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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음식에 대한 계율을 가벼이 여겨 음식을 전혀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고기와 오신채 그리고 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고기를 드셨다’ ‘그런 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은 어느 경전에도 없다’ 등등의 말로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재 음식에 대한 계율을 지키지 않는 현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모든 계율이 다 중요하겠지만, 오늘 법회에서는 음식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육체와 마음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계율과 수행의 상관관계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는 곧 승가의 청정함을 천명하는 것이며 우리 수행자들이 다 함께 계율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깨달은 이들과 선지식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가가 사회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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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계율이 제정된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계(戒)는 금계(禁戒)로서 마음을 제어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잘못을 막고 악을 그치기 위해 개인이 지켜야할 수행적 덕목이지만, 승가의 차원에서 볼 때 계는 곧 율(律)이 됩니다. 율이란 법률로서, 승가를 수호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계에 어긋난다면 경중(輕重)에 따라 처벌로써 다스리고, 순응하면 편안하게 하여 승가를 수호,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한 열 가지 뜻을 <사분율>에서 살펴보면 ‘승가에로 거두어지게 한다(攝取於僧)’는 것은 출가의 조건이 계율이며, 계율을 받아 지녀야만 승려로서 인정됨을 의미합니다. 이어 ‘승가를 기쁘게 하고(令僧歡喜)’ ‘승가를 안락하게 한다(令僧安樂)’는 것은 승가의 화합을 뜻하는 것으로, 화합은 또한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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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믿지 않는 이를 믿게 하고(令未信者信)’ ‘이미 믿음이 있는 이의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하고(已信者令增長)’ ‘길들이기 어려운 이를 잘 길들이게 하고(難調者令調順)’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고(慙愧者得安樂)’ ‘현재의 유루를 끊게 하고(斷現在有漏)’ ‘미래를 유루를 끊게 한다(斷未來有漏)’는 것은 수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행의 첫걸음은 발심과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믿음에 의해 발심이 지속되는 것이며 이 믿음은 선악의 인과의 이치를 잘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율에 의해 악업을 막고 선을 증장하게 하고,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보리심(發菩提心)하면 계율로써 믿음이 일어나고 증장되어 수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법이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려는 것이다(正法得久住)’는 바른 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것이 곧 계율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계율을 부정한다면 승속(僧俗)의 경계선이 사라져 세속화를 가져오고, 화합을 깨뜨려 종단을 불안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수행자가 수행을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는 곧 자신의 실존적 본질을 깨닫는 것과 중생구제의 자비가 사라지는 비극을 불러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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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 ‘현실적으로 지킬 수도 없고 지켜지지 않는 보살계, 비구계를 주고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현실적으로 계율을 지킬 수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율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현실’에 두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한 근거가 현실이 아니라 ‘법(法)’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실은 변화하는 생멸(生滅)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율은 불생멸의 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계율을 현실에 맞추는 것은 그 계율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계율을 현시대 상황에 비추어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계율은 법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통용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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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계율과 깨달음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戒) 없이 정(定)과 혜(慧)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 있으나, 계정혜 삼학(三學)은 분리되지 않는 한 몸입니다. 마치 그릇이라는 계가 금이 가거나 깨져 있다면 정이라는 물이 새거나 고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라는 그릇이 새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정이라는 물도 움직이지 않아 고요한 상태가 되어 물이 맑아지고 수면에 상(相)이 비추거나 밑바닥을 볼 수 있게 되는 혜라는 깨달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행을 이야기하더라도 이 계정혜 삼학의 근본적인 수행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계는 수행자를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본 맥(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율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계정혜 삼학보다 더 근본적인 방편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요? 