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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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바로 보면 그 자리가 바로 지혜"
지상백고좌 - 조계종 수좌 연수 스님


수좌계에서 숨은 선지식으로 통하는 연수 스님.


* 추석연휴 관계로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가 한 주 쉬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에는, 일체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숨어있는 선지식’으로 유명한 연수 스님의 법문을 소개합니다.

연수 스님은 1946년 부안 生으로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농대를 다니다가 군에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수많은 불서를 접한 스님은 1971년, 백양사 서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합니다. 송광사에서 스님들과 3년 결사를 하기도 한 스님은 30년 넘게 오로지 선방과 토굴에서의 올곧게 정진을 이어왔습니다. 은사 서옹 스님의 인정과 스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형적인 수좌입니다.
봉화 태백산 무학대 라는 토굴에서 수행중이던 연수 스님은 지난 송광사 결사때 인연을 맺은 에쿠아도르 산 프란시스코 대학교 동양학을 가르치는 르노 뇌우바우어(Renaud Neubauer) 교수 초청으로 현재 에쿠아도르 현지인들에게 남북방 불교와 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음은 연수 스님이 6월 19일 횡성 죽림산사를 방문했을 때 불자들의 즉석 질문을 받고 하신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횡성 죽림산사에서 불자들의 즉석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연수 스님.


- 불법이 무엇입니까 물었을때 ‘똥막대기’, ‘끽다거’ 이런 대답이 나온 화두일화를 상기할때 이해가 안 갑니다. 이런 말들이 선사들 사이에서 다 통한다고 하는데 깨우쳐진 건지 같은류의 공감대가 있어서 깨친 것으로 봐 주는 건지 궁금합니다.

화두를 선택할 때 첫째조건이 그 스님들이 완벽하게 깨친 분이라는 믿음이 전제조건입니다. 제자가 불법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똥막대기다”라고 했습니다. 똥이라는 개념으로만 본다면 얼마나 더러운 말입니까. 그런데 운문 스님은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그 스님이 무슨 뜻으로 똥막대기라 했을까, 왜 똥막대기라 했을까 그렇게 의심해 들어가야 합니다. 화두를 든다고 했을 때 똥막대기에 낙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똥막대기라 한 운문 스님의 뜻이 무엇인가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화두가 다 그렇습니다. 의심이 붙어야 해요. 수행을 해 경지가 깊어지고 지혜가 나와 큰스님을 찾아갔다- 그 스님도 깨친 분이어야 해요- 고 할때 이것은 적당한 교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타파한다는 것은, 즉 인정이 되고 교감이 된다는 것은 교감 차원의 문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운문 스님이 계시면 좋지만 운문 스님이 안 계시니까 대타로 어떤 스님이 계시다고 할 때 그 스님이 운문 스님 정도의 경지가 돼 있느냐 아니냐가 또 문제가 되겠지요.

연수 스님.


- 1천여전에 만들어진 화두가 21세기 현대인들에게도 의심이 날 수가 있습니까? 현대인들에게 맞는 화두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 제시가 있습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동쪽 산이 물위를 지나간다?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이 안 돼요. 어떤 큰스님이 그 말을 했을 때 그 스님이 철저히 깨친 분이라고 믿을 때 그 화두가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동산수상행이라는 화두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화두쪽으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수행의 가닥을 화두쪽으로 잡아서 내가 수행을 하겠다고 하면 이해할 부분이 얼마든지 많이 있어요.

이 말을 통해서 큰스님이 하고자 한 큰스님의 뜻이 뭐냐? ‘왜’자가 붙어야 해요. ‘무’라든가 ‘동산수상행’이라든가 이런 말을 왜 했는가가 화두의 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활의 문제, 자기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화두로 잡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화두의 본령은 부처님의 깨친 경지를 가지고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회통할 부분이 있어요.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극히 일반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풀리지 않으면 다른 것은 의미가 없다 할때 그 문제를 열심히 파고들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실연을 했다고 할 때, 왜 내가 실연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왜 나를 미워하고 떠났을까? 이게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문제예요. 그럴때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거예요. 그야말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내 감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떠난 사람과의 관계의 있는 그대로 모습 등을 정말 면밀하게 살필 것 같으면 인과된 부분이 있을 거예요. 인과 문제를 철저히 비추면 무상 무아의 삼법인에 돌입이 됩니다.



