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공부는 철학의 다양한 지역을 통과한 긴 여정의 과정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성 싶다. 일부러 그런 힘든 우회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나의 철학적 순례는 먼저 실존주의에서부터 출발하여 실존주의가 발을 딛고 있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통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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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귀국 후에 본격적으로 박종홍 선생님이 좋아하신 한국유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나는 공맹유학을 먼저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맹유학의 맛을 보면서 한국유학이 백안시해 왔던 순자유학도 맹자유학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도 자각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는 한국유학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 한국유학과 유학사상에 대한 하나의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덕과 정치의 일치를 구가하는 도학정치사상으로서의 유학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 일변에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아 올랐다. 그러면서 유학 사상이 새로운 미래적 길을 개척하려면 맹자유학과 순자유학이 다 양가적으로 존중되는 중도의 길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양철학의 구조주의가 너무 무의식의 하부적 구조의 틀(문화적 구조/정신분석적 구조/역사적 사회적 구조)만을 보려는 주장이 강해서 피와 살이 느껴지는 생명의 실상을 등한히 본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형식적이고 정태적인 구조주의를 수정하는 후기 구조주의로서 해체주의에 몰입하게 되었다.
해체주의 철학의 공부는 나의 인생과 학문에 하나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려해 주었다. 해체주의는 그 동안 공부해 왔던 구성주의 철학(실존주의/현상학/유학사상)의 허상을 보게 하면서 서양 사상사의 변방에서 주류에 밀렸던 철학자들(에카르트/쿠자누스/스코투스/스피노자/마르셀)의 사상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해주었고,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해석학과 현상학의 지대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해체주의(데리다와 들뢰즈와 료따르)의 철학을 가능케 한 현대철학의 원본으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동시에 그 동안 큰 관심을 쏟지 못했던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이 나에게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성주의에서 해체주의로 철학적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구조주의의 덕이 크리라 본다. 구조주의가 두 철학사상의 중간 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서부터 무(無)의 철학적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무(無)의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길은 무아(無我)의 철학으로 그것이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무아의 진리는 이론적으로 해오(解悟)하는 수준으로서는 미흡하고, 온 몸으로 증오(證悟)하는 차원으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나는 처음부터 몸에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와 닿지 않고 단순히 관념의 유희처럼 여겨지는 철학을 부질없는 공상처럼 싫어했다. 나는 예나 이제나 구체철학과 구체적 진리를 찾아 헤맸다.
처음에는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점차로 그 진리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수행의 길로 나의 사유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수행을 통하여 불교의 무아적 진리를 증득하지 않고 다만 이론적으로만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여전히 자의식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불교만을 농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는 독자들이 내가 대단한 수행의 깊이에 이미 젖었다고 오해할까봐 두렵다. 솔직히 나는 수행의 역사가 짧으려니와 진한 수행의 시간을 보내지도 안 했기에 너무 유치하고 천박하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고 진솔한 고백이다. 다만 이 글은 나의 수행일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론적으로 그리고 자의식적으로 철학을 공부해 왔던 한 개인이 이제 불교를 접한 다음에 그 불교의 가르침을 몸으로 구체화하기 위하여, 즉 불교의 철학적 진리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하여 노력하려는 조그만 꿈을 그려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철학이 <정신의 진리>를 탐구하면서 그 진리를 자기화하여 스스로 <진리의 정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세상에 조금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불교철학을 1990년부터 이론적으로 접해 오다가 드디어 나는 혜거(慧炬)스님으로부터 2003년에 계를 받았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불자의 생활을 시작한 초보의 햇병아리다. 초보로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외람스럽다. 나는 불자로서 수행이라기 보다 오히려 매주 일요법회에 나가서 기도하면서 혜거스님으로부터 불경(능엄경)을 배우고, 아침이면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경하고(가끔 빠뜨릴 때가 있음), 밤이면 원각경 게송을 반복 독송하면서 동네를 산보한다. 물론 가끔 못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일요일 오후에는 또 산책하면서 저 게송을 반복 독송한다.