하물며 수행자로서 세속에서 하는 술, 고기, 오신채 등을 먹으면서 수행한다면 차라리 세속에 나가서 세속의 이치에 맞게 살며 공부하면 될 것입니다. 또한 보살계와 비구계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수행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현시점에 수행과 정각(正覺)을 포기하자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계율을 포기하고 어떻게 수행을 하고 수행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왜냐하면 계율을 잘 지켜나가면 선정(禪定)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불유교경(弗遺敎經)>에서는 “계를 의지하면 모든 선정을 얻어 고를 없애고 지혜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마땅히 깨끗한 계를 가져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계는 번뇌, 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없애버립니다. 아무리 수행을 잘 한다고 하더라고 계율을 파한다면 선정을 이룰 수 없고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불신과 비방으로 죄가 많은 사람은 진여삼매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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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선정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깨달음이 선정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종밀 선사는 <선원제전집도서(禪原諸詮集都序)>에서 ‘선정이란 행(行)은 가장 신묘(神妙)하여 성품 위에 무루지혜(無漏智慧)와 일체의 신묘한 작용 및 온갖 행과 공덕(功德)을 드러낼 수 있으며, 나아가 신통광명 모두가 이 선정에서 생겨난 것이다’라고 해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정이 주객(主客)이 사라진 상태라면, 지혜는 주객이 본래 없음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을 시작할 때는 외부에 사람, 사물이 존재함을 보고 느끼는 등 주객이 분명하지만 선정과 지혜가 생기기 시작하면 자신의 몸과 외부의 존재란 마음의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선정의 중요성은 바로 주객이 하나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주객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선정은 본래 나누어진 적이 없는 진리로 들어가는 최후의 문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수행 중에 나타나는 마장(魔障)과 계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장이 일어나는 것 또한 계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장이 생기는 것이 한마음을 깨치지 못하게 하는 마(摩)의 현상이며, 실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자각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마의 현상들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장은 지관(止觀) 수행만이 아니라 화두참구할 때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마장이 생기는 것일까요? 수행 중에 ‘앉아 공부하는 중에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 것은 살생을 했거나 고기를 먹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며 ‘혹은 미남 미녀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 것은 과거 애욕의 습이나 음욕을 일으킬 수 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장이 생기는 이유가 모두 계율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근(善根)과 계율은 온갖 마의 현상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그러기에 원효 스님은 ‘출가한 사람이라면 계율을 외우고 재가자라면 <보살계본>을 외워야 한다. 삼귀의와 5계 등을 외우면 귀신들이 바로 물러나거나 슬슬 기어 도망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근의 힘이 굳세거나 계율을 잘 지키는 수행자라면 마장이 일어날 때, 모든 것은 오직 마음뿐임을 자각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해도 이를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깨달음은 선정을 통해 일어나고, 선정은 계율에서 나온다면 계율의 역할을 분명합니다. 선정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계율로 묶어둠으로써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율은 모든 수행덕목의 밑받침이 됩니다. 수행자의 과거 악습과 악업의 영향은 순간적으로 퇴굴심을 내고 게으른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경계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는 것이 계율입니다. 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음식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몸은 마음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알아봅시다.
우리의 몸을 관찰하면 5대의 현상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5대가 육체를 이루고 있지만 또한 무지, 분노, 자만, 탐욕, 질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됨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육체의 기운에 의해 마음이 형성됨을 의미하며 또한 마음이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오염되는 첫 출발은 법계(法界)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명(無明) 때문입니다. 곧 마음의 인식내용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이들이 본래 한마음인줄 자각하지 못하고 주객의 분별만을 인식내용으로 하는 무명이 진여(眞如), 곧 한마음에 영향을 주어 진여를 움직이며 주객으로 나누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으면 곧 깨달음’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마음은 의식입니다. 의식은 육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의 주체가 의식이며 의식이 육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화두참구 중에 몸이 피곤하면 졸음이 오며 몸이 기운이 왕성하면 오히려 마음이 들뜨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밖의 경계에 끄달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끄달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계율이 필요합니다. 특히 음식에 관한 계율이 더욱 중요합니다. 고기, 오신채 등이 몸의 기운을 성하게 하여 음욕심을 일으키니 수행에 많은 장애가 됩니다.
