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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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심으로 보면 모두가 '헛 것'
[지상백고좌] 태안사 원각선원 선덕 종안노사

태안사 원각선원 선덕 종안 스님
종안(宗眼ㆍ82)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동리산 태안사는 예부터 큰 선지식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다. 개산조 혜철 스님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ㆍ보물 제273호)’도 유명하지만 2003년 열반한 청화 스님의 자취가 아직도 생생하다.

초여름 땡볕을 피해 일주문 앞을 지나치려는데 벌 떼가 주련 아래로 맴돌고 있었다. 일주문 기둥 속에 벌집이 들어선 모양이다. 꿀을 찾는 벌 떼처럼 불도를 깨치려 모여 들었을 동리산파의 옛 수좌들이 이랬을까. <화엄경> 십지품에는 천인(天人)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간청하면서 “목마른 이 감로수를 그리워하듯/ 굶주린 이 좋은 음식 생각하듯/ 벌 떼가 단 꿀을 찾듯이/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감로법문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묘사한 구절이 떠올랐다. 천년이 지난 오늘도 태안사 선방에는 철마다 자성을 밝히고 확철대오하기를 간절히 서원하는 납자들 앞 다퉈 방부를 들인다.

태안사의 부속암자인 가은암은 대웅전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대숲사이에 숨어 있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그야 말로 토굴이었다. 요 며칠 비가 온 뒤여서 개울물 소리는 속세의 번뇌까지 모두 쓸어버릴 것처럼 시원했다. 10여 년 전 청화 스님이 지었다는 이 암자는 슬레이트 지붕에 3칸짜리 누옥으로 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낡은 토굴이었다. 1칸짜리 작은 선방과 스님의 처소가 전부였지만 몇 해 전부터 혼자 힘으로 조금씩 규모를 늘려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가지런한 마당이며 채마밭이 단정한 수행자의 토굴이라는 느낌 그대로였다. 동안거는 대중선방에서 수행하지만 하안거는 이곳에서 난다고 했다. 하루 8시간을 정진하는 젊은 수좌들에 비해 무섭도록 정진하는 종안 스님 수행근기가 대중생활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82세 노구에도 하안거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을 정진한다
“나야 뭐, 늘 그냥 그대로지”
무심도인(無心道人) 종안 노사는 안부를 묻는 기자에게 자연그대로 더불어 살려 노력하는 것 말고 별다를 것이 없다며 ‘허허’ 하고 웃었다. 여든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종안 스님은 이번 하안거도 여지없이 방부를 들이고 새벽 2시부터 하루 12시간 이상을 참선에 매진하고 있다. 그만큼 스님은 사중과 선방수좌들의 사표로 귀감이 되고 있었다.

종안 스님은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꼿꼿한 허리에 자애로운 음성으로 기자를 반겼다. 장마가 계속되던 차에 모처럼 해가 났던 이날, 스님의 처소에는 습기를 없애려 군불을 땠다며 마루에서 손님을 맞았다. 어른 세 명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에도 비좁은 마루였다.

종안 스님은 누구와도 말을 잘 하지 않는 분이다. 이번 철을 같이 나기 위해 스스로 자청했다는 시자(법명을 물었지만 그조차 대답하기를 사양했다)스님과의 대화도 극히 제한 적이라고 했다. 겸연쩍게 기자와 시선을 맞추며 “말이 필요 없어서”라고 웃으신다. 기자에게는 그나마 “찾아온 손님을 그냥 내칠 수 없어 맞았을 뿐”이라고.

시자 스님이 내온 시원한 감식초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선반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짚신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질긴 닥나무 껍질과 무명천을 섞어 엮은 짚신이었다.

“예전 도인들은 다 신을 삼아 신었지”라면서 짚신 한 짝을 집어 들었다. 여름에는 이렇게 손수 만든 신을 신는다고 했다. 언뜻 보기에도 단단한 매듭에 깔끔한 마무리는 수십 년 다져온 솜씨다. 종안 스님은 신의 내력을 ‘육바라밀’ 법문으로 천천히 들려 주셨다.

“신총이 좌우에 3가닥씩 매듭진 짚신의 울은 육바라밀의 상징이여. 짚신 주둥이는 보시, 가운데는 지혜, 밑바닥은 정진, 짚신 굽은 선정, 무명천으로 둘러 묶은 신총은 지계, 돌기총은 인욕이지요” 보살이 되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여섯 가지 덕목이 짚신 한 켤레에 모두 담겨 있다니 스님의 안목에 그저 숙연해질 따름이다. 널리 자비를 베푸는 ‘보시’ 청정함을 지키는 ‘지계’ 탐욕을 끊고 참는 ‘인욕’ 게으르지 않는 ‘정진’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참 혜안을 구하는 ‘지혜’까지 대승불교의 실천행인 육바라밀은 스님의 오랜 수행역정을 대변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고행이 필요하단 생각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삿갓에 석장을 짚고 목적지도 없이 세상을 주유했다. 이 당시 ‘두타행(頭陀行)’때도 스님의 발에는 ‘육바라밀 짚신’이 있었다. 자신만의 안목으로 12두타를 정하고 고행의 길을 나선 것이다.

