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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바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 그대로 따르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를 했을 뿐이지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늘 기도하는 생활인데 어찌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을 수 있겠어요.”
41년 25일간의 기도를 회향하고도 노부부는 끝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해 왔던 대로, 육신의 짐을 털어내는 날까지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기도처는 다름 아닌 반평생을 살아온 그들의 집이었다. 노부부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뜨락에 우뚝 서있고 한강이 지척인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높은 터에 40여년전 집을 짓고 기도를 시작했었다.
기도에 입제한 뒤 서재에 불단을, 뜨락에는 부모은중탑과 쌍사자석등을 모셨다.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일본헌병에 붙잡혀 고문으로 4개월 새 차례로 유명을 달리한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형님, 장조카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명분은 여읜지 이미 오래다. 바라는 바 없이 조석으로 기도를 올리고 경전을 독송할 뿐.
노부부가 예불로 올리는 조석기도는 여느 예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불문도 없고, 반야심경도 없다. 부모은중탑 앞에서 초를 켜고 향을 올린 뒤 <법화경> ‘다라니편 제26’과 ‘관세음보살권발품 제28’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다시 불단으로 자리를 옮겨 30여분을 경전 독송으로 마무리한다.
박관섭 옹의 불교와의 인연은 경성고보 재학시절 탐독했던 춘원 이광수의 글에서 비롯됐다. 불교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춘원의 문집을 접하고 부처님을 집안에 모시게 된 것. 이후 춘원의 육촌 동생인 운허 스님을 찾아 봉선사를 들락거렸다. 불단과 탑, 석등을 점안해 준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과의 인연도 그 과정에서 맺어졌다. 따로 불교를 배운 적이 없다. 평생의 도반인 경전을 늘 곁에 두고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춘원의 글 속에서 불교의 심오한 오의가 느낌으로 전해졌어요. 그래서 경전을 접하게 됐고, 경전을 평생의 벗으로 삼게 됐습니다. 일생을 통틀어 춘원의 글에서 최고의 행복을 만난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