<능엄경>에서는 ‘오신채를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발생시키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오신채가 음란한 마음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오신채가 성욕의 불의 요소를 생성, 활성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진다는 것은 오신채가 성냄의 물의 요소를 활성화시킴을 말합니다. 이는 오신채의 영향이 불과 물의 요소를 만들고 불과 물의 기운은 음욕과 성냄을 형성시키는데, 이 마음이 삼마지를 닦더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과 시방의 선신들이 와서 지키고 보호하지 않는다고 하여 선정을 얻기 힘듦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의식에 음식이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서는 고기나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똑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할 마음을 끊지 않은 것입니다. 즉 고기를 먹는 습과 때문에 살생을 해서라도 고기를 취할 마음을 일으키고 실제로 살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기는 분노의 물 요소를 생성시키고 분노의 힘을 형성하며,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가 끊어지고 무지를 일으키며 어리석게 되고 우둔하게 되는 마음이 형성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능가경>에서는 ‘고기 맛을 버리는 자는 정법의 말을 듣고, 보살지위에서 여실히 수행하여 속히 아뇩다라샴막샴보리를 얻을 것이다. … 또한 고기 먹는 사람은 큰 자비의 종자를 끊나니, 어찌 마땅히 이와 같은 큰 이익을 얻으리오’라고 해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비심을 근본으로 해야 함을 설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은 곧 중생과의 상호소통으로 무아(無我), 공(空)이 그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것은 중생구제의 원에 역행하는 것으로 발보리심하여 깨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발보리심 자체는 중생구제가 원(願)이기 때문입니다. 발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과의 상호소통 즉,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한 원이 없으니 수행 또한 되지 않아 깨달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일어나는 생각(念)’을 꿰뚫어 보고 그 실체가 공함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계율이 강조하는 것은 악업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게 되면 계율이 강조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깨닫게 되면 계정혜 삼학이 저절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깨친 이의 삶은 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수행에 의해 계율이 저절로 지켜진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깨닫는데 있어서 계율을 파해도 된다면 어떻게 계율이 저절로 지켜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모순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악업을 일으키는 행위는 정화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계를 파하는 행위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를 파하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계율과 수행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음식을 섭취한 몸 기운에 의해 마음이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마음이 만약 깨달음에 장애를 준다면 그 음식은 마땅히 삼가야 함도 알게 됐습니다.
음식에 관한 계율이라도 잘 지킬 수 있다면 선정을 이루고 그 선정에 의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현재 만연되다시피 한 계율에 어긋나는 승가의 식생활을 전통 승가의 식생활로 환원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계율을 지키지 않아도 깨치기만 하면 된다는 일부의 공공연한 그릇된 풍토도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승가의 청정은 승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회와 인류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승가 본연의 순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승가로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오신채와 술, 고기를 먹지 않는 풍토가 정착될 대 보다 많은 선지식이 생길 것입니다.
<지운 스님의 제안>
승가에 고기ㆍ술 권하지 말고 포살 통해 참회해야
이 자리에서 승가가 계율을 파하는 데는 재가신도들의 문제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재가자들이 승가의 계율을 잘 모르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승가가 없는 곳에 불교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승가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바로 계율로 유지됩니다. 그런데도 승가를 외호해야 할 재가자들 중 일부는 스님과 같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없습니다.
재가신자의 계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승가의 청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재가자들은 절에서 오신채를 먹자고 주장하거나 스님들이 만행할 때 몸보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고기나 술을 공양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술과 고기 사달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버려야 합니다. 절에서 오신채를 먹는다고 하면 신도들이 앞장서 항의해야 합니다.
오늘 법회에서 먹는 것 하나도 깨달음과 크게 관련되어 있음을 아셨으니, 선지식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면 재가자들이 계율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승가의 외호집단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스님들도 깨달음 얻을 수 있고 재가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가자들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포살을 해야 합니다. 포살을 함으로써 자신이 알게 모르게 계를 파한 것이나 죄를 지은 것을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운 스님은?>
1979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82년 법주사 강원, 86년 중앙승가대를 졸업했다. 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와 교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93년부터 2002년까지 송광사 강원 강주를 지냈다. 92년 운성 강백스님으로부터 강맥(講脈)을, 2004년 성우 율사스님으로부터 계맥(戒脈)을 이었다. 현재 조계종 단일 계단 교수사, 동화사 강주다.
저서에 <깨달음으로 가는 길> <찻잔 속에 달이 뜨네> <뿌리 없는 나무에 핀 꽃>(논문집) 역사에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글> 등이 있다.