“첫 번째 묵언해야 해, 두 번째는 장좌를 하지, 세 번째는 1종식(一種食ㆍ하루 한 끼만 먹음)을 하되 추녀 바깥에서만 먹어야 해. 아침한때를 얻어먹는데 밥을 달라는 말을 못하니깐 죽비를 쳐요, 죽비소리에 주인이 나오면 바리때를 내밉니다. 네 번째가 7개식입니다. 7집에서 얻어 한 때를 먹는 거여, 다섯 번째가 완전히 인적이 끊어지고 어두워지면 봉분 앞에서 무상관(無常觀ㆍ온갖 것의 무상함을 관하는 선정법), 여섯 번째는 목적지 없이 하루 종일 걷습니다. 일곱 번째는 동쪽으로 갈지 서쪽으로 갈지 따지지를 않고 발길 닫는 데로 가는 겁니다. 여덟 번째는 깊은 모자(삿갓)를 쓰고 하늘을 안 봐, 아홉 번째는 단벌로만 다녀요, 열 번째는 한번 밟은 길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열하나는 짚신을 신어, 열두 번째는 모든 두타를 머릿속으로 외우면서 걷는 겁니다. 이게 다 내 안목으로 한거지 조사 스님 흉내 내고 한 건 아닙니다”

덕유산 은신암 토굴에서 남원을 지나 곡성에 이르렀을 무렵 두타행을 멈췄다. 20년도 더 된 얘기다. “모든 게 새롭더라고, 공부는 아주 최고로 잘됐어요. 그 뒤로 공부도 꾸준했어. 지금은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없지, 아직 그런 걸 하는 이는 못 봤어요”

종안 스님은 불혹의 나이에 출가했다.
늦은 발심이었지만 <초발심자경문>의 ‘마음에 애착이 떠나면 그 사람을 중이라 하고, 세속에 미련이 없으면 그것을 출가라 한다(離心中愛 是名沙門 不變世俗 是名出家)’라는 구절처럼 애착도 미련도 없으니 늘 무심하고 무상하다. 그렇게 40여년을 자연속에서 살았다.

태안사 주지 종효 스님은 “종안 노사야 말로 40여년을 결제도 해제도 없이 수행에만 매진한 숨은 선지식”이라며 한없는 존경을 표한다. 종안 스님은 세상 사람들이 상(像)으로만 살기 때문에 참 잘사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중생심이 앞서 헛것만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근본을 치료해야하는데 현상만을 놓고 다투고 있다고 했다. 매일 길게는 17시간, 짧게는 12시간을 정진하지만 하루 공양은 한 끼뿐이다. 1종식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스님의 청규다.

“뭘 먹든 이 몸뚱이가 유지될 만큼만 먹으면 되지 더 바랄게 없어요. 절에선 조석 예불만 빠지지 않으면 먹는 거 입는 건 걱정 않으니 먹는 것에 집착 할 일 없습니다”

실제로 종안 스님은 출가 후 누더기처럼 기운 장삼 한 벌과 염주 삿갓 석장 짚신 외에는 자기 것이라고는 가져본 것이 없다. 그렇게 참선에만 매달렸다니 예사 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종안 스님이 정진하는 가은암 선방 안에는 좌복 두개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손때 묻은 죽비하나 낡을 대로 낡은 벽시계 헐어 빠진 누더기 장삼 한 벌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방문을 열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언덕과 대숲이 펼쳐지고, 도랑 물소리, 대숲의 사각거리는 잎사귀 소리까지 천지의 모든 것이 방안 가득 들어온다.

요즘은 재가자들도 참선 공부 많이 하는데 이들에게 참선 잘하는 법 가르쳐 달랬더니 “내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하고 시침을 떼신다. 그러면서 스스로 발심해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이었다. “정진이라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지 자연스럽게 하는 게 제일 좋아요, 사람의 도는 없는 데서 밝아집니다(人道無明). 생사 없는 실상은 마음비우는 공부를 통해서 자성을 비워내는 겁니다.”

손수 삼은 짚신은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늘 묵언을 강조해온 스님은 이날 몇 마디 하시지도 않았지만 기자와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말씀이 많았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기자를 만나 이러고 있으니 나도 공부를 잘 못하는 겁니다. 왜냐면, 지껄이니까요. 말없는 게 최고 잘하는 거여. 최고 정진 잘하는 게 말이 없이 묵언하는 거여. 내가 제대로 수행이 됐다면 중생들이 그냥 따릅니다. 그게 중생제도죠. 말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수행이 제대로 되면 말하지 않아도 깨친 이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틀립니다. 부처님도 사실은 아무 말씀 안하셨어요. 이런 저런 경전들은 후대에 제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종안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수행의 근본임을 강조했다.

“이 공부도 선근이 있어야 해요. 선근이 없으면 제아무리 불법이 좋아도 힘든 것이 이 공부라. 불법은 인과법이기 때문에 거저해주는 것은 없어요. 스님이나 속인이나 그저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수행자에게는 게으른 것이 제일 큰 병통이라. 부지런한 것도 그냥 부지런 한 것은 소용이 없고, 남을 이롭게 부지런히 행동하고 마음 닦는 것이 최고지요”


■종안 스님은 1924년 충남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던 스님은 유가와 도가의 경전을 읽었지만 경계를 깨닫고 생사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혹의 나이에 불문에 귀의했다. 공주 갑사로 출가해 1970년 화엄사 도광 스님을 은사로 득도,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등지의 토굴과 화엄사 해인사 월명사 수도암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생사를 건 정진에 몰두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보여 온 스님이 몇 해 전 묏새와 한데 생활하는 모습이 알려져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최근 10여년을 곡성 태안사 원각선원 선덕(禪德)으로 가은암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다.
태안=조용수 기자ㆍ사진 고영배 기자 | pressphoto1@hanmail.net
2005-07-16 오전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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