없고 떨쳐 버리려야 떨쳐 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듣고 보고 있으면서 막상 알려고 하면 알 수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다, 중생衆生이다’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해탈解脫이다, 집착執着이다’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열반涅槃이다, 생사生死다’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마음이다, 불성佛性이다’ 하는 것도 다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지금 이 말을 하는 산승山僧이나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함께 오물을 덮어쓴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선禪입니다.
그럼 불교에서 진리,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무엇이며, 그 가르침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형상形相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서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연기를 보는 사람은 진리眞理를 보고 진리를 보는 사람은 여래如來(부처)를 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 = 연기 = 진리 = 여래가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모두가 부처님이십니다.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인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이 공空이다”고 했습니다. 오온五蘊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합니다. 색은 우리 육신을 포함하여 이 우주에 있는 모든 형상 지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하다면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서 산승은 말하고 있고, 여러분은 산승의 말을 듣고 보고 있는데 ‘공空이다’, ‘무아無我다’, ‘실체가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연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작용하는 그대로 무아이고, 공입니다.
그럼,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연기는 불교의 핵심입니다. 부처님도 이 핵심인 중도 연기를 깨달은 분입니다. 팔만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것이 중도연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중생들 즉,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생명이 있거나 없는 것, 이 모든 존재는 단일 물질로 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물질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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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는 다만, 원자 덩어리이고 60조 세포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 여러 개의 원자와 세포 중에 어느 원자와 세포를 나라고 할 것입니까?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으니까, 공이다 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만, 태어나는 것도 공이고, 성장하는 것도 공이고, 늙은 것도 공이고, 병드는 것도 공이고, 죽는 것도 공이다, 하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시골에 가면 짚이 있습니다. 이 짚을 재료로 사용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듭니다. 만들어진 물건은 모양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쓰는 용도도 다릅니다.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그 물건에 대하여 우열과 가치의 차별을 두더라도 변함없이 근본은 평등한 짚입니다.
여기에 예를 든 짚과 물분자는 <반야심경>에서 말한 공과 무아를 말합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내가 있다’는 착각과 집착 때문에 형상과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나와 다른 사람의 형상을 구별하며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의 겉모습만 보고 비교하고 우열을 따지면서 끝없이 대립, 갈등, 투쟁하고 있습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맹인에 비유합니다. 이 맹인이 길을 걸을 때 무엇에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져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부딪히다 보면 상처가 곪아 터져 몹시 고통을 느끼면서 걸어가는 인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끝없이 집착하고 비교하며, 갈등하고 대립, 투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 가운데 이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종교 갈등은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에 대한 무지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끝없는 전쟁과 테러, 자연재해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재앙입니다.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 나의 본질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존재 원리를 바로 이해하는 가치를 이렇게 비교하셨습니다. 인도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수의 보석을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반복해서 열심히 주는 일보다 더 공덕이 크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는 연기 현상이고 무아이고, 중도입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니 허망하고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는 허무를 가르치는 종교’라 했고, 슈바이쳐 박사도 ‘비관하는 종교’라 했고, 요한 바오르 2세는 ‘불교의 열반을 모든 일체에 무관심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공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허망한 공, 공허한 공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공입니다. 진공묘유는 나다-너다 차별하는 구름이 없어지면 묘유라는 지혜의 해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햇빛이 나오는 것에 비교됩니다. 모든 것이 평등해서 마음이 무한히 평화로워지며, 또 비교하던 현상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햇빛 같은 지혜가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끄달리지 않아 무한히 자유로워집니다. 이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은 수행하여 새롭게 만들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들의 존재 원리이고 모습입니다. 존재 원리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행할 뿐 (달리) 위대하고 성스러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상심平常心이라고도 합니다.
이 평상심의 마음은 개개인의 신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뇌도 치료해주고 또 우리 사회에서 겪은 여러 가지 갈등 대립도 해결해주고, 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치광이들의 전쟁도 종식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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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시다.
모든 차별과 분열, 미움과 증오심을 없애고 함께 더불어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로 걸아 가야 합니다. 이 길만이 오직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 길에는 저 위대한 부처도 없고, 저 위대한 하나님도 없고, 저 위대한 알라신도 없고, 저 위대한 태극 무극도 없고, 저 위대한 브라만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평등해서 우열도 없고, 귀천도 없고, 고하도 없어 우리 모두와 조금도 차별이 없는 연기 현상일 뿐입니다.