<논찬>
■ 일진 스님(운문사 승가대학 학감)
법주 스님은 계의 그릇이 견고해야 선정의 물이 맑아지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만 지혜의 달이 투명하게 비출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 급변하는 21세기의 출가 수행자로서는 저자거리에서도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계율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며, 계에 대한 올바른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 자리에서 관리하고 억제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절제이며, 생활 속의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1: 스님께서는 계율의 제정 근거가 현실이 아니라 법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인과법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계율이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운 스님: 계율이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변화하는 생멸(生滅)의 속성을 지닌 현실에 맞춰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계율이란 진리, 즉 법을 바탕으로 해 제정된 것입니다. 계율을 현실에 맞추는 것은 그 계율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으로 계율을 현시대 상황에 맞춰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이 법에 근거했다는 것은 주고받고 싸우는 현실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 법을 근거한 것이므로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문 2: 계율을 지키는 수행승을 오히려 승단 화합을 저해하는 인물로 몰아세우는 경향 등 계율에 얽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포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 운문사에서도 한 철에 한 번 정도 밖에 포살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등 현재 행해지고 있는 포살형식은 좀 막연합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운 스님: 남방에서는 포살이 30여분 정도 소요됩니다. 합장하고 게송을 외우고 나면 큰스님이 하루 있었던 일을 지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이러한 포살은 작법참회(作法懺悔)로, 자신의 죄목을 들어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면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어느 스님에게나 자신의 잘못을 고하는 가벼운 참회법도 있고, 20여 명의 승가 앞에서 참회를 하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이나 티베트 불교나, 한국불교에서의 포살은 대동소이합니다. 재가자들 역시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한다’고 할 정도로 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계를 받았다 하더라고 내년에 또 받고, 계를 받은 후에는 포살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질문 3: 스님께서는 음식에 관한 계율을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국 불교 안에서의 공양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들은 어쩔 수 없이 절 밖에서도 공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양문제를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운 스님: 남방은 소승불교이고 북방은 대승불교라는 차이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남방불교에서도 자기가 먹고 싶다고 고기를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도가 올린 것이라고 해서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방의 승려는 고기를 먹지만, 자기가 업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공양으로서 받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나라도 공양을 합니다. 하지만 소승불교의 전통에 따라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승불교는 아라한의 경지를 지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바로 부처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아뢰아식의 경지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기로 원을 세운 북방불교의 전통에서 중생의 하나인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생활하다 보면 모르는 사이 고기를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포살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안 먹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 박병기(한국교원대 윤리학과 교수)
질문 1: 스님께서는 승가의 계율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계와 율을 구분지어 살폈습니다. 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켜야 할 수행적 덕목이지만, 율은 승가의 차원에서 지켜야 하는 법률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계와 율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계는 자율적 덕으로, 율은 타율적 덕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수행의 과정을 한편으로는 타율적인 덕목인 율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고 다른 측면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자율적 덕성으로 승화시켜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도 구분할 수 있는지요?
지운 스님: 계와 율을 자율적 덕성과 타율적 덕성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타당한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윤리는 무엇은 근거로 할까요? 바로 악인악과(惡因惡果) 선인선과(善人善果)입니다. 철저하게 인과를 바탕으로 계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숙지하고 있다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불교에서의 윤리를 상당히 엄격한 반면에 포살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융통성이 있기도 합니다.
질문 2: 엄격한 계율 준수를 강조하신 스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계율의 현대적 재해석 및 새로운 제정의 가능성에 관해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원효 스님께서도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계율 준수의 핵심은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적 상황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계율에 대해서는 현대적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를 들어 비구계와 비구니계의 차이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계율도 있지 않습니까? 계율의 조문 그 자체에 매달리기보다 제정 당시의 상황과 정신을 고려해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운 스님: 대승불교는 동기를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계율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빈다. 예를 들면 모기를 잡는 사람에도 여러 동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정없이 모기를 잡는 사람도 있고, 모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말려서 안 잡은 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냈기 때문에 그 결과도 자신이 받게 됩니다. 만약 군대에 가서 전쟁에 나아가게 됐는데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이럴 때는 살인일까요, 아닐까요? 만약 그 사람이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살의가 있었다면 그 업보를 받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면 그 결과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동기에 맞는 결과는 반드시 오게 됩니다. 대승불교의 계율은 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비구/비구니계의 차이점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으로 아는데, 이를 간단히 얘기하자면 비구니계가 많은 이유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계는 깨달을 수 있는 사다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남녀의 차별을 논할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방법을 논의해야지, 남자 여자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됩니다. 남녀는 업에 따라 결정 된 것이고, 그 업을 소멸할 수 있도록 제정된 것이 바로 계율이라는 것입니다. 계율을 세속적인 입장이 아닌 수행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