5만회를 목표로 시작한 <원각경> 독경이 1천회를 넘기자 게송들이 절로 외워지기 시작했다. 독송할 때마다 <원각경> 표지 안쪽에 한 획씩 그어 만든 ‘正’자가 740여개다. 과연 내가 죽기 전까지 5만 번을 채울 수 있을까?
그리고 최근에는 그 동안 사정으로 미뤄 두었던 참선공부를 선원에서 그리고 집에서 익히고 있다. 참선이라기 보다 초보로서 참선하기 위해 마음과 몸을 단련하는 차원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배우려는 강한 원의를 갖고 있다. 이상이 불자로서의 나의 생활의 개략적 소묘다.
내가 철학공부의 일환으로서 염불기도와 독송, 그리고 참선을 배우려고 하는 까닭은 자아의 생각으로 공부해 왔던 의식의 수준을 벗어나 무아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염불과 독송, 그리고 참선은 자아가 행하는 의식적 수준의 생각을 지워서 무아의 영역에서 자성으로서의 <그것>이 사유하는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다. 자아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사유하는 것을 터득하기 위해서다. 자아가 일인칭의 사유로서 아상중심(我相中心)의 판단을 표출하는 것이라면, 자성은 자의식처럼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세상의 시원적 사실을 비추어준다. 자아의 철학은 자아의 의식과 그 판단에 의거해서 이론을 정립하지만, 자성의 사유는 이론을 정립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그리고 청아하게 세상의 사실을 여법하게 반조할 뿐이겠다. 자성의 사유를 해체철학에서 <그것이 사유한다>로 읽는다. <나는 생각한다>에 대한 대칭적 의미를 띄우기 위해서다. 나는 젊었을 적에 늘 의식의 보편성에 의거해서 세상의 진리를 판단으로 구성하려고 생각했다. 세상의 진리를 내가 실존적으로 체험하든지 아니면, 현상학적으로 의식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실재를 나의 의식이 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나는 탐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진리의 존재가 명증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일반적 생활세계의 관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후기 현상학의 이론으로 중년에 익히면서 거기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세상이라는 생활세계에 이미 스며들어 와 있는 세상의 진리가 하나의 판단 이전적 형식으로 미리 흩뿌려져 있다는 생각이 점점 구조주의적 무의식의 진리와 같은 맥락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 이르러서 후기 현상학과 구주주의가 암시하는 생활세계의 관습과 같은 판단 이전적인 사고방식이 하나의 가정(假定)이고 유부식(有覆識)의 전제(前提)며 선입견이 아닌가 하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유부식이라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다 어떤 기존의 습기나 관념이나 기분으로 덮여 있음을 말하므로, 기존의 철학은 맑고 해맑은 눈으로 세상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의 철학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불교는 말한다.
철학은 세상을 가장 바르게 보게 하는 수준의 학문이다. 세상을 자아가 상정한 어떤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재래의 시각은 전정한 철학의 요구에 적합할 수 없다. 그래서 재래의 철학은 다 어떤 편견과 부분성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런 생각을 초래케 하는 장본인이 바로 자아의 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모든 편견과 부분적 인식의 진원지로서의 자아를 지우고 무아의 자성적 사유로서 미래의 철학적 사유가 채워져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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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의 동서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의 색안경을 무색안경인 것처럼 착각케 하였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오직 후기 현상학의 후설(Husserl)만이 색안경이 제거된 진리가 의식수준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정직성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 철학에로 내가 나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하고 세상을 여여한 모습으로 보게 하는 정견(正見)의 철학이 불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정견의 눈을 닦기 위하여 철학적으로도 불교의 수행이 꼭 필요하고, 더구나 미래의 정신교육은 특정 종교를 떠나서도 저 불교적 수행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저런 수행의 깊이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다. 편견과 부분의 심리에 내가 아직도 젖어 있기 때문이다.
◇김형효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기에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석·박사. 공군사관학교와 서강대 교수를 거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지난 8월 정년퇴임한 후 저술과 강연, 신행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서로 <데리다의 해체철학> <원효에서 다산까지>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 <사유하는 도덕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