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위대한 길이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고 본래 갖춰져 있습니다.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다’는 착각만 없애면 누구든지 그 자리로 돌아가 이렇게 사고하고 이렇게 행위하면서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고, 하는 일마다 좋은 일이 됩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남의 집 화장실 청소를 해주며(변소의 똥을 퍼주면서) 살아가는 최하층 신분 계급의 니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니체는 자기의 신분이 낮고 직업도 천하다는 생각에 항상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고 학대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걸식하러 나오시다 길에서 소년 니체와 마주쳤습니다. 니체는 부처님 같이 고귀한 분에게 자기 같은 천한 신분이 가까이 가면 부처님을 오염시키고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망을 쳤습니다. 부처님은 니체의 착한 마음과 착각에 의해 자기를 학대하면서 스스로 괴롭히는 니체의 마음을 아시고 니체를 뒤 따라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지름길로 따라 오시는 것을 본 니체는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니체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욕한 적도 없고, 때린 적도 없는데 왜 괴롭힌다고 생각하느냐?”
“저는 신분도 천하고 직업도 천합니다. 어찌 감히 부처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너의 마음이 참으로 착하구나! 사람은 태어날 때는 모두 평등하여 귀하고 천한 것이 본래 없다. 귀하다, 천하다는 신분을 갈라놓은 것은 힘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너희같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한 사람을 부려먹으려고 만든 제도일 뿐이다. 너는 거기에 속지 마라. 직업에 대한 차별도 없느니라. 국왕 대신이라도 나쁜 마음으로 백성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이고, 너희같이 화장실 청소하는(똥 퍼는) 일을 하더라도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너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너야말로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니체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여 지옥에서 극락에 오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열등의식으로 자기를 학대하며 살아온 착각으로부터 해탈한 것입니다. 그 후 니체는 부처님을 마주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반갑고 부모를 만난 것과 같아 하루도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니체는 부처님 제자로 출가하여 중도연기를 깨달아 아라한과를 증득한 도인道人이 됩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보는 시각과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지혜의 눈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는 “니체”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대략 불교가 무엇이고,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목적에 공감하여 불교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체험하는 수행을 하고 싶다면 그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고의 수행이 간화선看話禪입니다.
다른 불교 수행 방법에 비하여 간화선 수행은 빠르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1에서 100이라는 숫자가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으면 100에 도달하기 위해 1에서 100까지의 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간화선의 수행 방법은 1에서 100이라는 수가 한 개의 원으로 이어져 있는 것과 같아 1에서 돌아서면 바로 100으로 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뛰어넘어 곧 바로 부처님 지위에 들어가 버린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지 못하는 수행자를 위하여 과정을 밟아 수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이 수행도 그 과정이 어느 곳에 있든지 돌아서기만 하면 100에 이르는 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니, 운문 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다” 했습니다. 어째서 불법이 마른똥막대기입니까? 여기에서 육식六識도, 잠재의식도, 무의식세계에서도 분별의식이 끊겨 버립니다. 자연 말길도, 생각의 길도 끊겨버리겠지요. 그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는 이성의 사유분별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여기에서 한 번 바로 돌아서 보십시오! 수행 과정에 있는 수행자나 목적지에 도달한 수행자는 크게 세 가지의 의식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갈등, 대립, 투쟁하는 분열된 의식이 크게 하나로 통일된 시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를 애걸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그 불안한 마음을 갖고 오라 했습니다. 혜가 스님은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깊은 심층 의식까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통일된 자리입니다.
나는 이 자리를 세탁기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분열, 갈등, 대립, 투쟁하는 의식을 이 세탁기 속에 넣으면 깨끗이 세탁되어 하나로 통일되어 평등과 평화와 자유가 충만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체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옛날 조주 스님이 120살까지 오래 살았습니다. 그 제자들이 장수 비결을 물었습니다. 조주 스님 말씀이 “너희들은 시간에 지배받고 살았지만, 나는 시간을 지배하고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설사 다른 사람과 주의 주장이 상충하더라도 평화적으로 공정하게 공익公益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을 찾아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양함 속에서 대립 없이 평화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禪에서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관용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계신 곳에 견해를 달리하는 외도外道가 찾아와 부처님을 향해 공격을 하다가 마침내 부처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변함없이 온화한 얼굴로 대해 줍니다. 외도가 간 후 부처님 제자 아난이 너무나 분해서 참을 수가 없어 부처님께 외도를 비난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까는 그 사람을 연민했는데 지금은 너를 더 연민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연민은 평등의 연민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인데 ‘내가 있다’는 착각에 의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고 분노하는 어리석음을 연민하시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무아無我인 그 마음에는 화나 분노가 없습니다. 화를 내어 삭이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아예 화나 분노가 없는 것이 불교입니다.
끝없이 연민하면서 연기, 중도, 무아를 가르치면서도 한 티끌만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마음 없이 있는 길을 자연스럽게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그 길은 우리 모두에게도 완성되어 있고, 열려 있습니다. 지금도 귀와 눈을 통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만나 끝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네” 라는 말을 인용하여 저의 말을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