-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는 유명한 말인데 그 참뜻을 알고 싶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죠. 너무나 뻔한 상식을 가지고 진리라 한단 말이에요. 깨친 경지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도인들이 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밥먹고 싶으면 밥먹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경지와 범부들이 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밥먹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다 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다 말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것은 다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정자각자(正自覺者)’라 부릅니다. ‘바르게 스스로 깨친 자’라는 뜻이지요. 부처님께서 깨친 근본 뜻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살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 공부했던 것들은 인위적으로 가정해서 개념적으로 설정해서 그 이치를 깨쳐가는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들이 이념적으로 인위적으로 사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파했어요. 궁극적이 아니다는 것을 아신 거지요. 스스로 바르게 깨쳤는데 무엇을 깨쳤는가 하면, 과장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깨친 것입니다.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라는 뜻입니다.

연수 스님.


- 내세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불교에서의 내세관은 어떤 것입니까?

불교에서는 인과이야기를 합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자업자득이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 는 것이 기본사상입니다. 내가 한 것을 남이 대신 받을 수 없고 남이 한 것을 내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요. 인과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보통 인과를 말하지만 상식으로 아는 것이지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어요. 인과를 제대로 알면 삶이 바뀌게 됩니다.

사후문제는 뭔가를 확고하게 결론내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어려운 이야기예요. 부처님께서도 부처님말씀도 지혜로 살피라고 했습니다. 남의 지혜가 아니라 자기의 지혜로 잘 살펴서 이해가 되면 믿으라고 했어요. 불교의 기본 전제들을 보면서 자기가 의심되는 부분을 잘 연결시켜 깊은 심사를 해서, 그런 가운데 확신이 서면 믿으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은 현실을 중요시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현실에 있는 것이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내가 현재 살아있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살펴보니까 모두가 괴롭더라 이 말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대로,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는 대로 다 나름대로 고를 가지고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그 괴로움을 현재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해결했습니다. 전생을 알려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내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집중하세요.

- 자성을 깨우쳐서 부처님 경지까지 가야 하는 방법으로 팔정도수행을 강조하는데 어떻게 수행 해야 합니까?

팔정도를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내 마음을 여덟가지로 살펴서 정진해야 스스로 바르게 깨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말을 바르게 하고 행위를 바르게 하고 생활태도를 바르게 하고, 내 몸과 마음과 말을 바르게 하다보면 부처님경지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칠불통계게의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라. 그런 가운데 자기 마음을 잘 맑혀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와 팔정도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라’, 이것은 윤리적 차원에서 양심있고 도덕적인 사람은 다 할 수 있어요. 불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자정기의(自淨其意)- 그 마음을 맑혀라, 수행하라’이지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는 가운데 철저히 깊이깊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맑혀라. 맑히는데 어느 정도까지 하는가 하면 철저히 해서 ‘산은 산 물은 물’처럼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데 쉽지 않거든요. 그 쉽지 않은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이 수행입니다.

팔정도의 첫번째가 정견(正見), 바른 견해입니다. 정견이 제일 먼저 있는 이유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자세라든가 부처님의 핵심사상이라든가 수행자세라든가 모든 것이 정견을 통해 정립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일곱가지 행(行)은 자연스럽게 더불어 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재가자들은 가진게 많습니다. 부모 자식 남편 등 가진 속에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속에서 일어난 문제를 화두로 삼아 가는 것이 빠른 것이 아닌가 하는데 생활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요즘 재가불자들도 화두선을 많이 합니다. 시간을 정해서 하는게 보통이지요. 시간을 정해 절에 가 할 때도 있고 자기집에서 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끊어지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드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근본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어려워요.

