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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갓 입문한 초심자라면, 누구나 갖는 질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쉬운 문제일 것 같지만, 사실 어려운 물음이다. 특히 자력을 강조하는 선수행과 타력을 중시하는 염불수행에서 이 문제는 때론 상호 비판의 다른 축에 서있게 된다.
이 같은 문제가 최근 수행단체는 물론 학회에서 비중 있게 논의되고 있다. 자력적 측면을 강조한 염불선 수행이 불교계에서 각광받고 있고, 한국정토학회(회장 법산 스님)가 9월 2일 ‘불교신앙의 자력과 타력의 문제’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여는 등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럼 초심자의 입장에서 불교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선과 염불 수행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선(禪), 과연 자력인가?
‘본래성불’을 강조하는 선. 화두일념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 수행은 단연 ‘자력’의 성격을 담고 있다. 자신의 청정성(淸淨性)을 믿고 사무치게 자성(自性)을 찾아가는 수행원리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수행의 자력은 ‘믿음’에 근거한다. 즉 ‘믿어야 선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 말이다.
보광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은 “선 수행에서는 불타의 말씀보다 조사의 말을, 경전보다 조사의 어록을, 계율보다 청규를, 불타의 수행법보다 조사의 수행법을 더 중요시 한다”며 “오히려 조사불교가 화두참구를 신앙화하고 다른 수행법보다 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럼 염불은 정말 타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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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염불은 중생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중생을 생각해 구제하는 마음이다. 염불은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수행이기 때문”이라며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선정일치(禪淨一致)’라고 강조해 염불과 선이 같다”고 설명한다.
60년 넘게 선방수좌로 간화선 수행을 해온 하동 칠불사 운상선원장 지옹 스님은 “염불은 자력”이라고 말한다. 특히 염불선의 경우, 수행체험자의 자발성을 유도해내 기복 등의 소극적인 수행을 순간순간의 망상을 거둬내는 적극적인 수행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스님은 “지극한 염불수행에서 이뤄진 무심ㆍ무념은 ‘염불하는 이 놈은 무엇인가’란 염불화두를 간절하게 만든다”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성미타(自性彌陀)’를 밝혀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을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밝은 눈’은 자력, ‘빛’은 타력
보광 스님은 자력과 타력의 관계를 ‘밝은 눈’과 ‘빛’으로 비유한다.
스님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내 눈이 밝아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 눈이 밝다고 할지라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며 “내 눈이 자력이고, 빛은 타력이다. 때문에 자력은 타력에 비해 아주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즉 내 눈이 밝다고 해 이 세상을 볼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다른 중생들의 힘에 의해서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불교에서의 진정한 타력이라는 설명이다.
#자ㆍ타력은 방편, 성불 위한 길일뿐
효란 스님은 “선이든 염불이든 믿으면 하나”라고 강조한다. 즉 수행의 목적은 성불이고, 모든 수행법들은 성불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만 다를 뿐인 셈이다.
스님은 “육조 혜능 선사의 제자들이 염불수행을 하던 선도라는 대사를 보고, 육조 선사에게 ‘우리들은 죽도록 참선만 하는데, 저들은 염불만 하니 무슨 이익이 있어서 하는 거냐’고 묻자, 육조 혜능 선사는 ‘일구미타무변염(一句彌陀無變念 : 일념으로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염불하면) 불로탄지도서방(不勞 指到西方: 손가락 튕기는 힘도 들일 것 없이 서방정토에 태어난다)’라 말했다”며 “이는 수행자의 인연에 따라 수행법이 다르고, 수행법의 우위는 없다”고 강조한다.
덕산 스님(청원 혜은사)도 마찬가지다. 스님은 참선이든 염불이든 모두 생각이전의 자리인 진여당체(眞如當體)에 마음을 주고 정진한다면 자력이건 타력이건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선과 염불 등으로 대변되는 자력과 타력의 문제는 수행법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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