나도 선방을 10여년 다니고 토굴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선방생활이라는 것이 주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하루 12시간 14시간씩 앉으니 앉는 것 위주가 되지요. 기간을 정해 수행하니까 해제해서 밖으로 나오면 싹 잊어버리게 됩니다. 주로 앉아서 수행하다 보니까 좌선으로만 수행하려는 심리가 은연중 있어요. 내게도 뼈저리게 있었어요. 무의식속에 박혀있었어요. 그만큼 집착한다 이겁니다. 좌법에 집착해 버리면 좌법에서는 공부가 되는데 좌법을 풀고 다른 행위에서는 공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어렵긴 하지만 행주좌와(行住坐臥) 관계없이 막 들어가는 방법을 할 수만 있으면 그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요. 왜냐? 좌법을 익혀놓으면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에서 습이 되어 버리거든요. 생활에서도 해야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막연한 수행관이 자기한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고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법을 모아놓은 <대념처경>을 보면 행주좌와가 다 공부꺼리로 되어 있습니다. 일체사 일체처 일체심, 일체 어느 곳에 어느 때 있든지 모두 수행꺼리라 했습니다.

내가 번뇌가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안다, 또 번뇌가 계속되면 계속된 줄 안다, 번뇌가 멈췄으면 멈췄음을 안다, 번뇌가 멈춰서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줄을 안다, 순서가 번뇌가 생겼고 있다가 없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서 선정경지에 들었다. 번뇌가 있는 것이 점점 없어져서 없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 못 본 것입니다. 왜 잘 못 본 것이냐 하면 번뇌가 없어서 고요하면 고요한 상태에서 고요한 줄 안다는 것이 들어가 있고 번뇌가 일어날 때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안다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그것이 위빠사나의 관(觀)이거든요.

번뇌가 있고 없고는 상황적이라. 끝까지 남는 것은, 있고 없는 상황을 여실히 관찰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깨쳤다고 하면 거기서 깨치는 것이지 번뇌가 없어서 고요한 것을 깨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요하고 싶고 뭔가 경지를 얻고 싶고 그것을 희구하거든요. 그게 목적이 아니에요. 오히려 과정 과정에서 살펴가는 수행자의 마음마음씀에 찰나찰나 알아차리는데,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 알아차리되 알아차리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미세하게 관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건듯건듯 봅니다. 머트렇게 본다는 말이지요. 건듯건듯 보지말고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있는 그대로 봐야겠다 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각자가 마음을 더욱더 미세하게 관찰하게 하는 그게 정진(精進)입니다. 정밀할 정(精)자에 나아갈 진(進)자. 정진이라는 것이 오래 앉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앉더라도 자기의 마음을 정밀하게 미세하게 살피려고 하는 각오, 원력, 의지를 말하며 이것이 정사유(正思惟)입니다.

그런 사유를 통해서 마음을 정하고 나아가는 마음을 먹고 결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고요한 데서 화두 드는 것을 연습할 게 아니라 잘 안 되더라도 일상생활속에서 화두를 잡도리하는 것을 연습했으면 합니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에서 불생이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미세미세하게 들어가서 내마음이 탐진치가 생하는 모습을 정확히 100% 미세하게 살펴서 찰나생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깨쳤을때 그것을 불생이라고 하고 무생이라고 합니다. 불생이라고 해서 태어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을 너무나 정확하게 봐버리니까 그 자리는 생(生)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서 생각들이 움직이지만 최극미세하게 살펴서 부처님같은 경지가 되어 그 자리에서 살펴보니까 그 자리에서는 마음이 생하는 모습이 생한다 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연기돼 있더라 이거지요. 연기도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다 인연법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연기도리를 깨친 것이지요.

연기도리를 깨치다 보니까 그 자리가 무생이고 무아인 것을 알겠고 무상의 모습을 제대로 알겠어요. 우리는 무상무아를 교리로만 알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거든요.

유식불교에서 ‘전식성지(轉識成智)’라는 말을 써요. 식(識)을 돌려서- 식이라면 육식 칠식 팔식- 즉, 알음알이를 돌려서 바로 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번뇌 즉 보리’ 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뇌를 벗어나서 지혜를 얻는 게 아니라 번뇌 그 자리를 바로 보면 그 자리가 바로 지혜입니다. 용맹심을 가지고 탐심을 관찰하면 그 탐심 무더기가 그냥 미세하게 쪼개집니다. 물리학세계에서 전자현미경으로 분자를 쪼개 완전히 미세하게 살펴보니까 허공이 되어버려요. 그러니 허공이 티끌속에 들어갔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은 줄 알았는데 물리세계에서 작은 것을 확 펼쳐보이니까 무한한 허공이 있어요.

그것이 마음수행으로도 연결됩니다. 내가 관찰하는 힘이 미약해서 문제인데 내가 알아차리는 힘 즉 그게 지혜 즉 반야예요. 우리에게는 원래 반야지혜가 있어요. 살필 수 있는 마음, 그냥 해가는 마음뿐만 아니라 해가는 상황을 다시 비쳐볼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을 무변광대(無邊廣大)라 했는데 이 마음가운데는 무변한 영능(靈能)이 있어요. 마음을 한 순간 쓰는데 한 생각 일으키는 순간에 팔식도 칠식도 육식도 다 있습니다. 같이 가는 거예요. 육식 따로 있고 칠식 따로 있고 팔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거예요.

탐심을 내 탐심이 일어나 탐심을 살폈다 할 때, 그 탐심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수행관에 의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바르게 깨치고자 하는 원력이 있고 선근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살펴가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날 때, 아 잘못되었다 반성할 수도 있고 그 마음자체를 수행그릇 삼아서 다음 찰나에 그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 세계적인 심리학자 칼 융 박사가 바르도 상태에서 죄업이 많으면 업식 때문에 밝은 빛을 못 따라 가기에 평소에 밝고 맑게 살아야 바르도 상태에서도 좋은 빛을 따라갈 힘이 생긴다고 했는데 과연 이런 것이 있습니까?

전강 스님 법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명한 율사스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장면에 입회한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누더기 입은 수좌가 한 사람이 있었대요. 그 수좌가 수행을 많이 한 도인이라. 율사 스님이 껄덕껄덕 숨이 막 넘어가려는데 누더기 입은 수좌가 벽력같이 큰소리를 쳐요. “스님, 정신 차리십시오!” 자기로 봐서는 좋은 경계로 가는 판인데 그만 깨어나게 되어 그 수좌한테 호통을 쳐요. “자네가 내 좋은 가는 길을 왜 방해하는가?” “스님, 어느 경계를 보셨습니까?” “아, 불보살이 나와 영접하려는데 네가 방해를 해서 못 갔다.” 이 수좌가 “지금 스님은 돌아가시면 저 아래에 있는 까치집에 태어납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 들어보니 다 맞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율사스님이 참회를 하고 내가 헛공부를 했다고 참회를 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잘 해야 된다 라는 말은 맞아요. 평소 얼마큼 잘 하느냐에 따라 경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원찮은 사람이 시원찮은대로 좋아보이지만 실제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 전강 스님은, 그런 경계에 속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화두타파해야 되지 적당히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겁니다.

정말로 극미세 관찰해서 부처님 깨달은 경지인 무상의 도리를 깨쳐서 그야말로 완벽히 해야 마치는 것이지 그전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좋다는 경계도 실은 업(業)으로 오는 겁니다. 선가어록에도 ‘부처가 감응하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 무상(無常)으로 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경계가 나오더라도 삼법인(三法印)으로 해석하라’. 좋은 경계는 선이고 나쁜 경계는 악인데 결국은 선악입니다. 선과 악을 뛰어넘어 해탈 하자는게 불법 아닙니까.
정리ㆍ사진 = 이경숙 부국장 |
2005-09-24 오후 12:48:00
 
한마디
소견이 바르지 못하면 ㅂ바른 믿음이 자리 잡지 못해요. 바른 믿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년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것이 미지그하고 대는둥 는둥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신을 근본으로 하느것이니 이것이 안되면 사량심만 왔다 할 뿐 그 사량심이 안 끊져요. 그래서 신근을 길러야 됩니다.
(2005-09-27 오전 7:10:32)
55
8정도는 대개 저렇게들 이해 하고 계시나 바른 공부가 되어서 깨달음이오면 8정도가 나와야 바른 것다라는 불의 기준 표시 인것입니다.중생은 8정도를 닦아도 8정도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8정도는 스승의 기준입니다. 살아있는석가 이지요. 바른 신으로 공부를 하면 반드시 8정도를 벗어나면 바른 깨달음이 못 됩니다. 8정도를 닦는다는 말은 앞과뒤가 뒤 바뀌어 쓰고 있으니 소견 정리부터 해야 된다고 봄니다.
(2005-09-27 오전 6:57:45)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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